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의 ‘술 한잔’은 뭐였을까?

더 늦기 전에 물어야 할 것들

by TL

부모님이 서울에 올라오셨어. 아버지의 정기검진날이었거든.

아버지는 지난해 전립선암 수술을 받으셨어.

다행히 초기에 발견되었고 전이도 없어서

비교적 간단하게 수술을 마쳤지만 추적관찰은 중요하니까.

지난주 CT 및 초음파를 찍었고 오늘은 그 결과를 확인하는 날이었어.

몇 주전 집에 갔을 때 추적관찰 결과가 어떻게 나올까

살짝 초초해하던 아버지의 모습이 떠올랐어.

직장을 다닐 땐 서울역에서 만나 점심을 먹고 배웅을 했지만,

이젠 ‘백수’가 되었으니 병원으로 오라고 하더군.

병원 근처에 맛있는 설렁탕 집이 있다나?


의사와 면담을 끝낸 아버지의 표정은 들떠 있었어.

“아주 좋네요!”라고 해서 “그럼 이제는 술 한잔 해도 되겠습니까?”라고 물었더니

“꼭 드셔야 한다면 어쩔 수 없겠지만, 되도록 안 마시는 걸 권장드립니다.”라고 하더라고.

의사 선생님 말투까지 흉내 내며 신이 났어.


건강에 안 좋아도 꼭 술을 마셔야겠냐는 나의 말에,

술 한잔도 못 마시면 인생이 무슨 재미냐는 아빠.

생각해 보니, 퇴임 후에도 지금까지 술자리가 끊이지 않는 우리 아빠는

인생이 참 재밌었겠구나 싶더라.

서울역에서 커피를 마시는데 큰아버지께 전화가 왔어.

요양원에 계시던 할머니를 병실로 옮겼다는 거야.

자꾸 배에 복수가 찬다고.

잠시 분위기가 무거웠지만

언젠가는 마주해야 할 상황임을 알고 있었기에 곧 담담해졌어.


주말에 다 같이 할머니 면회를 가기로 했어.

알고 보니 우리 할머니, 올해 98세라고 하시더라.

누군가는 천수를 누린 거라고 하지만,

요양병원에서의 2년 대신 집에서의 2년이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때 할머니가 넘어지지만 않았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러다 이런 생각이 들었어

우리 할머니는 주량이 얼마였을까?

할머니의 인생은 재밌었을까?

아니 그 시대의 할머니들 인생이 재밌을 리 없지.

할머니와의 대화를 더듬어 보면 온통 고생하셨던 기억투성이야.


홀로 두 아들을 키우며 억척스럽게 살았고,

일하고 돌아오면 동네에서 가장 말썽쟁이였던 아빠와 큰아빠가 낸 사고를

수습하기 위해 동네방네 사과를 하고 돌아다녔다는 이야기.

하나가 맞고 들어오면 하나가 뛰쳐나가 복수를 했다나.

너무나 지쳐 사고뭉치들을 고아원에 잠시 맡긴 적도 있었다는 이야기도 들었지.

그런 할머니에게도 있었을까?

아빠의 인생을 재밌게 해주는 ‘술 한 잔’처럼,

할머니에게도 인생을 생기 있게 만들어주는, 아니 위로를 주는

‘술 한 잔’ 같은 것이 있었을까?

... 그렇다면 그건 뭐였을까?


나는 할머니가 유일하게 속을 나누는 손녀라고 생각했는데,

가장 중요한 것들을 물어보지 못했네.

할머니의 대답을 들을 수 있는 기회가 있을까?

마지막으로 면회 갔을 때 만났던 할머니가 떠올라,

앙상하게 마른 채 침대에 누워있던 나의 할머니.


그러다, 커피를 맛있게 마시고 있는 아빠와 눈이 마주쳤는데,

72세인데도 불구하고

상대적으로 너무나 젊고 생기 있어 보이더라.

생각해 보니 20여 년 전 할머니도 그랬어.

그때도 할머니였는데 꼿꼿하고 정정하고 고우셨지

진짜 세월이 많이 흘렀네.

그 많은 시간 동안 내가 한 것보다

내가 하지 못한 것들이 더 많이 생각나.

그래서 다짐해.

시간이 더 지나면 들을 수 없는 대답을 듣겠다고.

소중한 사람들에게 인생을 행복하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묻고 다니겠다고.


더 늦기 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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