갖지 못한 타이틀, 네임밸류에 괴로워할 때
여러 경험을 하면서 내가 원하는 일에 한 발짝 더 다가갔지만 업 가치관에 있어서 여전히 남들의 시선, 있어 보이는 회사 같은 '네임 밸류'를 쉽게 놓지 못했었다. 이번 글에서는 내게는 시간이 걸렸던, 남들의 시선에서 벗어나는 것에 대해 이야기한다.
난 왜 남들의 시선에서 자유롭지 못할까?
초년생 때 나를 가장 힘들 게 했던 건 내 스스로였다. 내가 나를 힘들게 했다고는 하지만, 남들의 시선, 그렇다고 정확히 누구를 지칭하는지도 모르는 누군가의 시선에 맞추고자 스스로를 계속 채찍질했다. 초년생이니까 실력도 없고, 경험도 없어서 회사를 골라갈 수 있었던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내가 "남들의 시선 따윈 상관없어." 하면서 하고 싶었던 것이 명확했던 것도 아니다 보니, 내가 갈 수 있는 회사는 남들의 시선에서 보았을 때 별로였고 움츠러들 수밖에 없었다. 나를 설명하는 단어였던, 내가 속한 회사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누군가 어느 회사를 다니냐고 물어보면 내가 다니는 회사의 이름을 말하고서 한참을 이 회사가 얼마나 유망한지 설명하는 나 자신이 싫었다. 그냥 회사 이름을 말하기만 해도 누구나 고개를 끄덕거리는 회사를 다니고 싶었다.
무언가 갖고 싶어 하는 마음을 내려놓는 법도 배워야 하는데 배우지 못했다. 생각해 보면 어렸을 때부터 성적을 일렬로 줄 세워놓은 상황에 놓여있었고, 지금의 성적보다 더 높은 성적, 더 높은 학교를 갈망하며 스스로를 채찍질하는 것에 익숙했기 때문에, 갑자기 내 기준점을 낮추는 것을 할 수는 없었다. 그리고 남들의 시선과 상관없이 ‘내가 좋아하는 일’이 무엇인지 고민할 기회조차 없었고, 그럴싸한 학교, 그럴싸한 직업, 그럴싸한 회사를 갖지 못해 괴로웠다. 그리고 좋은 대학, 좋은 직장은 상대적이었고 어디를 가든 괴로울 수밖에 없었다.
원하던 나를 만나기까지
정세랑 작가의 <시선으로부터>라는 소설에는 이런 문구가 나온다.
예술을 했어야 했는데 하지 못한 사람이, 남들이 보기엔 그럴듯하고 안정적인 삶을 살면서 천천히 스스로를 해치는 것을 제가 얼마나 자주 봤는지 아십니까? ... 큰 회사에 다니고, 가업을 잇고, 대단한 돈을 거머쥐고, 다정한 반려인이나 귀여운 아이들을 얻고 나서도 무언가 안에서 그네들을 갉아먹습니다. 차라리 예술을 편히 시작할 수 있었을 나이에 시작했더라면, 그 성취나 결과가 형편없었을지는 몰라도 나았을 겁니다. 자기 자식이 어떤 성품인지 다 아실 테니 재능의 있고 없고를 떠나, 하지 않으면 스스로를 해칠 것 같습니까? 즐겁게 그리고 쓰고 노래하고 춤추는지, 하지 않으면 괴로워서 하는지 관찰하십시오.... 그런 아이들을 움직이는 엔진은 다른 사람이 조작할 수 없습니다.
이 문장들을 읽으며, 나를 읽었다. 한 번 갖겠다고 생각이 든 것은 스스로 내려놓지 못하고 가지기 전까지는 저 문장의 ‘갉아먹는다’는 표현처럼 나를 갉아먹는다. 초년생 때 내가 원하는 것은 남들의 시선이 전부였고, 그것이 갖기 힘들다고 목표를 낮춰가며 나를 갉아먹을 수는 없었다.
그렇게 원하는 나를 만나기까지 10년이 걸렸다. 결과적으로 내가 괴리감을 극복한 것은 결국에는 그 타이틀을 가져본 후였다. 남들이 말하는 좋은 회사라는 타이틀을 겪고서야 내게 있던 압박감이 사라졌다. 그 시기는 내 스스로가 버거워할 만큼 힘든 시기이기도 했지만, 겪지 않았다면 나는 끊임없이 그 세계를 동경한 채 가지 못한 곳을 바라보느라 힘들어했을 것이다. 남들이 말하는 좋은 회사를 다녀보면서 내가 가진 것에 만족도 해보았고, 그토록 아등바등 가지려 노력했던 회사도 결국에는 사람 사는 곳이고, 이곳만의 힘든 점도 있다는 것을 깨달은 후에야, 남들의 시선에 자유롭게 되었다. 이제야 타이틀, 남들의 기준이 아닌 내게 맞는 회사를 찾는 기준을 하나씩 만들기 시작했다.
원하는 나를 만나기까지 3가지 이야기
1. 결국은 가져 보는 것
첫 퇴사 후 곧 죽어도 마케터로 일해보겠다고 결정했고 그다음은 스타트업이었다. 스타트업이 나와 맞다는 것을 편의점 퇴사 후 조인했던 첫 스타트업에서 알았으면서도 늘 의심했었다. 내가 스타트업이 재밌다고 느끼는 것이 혹 여우의 신포도처럼 자기 합리화가 아닌지 의심했다. 브랜딩을 배우고 싶었고 큰 기업에서 제대로 일해보고 싶었던 마음도 있었기에 P&G를 가게 되었고, 그곳에서 많은 것을 배운 것도 맞지만 결국 내가 즐겁게 일할 수 있는 곳은 스타트업이라는 것도 절실히 깨달았던 것도 사실이다.
남들이 다들 가고 싶어 하는 회사였지만 나는 그곳이 힘들었다. 그때 내게 맞는 곳, 맞지 않는 곳이 있을 뿐 '절대적으로 모두에게 좋은 회사는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내가 그토록 갖고 싶어 했던 네임밸류 있는 회사라는 것은 PLC (Product life cycle)에 있어 성숙기 단계에 속하는 기업들이고, 그곳에서는 리스크 관리 때문에 무언가를 해보려면 내부 설득에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해야 한다는 것을 경험했다.
하지만 이력서의 잦은 이직 또한 흠이 되는 사회에 살고 있기에 3년은 다니자고 나를 달래던 시기였다. 3년은 다니자는 나와의 약속을 지키고, 다시 좋아하던 스타트업 필드로 나오면서 이제야 내가 원하는 나를 만났다는 생각을 했다. 그 3년의 시간 동안 남들이 가고자 하는 회사도 그 회사만의 고충이 있음을 깨달았고, 이제는 하고 싶은 것을 선택해도 그것이 더 이상 자기 합리화가 아니라고 당당히 말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다시 스타트업으로 나온 이후, 누군가 어느 회사를 다니냐고 물으면 회사가 무슨 일을 하는지 한참을 설명해야 할 때도 있었고, 동료가 “왜 그렇게 좋은 회사 관두고 오셨어요?”라고 묻거나, 동료들끼리 ‘아 공부 좀 더 열심히 해서 이런 곳 오지 말 걸.’하며 자조적인 이야기를 할 때도, 나는 내가 모자라서 이곳에 있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이런 상황에서 내가 회사를 키워가는 것이 재밌기에 이곳에 있는 것이기에 그런 이야기를 들어도 전혀 자존감이 깎이지 않았다.
남들에게는 또다시 이 회사가 무엇을 하는 회사인지 설명하는 삶으로 돌아간 것처럼 보이지만, 이제 내면의 모든 것은 충족되었고 ‘일의 재미’에 더 집중할 수 있게 되었다. 이제는 내가 재밌어하는 일을 선택해도 더 이상 마음이 시끄럽지 않은 상태. 원하던 나를 만났다. 그렇게 남이 보는 내가 어떤지에 대해 안절부절못하던 내가 사라졌다.
2. 모든 것을 쏟아붓는 경험
그러면 누군가 ‘저는 제가 갖고 싶은 걸 가져보지 못했는데, 저는 어떻게 하나요?’라고 묻는다면.
세상살이라는 것이 내가 원하는 것을 마음처럼 꼭 가져볼 수 없는 것도 맞다. 내가 네임밸류를 가져본 것도 여러 운과 기회가 맞닿아 가능한 것임을 알고 있다. 그럼에도 ‘모든 것을 쏟아붓는 경험’ 그 자체는 필요했다. 내가 가지지 못한 것을 결국 갖지 못하더라도 받아들일 힘을 만든다. 일과 관련되지는 않았지만 나 역시 모든 것을 쏟아부었던 경험이 있는데, 교대에 입학한 후 반수를 했던 적이 있다. 그때 이것보다는 좀 더 어려운 공부를 하고 싶다는 생각으로 반수를 시작하게 되었다. 후회 없이 모든 것을 쏟아부었는데, 수능 결과를 기다리는 내 마음이 ‘진인사 대천명’이라는 마음이었다.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쏟았고 이렇게까지 노력했는데 안된다면 그저 내 길이 아닐 뿐이고, 이제는 미련 없이 좋은 선생님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만 남았다. 깔끔하게 포기가 됐다. 그리고 역설적이게도 그 마음으로 1년을 보내자, 원하던 결과도 얻게 됐다. 그때 깨달은 것은, 나를 가장 괴롭히는 그 문제를 직시해야 한다는 것, 그리고 내가 후회 없이 모든 것을 쏟아붓고 나면 결과와 상관없이 내 스스로에 만족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내가 나를 가장 힘들게 할 때를 생각해 보면 이상은 저 멀리 있는데 오늘의 내가 달리지 않을 때, 외면하고 있을 때였다.
3. 그리고 내가 정말 원하는 것을 찾아갈 것
그렇게 남들의 시선에 독립한 후에 그때부터 내가 나다워지기 시작했다. 회사 일에서는 예전에 내가 괴롭게 배웠던 것에 더해 내가 기존에 잘하던 것들을 접목시키면서 신나게 일을 했고, 그 일들에서 얻게 된 깨달음을 글로 써야겠다는 생각이 시작되었다. 예전부터 머릿속에 이런저런 생각이 맴돌아 글을 써보고 싶었지만 그동안은 일에 치여 무언가를 더 해볼 생각을 못했었다. 그런데 내가 잘할 수 있는 환경에 있고, 신나게 일을 하게 되자 일은 많아도 내가 좋아하는 일을 시작해 볼 힘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렇게 하루하루 열심히 일을 하고, 퇴근길에 글감을 핸드폰에 하나씩 정리하고, 메모장에 쌓여가던 글감을 정리해 글을 발행하고 나면 찾아오는 뿌듯함을 즐기며, 만족스러운 날들을 하루씩 늘려갔다.
아직도 살아갈 날이 많기에, 내가 나를 힘들게 하는 것이 끝났다고 확답은 못하겠지만, 적어도 오늘의 나는 이상과 현실의 괴리 때문에 괴로워하지는 않게 되었다. 내 시선을 남에게서 나로 가져왔고, 남들의 시선이 아닌 내가 행복한 기준이 하나씩 생기기 시작했다. 그리고 원하는 것이 있으면 그것을 얻기 위해 모든 것을 쏟아부었던 그 경험이 내 두 눈을 이상에서 현실로 데려왔다.
지금 와서 보면 욕심 많은 나를 다루는 법을 명확하게 깨달은 것 같지만, 사람인지라 늘 일관되게 선택할 수는 없었다. 내 성격은 욕심은 많아서, 하고 싶은 일도 해야 했고, 그러면서 안정성도 있었으면 좋겠고, 그러면서도 회사가 네임밸류는 있었으면 좋겠고 원하는 것이 너무 많았다. 그래서 일관된 선택을 하는 것이 너무 어려웠다. 줄다리기하듯 어떤 때는 남들의 시선이 이겨서 좋아하는 일이 아닌 것을 알면서도 네임밸류를 선택할 때도 있었고, 어떤 때는 미래가 불안하게 느껴지더라도 내가 좋아하는 일을 선택하기도 했다. 그렇게 P&G에 있을 때는 내가 하고 싶은 일을 생각했고, 스타트업에 있을 때는 어떤 날에는 안정성을, 네임밸류를 아쉬워했다. 그러다 내가 내 업 가치관들끼리 이고 지기는 경험을 통해 이런 주제의 글을 쓸 수 있게 되었고, 나만의 길이 생겼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10년간 이어오던 줄다리기가 끝났다. 더는 회사라는 타이틀로만 나를 설명할 필요가 없기에, 내가 잘하고 좋아하는 곳에서 일하면서 글을 꾸준히 남기자는 생각만 남았다. 그래서 누군가 자신의 욕심 때문에 힘든 사람이 있다면, 어떤 때는 내 선택에 이기기도 지기도 하면서 언젠가는 내 스스로와 친해지는 법을 깨닫게 된다는 것을 꼭 전해주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