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어난 문제에 대해서는 짧게 괴로워하고, 해결책만 생각할 것
몇 년 전, 이직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의 일이다. 야근 중 내가 보던 숫자와 매니저가 보던 숫자가 다르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직한 지 몇 달이 지났고 업무도 어느 정도 익혔다고 생각했는데, 매니저가 “내가 본 건 이 데이터다”라며 캡처를 보내주었을 때, 나는 그 자료가 어디에서 나온 것인지조차 알지 못했다. 그 순간 스스로가 너무 싫었다.
‘이런 것도 모르고 지금까지 어떻게 일했지?’ 자책하며 업무 노트에 ‘데이터가 잘 정리되지 않아 멘탈이 나간다’라고 적으려다가, 문득 ‘멘’ 한 글자를 쓰고 지워버렸다. 대신 ‘내일 미팅에서 데이터 포인트 문의할 것’이라고 썼다. 답답한 마음은 여전했지만, 문제를 해결하는 쪽으로 생각을 빠르게 전환한 내가 참 좋다고 생각했다.
나를 자책하기는 했지만 아주 짧은 시간만 그랬고, 그 이후 바로 마음을 바꿔 왜 그동안 이걸 파악하지 못했는지 책망하지 않고, 그냥 해결책만 생각했다. 물론 내 생각의 흐름이 과거의 나를 탓하는 쪽으로 흐를 수야 있지만 '일어난 일은 이미 일어난 일이고, 과거를 바꿀 수는 없고, 바꾸지 못하는 것에 괴로워하지 말자'라고 그 생각에 제동을 거는 것이 스스로도 신기했다. 괴롭더라도 아주 짧은 시간 괴로워하고 내가 바꿀 수 있는 해결책만 생각하는 것이 몇 년간 일하면서 깨닫게 된 나를 지키는 법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무릎이라도 꿇을까요?"
예전에 이런 일이 있었다. 그 당시 나는 일을 시작한 지 얼마 안 된 초년생이었고, 지금은 정확히 어떤 일인지 기억조차 나지 않는데 초년생이던 내게는 정말 큰 일처럼 느껴졌던 일이었다. 어떤 이커머스 마케팅팀과 협업하던 중에, 나와 우리 회사 세일즈가 함께 전달한 자료가 무언가 잘못되었다고 상대 이커머스 마케팅팀에서 계속해서 컴플레인을 걸었었다. 계속 걸려오는 전화, 받을 때마다 짜증을 내는 상대 때문에 안절부절못하던 내가, 자료를 같이 전달했던 세일즈 분께 상대 마케팅팀이 계속 컴플레인을 거는데 어떻게 하면 좋을지 걱정하며 물었었다. 그때 함께 일했던 세일즈 분이 아무렇지 않다는 듯이 “무릎이라도 꿇을까요?”라고 물었던 것이 지금도 가끔 생각나고는 한다. 컴플레인에 마음 불편해하지도 않았고, 그저 무엇을 해줘야 해결되는지만 생각하는 말투였다.
그들의 속상한 마음은 알겠고, 그래도 우리가 서로 비즈니스를 하려고 만난 것이고 문제 해결만 하면 되는데, 왜 계속 컴플레인을 하는지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담백한 말이었다. 무릎을 꿇어주면 해결이 되는지, 속상한 말투도 아니었고 화가 난 말투도 아니었고 그저 해결책만 생각하던 그 말투가 기억에 난다. 그 이후 무언가 문제가 생기면 나도 의식적으로 해결책에 집중하려고 하는데, 함께 일하는 상대가 해결책을 찾는 것이 아니라 일어난 문제에 대해서 비난만 한다면, 그때의 에피소드를 생각하고는 한다. '무릎이라고 꿇을까요?' 그 말투를 떠올리면 조금은 마음이 다독여진다. 물론 이렇게 생각한다 하더라도 사람인지라 실수한 마음, 잘못했던 마음에 주눅 들기는 마련이라, 어떻게든 문제를 해결하면 될 것이라 나를 다독이는 에피소드가 되었다.
힘든 일도 딱 있는 그대로만 받아들일 것
그리고 지금의 나는 힘든 일이 있다 하더라도 있는 그대로, 딱 그 만큼만 받아들이려 노력하고 있다. 비즈니스 상황은 여전히 예상치 못했던 일들이 터지며 늘 복잡하지만, 그 소용돌이 속에서 내 마음만은 아주 단순하게 상황을 받아들인다.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다. 일이 너무 힘들 때, 혹은 야근이 너무 많을 때 오늘 할 일들을 리스트업 하고 하나씩 지워나가는 것에 집중하고, 퇴근길에는 '택시를 탔고 20분 뒤면 집에 도착하겠구나. 오늘 할 일은 끝' 이렇게 생각한다.
예전의 나는 일이 너무 많아 야근하고 돌아가는 택시 안에서 '이렇게 사는 게 맞나'라는 질문을 던지고 내가 원하는 삶은 무엇일지, 나는 왜 지금 이러고 사는지 등등 많은 질문을 던졌다. 그래서 야근을 해서 피곤한 마음 그 이상으로 내가 던지는 고민들 때문에 더 힘들어했다. 지금은 버텨야 하는 시기라고 스스로 정의 내리고, 내가 힘들어도 버텨야 한다며 스스로를 몰아세우기도 하고, Now or Never (오늘 버티거나 아니면 아예 나가떨어지거나)이라는 문구를 마음속에 되뇌기도 했다. 물론 그렇게 고민하고 질문하는 시기도 있어야 한다는 것을 알고, 또 그 당시 내가 치열하게 고민했기 때문에 그만큼 내가 진정으로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해 고민할 수 있었던 것도 맞다. (물론 글감도 많이 남았고) 하지만 그 고민 끝에 더 나를 버텨야 한다고 몰아붙였던 것도 내 스스로였다.
지금 내가 단순하게 상황을 받아들이는 것은 그런 고민들을 어느 정도 끝냈기 때문임을 안다. (물론 새로운 고민이 다시 생길수는 있지만) 지금의 내가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내가 갖고자 했던 네임밸류도 달성의 문제가 아니라 선택의 문제임을 안다. 내가 선택한 길이라고 한 번 생각한 이후부터는, 다시 의미를 묻거나, 이렇게 사는 게 맞는지 스스로 묻지 않게 되었다. 그래서 야근을 끝내고 집에 가는 택시 안에서 이제는 몸은 피곤할지라도 마음의 평온이 찾아왔다.
그래서 혹 이 글을 읽는 누군가가 지금 일하는 마음이 너무 힘들고, '해결책만 생각하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려 해도' 마음이 다독여지지 않는다면, 언젠가는 마음을 다루는 체력도 큰다는 생각을 가지고 의식적으로 ‘해결책만 생각하자’고 계속 되뇌었으면 좋겠다. 그 당시 나처럼 스스로에게 혹독하게 'Now or Never' 오늘 버티거나 아니면 아예 나가떨어지거나 하면서 스스로를 밀어붙이는 대신에, '그냥 오늘 할 일을 끝냈고 20분 뒤면 집에 도착할 뿐'이라고 생각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