그 마을이 특별한 이유
수문암 (守門岩)수문암 (守門岩)
“아니, 왜 저기에 저런 게 있지?”
처음 그것을 목격했을 때 나는 시골의 마을버스 안에 있었습니다. 고향 외각에 위치한 아버지의 별장에 다녀오는 길이었는데요. 버스의 종점 마을, 그 앞에 당당히 서 있던 그것은 묘하게 생긴 석상이었습니다.
멀리서 보면 두루마기를 입고 독특한 모자를 쓴 사람이 서 있는 형상인데요. 가까이 다가가서 보면 올록볼록하게 튀어나온 광대뼈와, 개구리처럼 튀어나온 눈, 움푹 들어간 입이 인상적입니다. 보는 각도를 달리할 때마다 분위기가 확확 달라지는 것이 보통 물건이 아니다 싶었습니다.
자연이 만들었다고 하기엔 상당히 구체적인 인물의 형체를 가지고 있고, 사람이 조각했다고 하기엔 석상에 깃든 분위기가 너무도 신비로워 자꾸만 눈길이 가더군요. 하지만 내가 제일 놀랐던 것은 이 석상의 위치였습니다. 아스팔트로 잘 닦여진 도로 한가운데 보란 듯이 자리를 잡았더군요. 상당히 비현실적인 풍경이었습니다.
물론 도로 한가운데 뭔가가 ‘보존’되어 있는 풍경을 처음 본 것은 아닙니다. 경남 합천군 해인사의 가장 높은 암자, 백련암 가는 길에는 도로 한가운데에 큰 나무가 보존되어 있고요. 서울 서대문구 안산 둘레길을 걷다 보면 데크 중앙을 뚫어 살려 놓은 나무들을 가끔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나무, 즉 살아 있는 생명을 ‘보존’ 하기 위해서 가능한 일이었지요.
이렇게 도로 한가운데 돌을 보존해 놓은 경우는 흔치 않습니다. 보통은 옮겨놓기 마련이거든요. 통행에 불편을 줄 수도 있고, 돌, 석상 그 자체를 보호하는 차원에서도 이렇게 두어서는 안 될 일이지요. 하지만 만약 ‘일부러’ 이렇게 둔 거라면 그 이면에 흥미로운 이야기가 숨어 있을거라 생각했습니다.
대체 이 석상의 정체가 무엇일까, 혹시 유물일까? 주변을 둘러봤지만 그 어디에도 석상에 대한 정보는 없었습니다. 다만 몸통의 앞부분에 한자가 조각되어 있더군요. ‘寺門岩’ 부식이 되어 한자의 형태가 온전치 못한 상황에서 사전을 찾아보니 ‘사문함’ 혹은 ‘시문함’이라고 읽을 수 있었는데요. 검색창을 뒤져보아도 아무런 정보가 나오지 않는 것을 보니 뭔가 잘못된 모양입니다.아버지의 도움을 받아 석상의 진짜 이름을 알아낼 수 있었습니다.
守門岩 (지킬 수, 문 문, 바위 암), 석상의 이름은 수문암이었습니다. 문을 지키는 바위, 이름을 풀이해보니 그제야 퍼즐이 풀리더군요. 그러니까 그 도로는 마을의 문이었고, 도로의 중앙에 놓였던 석상은 마을을 지키는 일종의 수호신(?)이었던 겁니다. 지명과 수문암이라는 검색어로 구글링을 하니 드디어 바위에 대한 정보가 나옵니다.
“수문암은 마을 입구에 있는 사람 형상을 한 바위로 약 100년 전에 잡귀들의 마을 근접을 막기 위해 세웠다. 매년 음력 정월 2일에는 당산제를 올리고 있으며 2008년에는 살기 좋은 마을 가꾸기 사업을 통해 마을 입구에 성황당을 세우고 마을을 대대적으로 단장했다. ”
사실 조금 놀라웠습니다. 대대적으로 마을을 단장하면서 아스팔트를 깔고 길을 넓히면서도 도로의 정중앙에 위치한 석상을 그 자리에 보존하고 있다니요. 나무처럼 실제로 살아있는 생물은 아니지만, 적어도 이 마을 사람들은 수문암을 생명이 깃든 존재, 자신들을 지켜주는 존재로 여기고 대접하고 있다는 의미 아니겠어요?
문득 100년이 넘는 기간 동안 수문암이 지켜온 이 마을과 사람들이 궁금해졌습니다. 만약 마을로 들어가는 다른 길이 없다면, 도로 정중앙에 있는 수문암 때문에, 1톤 트럭조차 지나다니기 힘들어 보이거든요. 좁은 도로가 주는 불편함을 감수하면서도, 전통을 보존하는 사람들, 그들이 사는 마을은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요?
서울에서 자동차로 세 시간을 가고, 시외버스 터미널에서도 하루에 네 번밖에 다니지 않는 마을버스를 타고 종점까지 가야 하는 먼길이지만, 조만간 한번 다녀와야겠습니다. 전통과 자연이 오롯이 보존되어 있는 그 마을에 가면 내가 잊고 지내거나, 혹은 잃어버렸던, 어쩌면 잃어버린 지조차 몰랐던 그 무엇과 마주칠 것 같은 기대감이 생겼거든요.
수문암을 지켜온 마을을 보면서 생각합니다. 특별함이라는 것, 내가 가진 소중한 것을 오래도록 지키고 보존하는 것만으로도 저절로 생겨나는 남다른 매력이 아닐까요.
(2022년 7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