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뱀파이어가 된 나에 대해
오랜만에 육아단상을 쓴다. 과거에 아이 갖기를 고민하던 나에게 누군가 이 말을 미리 해주었으면 하는 생각이 들어 글로 남기기로 했다. 아이 갖기를 고민하는 사람이 있다면 이 글을 읽어보면 좋겠다.
예전에 '워킹맘이 회사를 그만두는 이유에 대해'라는 글을 썼는데, 덕분에 여성의 경력단절에 대한 기사를 기획하던 기자님과 인터뷰 기회가 있었다. 몇 가지 질문을 받았는데, 그중 ‘아이를 낳고 커리어 열망이 줄어드는지, 그 변화가 억울하지는 않은지’라는 질문이 기억에 남았다. 이 질문에 대한 답으로 '바뀐 나'를 정리해보려 한다.
예전에 나란 사람은 커리어가 너무나 중요했다. 일하는 내가 왜 중요했나 돌이켜보면, 우선 사회에서 내 자리 하나 얻어내던 그 과정이 쉽지 않았다. 고군분투 끝에 겨우 얻어낸 자리. 이제야 안정감을 느끼는데 아이를 가지면서 이 상태가 흔들리는 것을 원치 않았다. 일은 경제적 독립의 수단이기도 했고, 나를 세상에 설명하는 방식이기도 했다. 그래서 아이를 낳고 경력단절된 사람들의 이야기가 가장 두려웠다. 조금은 살만해져서 무의식 중에 아이를 갖고 싶다고 생각했음에도, 계속해서 아이를 가지면 안 되는 이유만 찾는 나를 만났었다. 그래서 나는 아이를 왜 갖고 싶은지, 왜 가지면 안 될 것 같은지를 글로 써보기 시작했다. 내 두려움의 정체를 알고 싶었다. 두렵지만 그럼에도 아이를 갖고 싶다는 생각이 확고해져서 아이를 갖기로 결정한 후에는, 언제 아이를 가져야 내 커리어에 영향이 덜할지를 계산하며 아이를 계획했었다. 그 당시 나는 내 일, 내 커리어가 가장 중요한 인간이었다.
뱀파이어 문제: 예전의 내게 중요했던 것들이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
정체성 변화나 가치관의 전환을 '뱀파이어 문제'라고 부른다고 한다. 인간에게 뱀파이어가 될 기회가 주어지면, 인간의 가치관으로는 그 선택이 옳은 선택인지 확신할 수 없다. '맛있는 밥도 못 먹고, 햇빛도 못 쬘 텐데.' 그리고 한 번 뱀파이어가 되면 다시 인간으로 돌아오지도 못하니 정말 중요한 결정같은데 아무리 고민을 해도 결론을 내릴 수 없다. 변화 전의 가치관으로는 변화 이후의 삶이 정말로 나에게 좋은 선택인지 알기 어렵고, 그런 상태에서 나의 가치관을 변화시키는 선택을 해야 한다는 것.
하지만 막상 뱀파이어가 된 후에는, 과거의 내게 중요했던 것들, 밥을 먹고 햇빛을 쬐는 것이 더 이상 중요하지 않아 아쉽지가 않다. 그 이후에는 또 다른 것들이 더 중요해져서, 그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다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내게는 아이를 낳는 것이 그랬다. 결정을 한 순간 이미 나는 뱀파이어가 되어 있었다. 이 선택은 내릴 수밖에 없던 선택이었고, 그 이전의 삶은 희미해졌으며, 예전과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아이는 내게 어떤 존재일까?
새벽 3시, 여느 때처럼 아이는 깼고 주스, 책, 요플레를 돌림노래 부르듯 찾았다. 우는 소리에 결국 주스를 물려주고 가만 앉아 주스를 먹는 아이의 팔을 주무르다, 이런 단어들이 떠올랐다.
내 인생을 망치러 온 나의 구원자
나의 태양
아이가 태어난 후 나와 남편은 태양을 중심으로 도는 행성처럼, 아이를 중심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예전에 내가 어떤 삶을 살았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예전의 내게 태양 같은 존재가 있기는 했었나.
아이의 존재로 예전의 내가 꾸려오던 일상은 사라졌다. 일만 생각하던 나, 잠을 푹 자는 일상은 사라졌고, 내 플레이리스트에는 동요가 가득하다. 책상 앞에 앉아 무언가 쓰는 것이 무엇보다 소중했지만, 이제는 아이가 잠든 잠깐의 토막 시간, 식탁 앞에 겨우 앉을 뿐이다.
그럼에도 이미 나는 아이를 중심으로 도는 행성이 되었고, 그렇게 내 인생을 망치러 온 나의 구원자를 사랑할 뿐이다.
아이는 이때를 까마득히 잊을 것이고, 나는 이 시간을 평생 곱씹으며 살아갈 것을, 이 시간이 지나기도 전에 이미 알고 있다. 그렇게 어두운 새벽, 주스를 마시는 아이의 통통한 팔과 발을 주물렀다.
다행히 엄마가 되고서도 여전히 내 것을 잘하고 싶다는 마음은 여전하다. 하지만 내 것의 정의가 바뀌었다.
내 인생에 아이만 남을까 늘 두려워했는데 아이만 남는 것이 전혀 두렵지 않을뿐더러, 다행히도 내 것을 잘하고 싶다는 마음은 여전하다. 달라진 것은 예전의 나를 구성하는 것이 회사에서의 내가 전부였다면, 지금의 나는 엄마로서의 삶, 글쓰기, 일 이렇게 3개 영역이 나를 구성하기 시작했다. 엄마로서 아이와 함께 시간을 보내고 싶다는 것도 있고,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는 글을 쓰고 싶다는 것이 추가되기 시작했다.
기자님의 질문으로 돌아와서, 엄마가 되어 커리어 열망이 줄어드는지, 그것이 억울하게 느껴지는지에 대해.
한 마디로 정리해 보자면, 맞다 - 엄마가 되어 커리어 열망이 줄어들었다. 그럼에도 그것이 전혀 억울하게 느껴지지 않는다였다. 나를 구성하는 요소가 늘어나면서, 일의 비중이 줄어든 것도 맞다. 그래서 일만 따로 떼놓고 본다면 커리어 열망이 줄어든 것이 맞다가 내 결론이었다.
대신 더 높은 차원의 무엇인가가 생겨났다. 커리어보다 더 중요한 상위의 가치들, 단순한 성공만 바라는 것이 아니라 나와 우리 가족이 일상을 더 잘 보내길 원하고, 우리 아이가 살아갈 세상이 더 좋은 세상이길 바라는 등의 상위 가치가 생겨나기 시작했다. 그래서 나를 행복하게 하는 열쇠가 커리어 하나였을 때보다 더 풍성한 삶을 살고 있다고 생각했다. 여러 버켓을 두고, 커리어라는 버켓 하나만 있을 때보다는 조금은 작아진 버켓들을 균형 있게 채우면서 살아가는 것에서 행복을 느낀다고.
그래서 바뀐 기준에 맞게, 내 일도 재정비를 하게 되고 - 성장 위주의 회사보다 내가 의미를 찾을 수 있는 회사로 이직을 고민하는 등의 변화가 있는데, 이는 내게 행복을 주는 요인 중 가장 큰 행복을 주는 것이 아이이기 때문에, 아이와 함께 더 잘 지내기 위해 다른 요소들을 재정비하는 중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이 말을 누군가 미리 해주었다면, 아이를 갖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덜했겠다는 생각을 한다. 지금 내가 중요하다고 믿는 것들이, 아이를 낳고 나면 전혀 중요하게 느껴지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 또 커리어보다 더 높은 차원의 것들을 추구하는 사람이 될 거란 사실을 말이다. 일에서만 내 존재 이유를 찾지 않아도 되는 것.
그렇게 뱀파이어가 된 나를 만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