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래 꽃을 좋아하셨나요?"
며칠 전 팀 내 인턴 충원이 필요하여, 면접을 보았다. 면접이 모두 끝난 후 더 궁금한 것이 있냐는 나의 질문에, 지원자는 원하는 직무는 찾은 것 같은데 어떤 인더스트리를 가야 할지 모르겠다는 고민 이야기를 했다. 그러면서 원래 꽃을 좋아하셨냐는 질문을 했다. 내가 꾸까에 일하는 이유가 '꽃을 좋아해서'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나는 꽃이 좋아서 꾸까에 온 게 아니고, 면도기가 좋아서 P&G를 갔던 게 아니다.
사람들은 늘 쉽게, 자신의 일을 찾을 때 좋아하는 것에서 시작하라고 말한다. 물론 플로리스트라던지, 목수라던지 자신이 좋아하는 분야에서 직업을 찾는 사람들도 많지만, 마케터처럼 여러 인더스트리에도 적용할 수 있는 직무를 가진 사람은 보통 단순히 그 상품이 좋아서 그 인더스트리를 선택하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나 역시 그랬듯, 초년생 때는 그 내용을 알 수 없어 자소서 '지원동기'에는 그 인더스트리, 그 브랜드와 관련된 작은 추억들에 의존할 때가 많았다. 빙그레 지원동기에 지원자들이 다들 바나나맛 우유와 연관된 자신의 추억들을 꺼내는 바람에 빙그레 지원동기라는 문항이 사라졌다는 웃픈 괴담까지 있다.
나 역시도 초년생 때는 관심 있는 인더스트리를 다들 어떻게 찾는지가 궁금했고, '나는 무조건 화장품 인더스트리 갈 거야.'라고 말하며 대학생 때부터 뷰티 블로거를 자처하며 화장품에 지대한 관심을 보이던 친구들이 부럽기만 했다. 화장품 마케터 재미있을 것 같기는 한데, 그 친구들만큼 화장품 인더스트리에 흥미를 보이는 건 아닌데 어떻게 다들 그렇게 확신하는지 대단하다는 생각만 들었다.
기준을 만들어가는 과정
몇 개의 인더스트리를 거치며 7년 차 마케터가 되어서야 이제는 '인더스트리를 어떻게 찾았느냐'라는 그 질문에 명확하게 답할 수 있다. 물론 그 인더스트리가 좋아서 그곳에서 시작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내가 이 인더스트리, 이 브랜드를 선택한 이유는 내가 가진 '기준'에 부합했기 때문이라고. 내 업을 찾는다는 건 끊임없이 '내가 즐겁게 일하는 기준'을 만들어가는 과정이라고 말할 수 있다.
다시 지원자의 질문으로 돌아가서, '꽃을 좋아하냐'는 그 질문에 이렇게 대답했었다. 물론 꽃을 좋아하기는 하지만, 꽃을 좋아해서 이 곳에 온 것은 아니라는 점. 꾸까를 선택한 이유는 크게 2가지 이유가 있는데,
첫 번째로, 전 회사는 생필품 인더스트리여서 이미 mature 된 시장에서 더 높은 성장률 목표를 달성해야 하는 상황, 하지만 회사 프로세스는 너무 고도화되어있어 새롭게 할 수 있는 것이 많이 없었다. 그때 겪었던 경험들 때문에 상대적으로 immature 한 인더스트리, 내가 해볼 수 있는 것이 많은 스타트업을 가자고 생각했었다는 점.
두 번째로, 데이터를 더 볼 수 있는 곳을 가자고 생각했다는 것. 구글 애널리틱스 등으로 마케팅 활동의 효과를 모두 볼 수 있는 걸 아는데, 생필품은 직접 고객에게 판매하는 채널을 가지고 있지 않다 보니 정량적인 측정이 가능한 이커머스에서도 그런 제약을 겪는 것에 답답함을 느끼고 있었다는 점. 따라서 자체 판매채널을 가지고 있거나 서비스업을 판매하는 인더스트리로의 이직을 고민했다는 것을 이야기했다.
그리고 이직 당시에 이 조건에 부합한 다른 회사가 있었다면 그 회사를 갔을 수도 있다는 이야기까지 해주었다. 인더스트리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내가 재미있게 일할 수 있는 몇 개의 기준들에 부합하는 인더스트리, 브랜드가 있는 것이고 많은 곳 중에 이 곳을 선택하는 것이라고. 사실 꾸까에 오게 된 기준은 몇 개가 더 있지만, 사실 기준 하나하나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이런 '기준'이 있다는 사실이 중요했기에 말을 아꼈다. 더 많은 기준에 대한 이야기는 아래 글에서 볼 수 있다.
https://brunch.co.kr/@236project/49
그리고 안타깝게도 그 기준은 계속 경험해보는 것 말고는 찾을 도리가 없다. 그 기준은 당연히 사람마다 다르고, 시기에 따라서도 예전의 나와 지금의 내가 다르듯 끊임없이 바뀌게 된다.
이직의 역사
위의 글을 보고 어떻게 확고한 기준을 만들었나 싶겠지만, 이 기준은 몇 번에 걸친 이직의 역사에서 얻어낸 산물 같은 것이다. 초년생 때는 사실 해본 경험도 적고, 그렇다고 실력이 있는 것도 아니어서 인더스트리를 골라갈 수 있는 상황도 아니기에 어쩔 수 없었던 것 같다. 그래서 너무 많은 선택지 중에서 무엇을 선택해야 할지 몰라 막막했고, 사실 '선택'할 사치를 누릴 수조차 없기 때문에 조금이라도 들어봤다 싶으면 이력서를 썼었다. 그래서 경쟁자 친구들 중에, 상대적으로 관련된 경험을 가지고 이 인더스트리에서 시작해보고 싶다고 말하는 친구들을 못 이겼던 건 당연한 일이었던 것 같다. 좋아하는 인더스트리를 찾기 위해서 아르바이트를 해보든 책을 읽든 좋아하는 것부터 시작해보라는 말은 그런 말이 아니었을까 싶다.
대학생 때 여러 경험을 해보았지만, 그래도 나는 정말 관심 갖는 단 하나의 인더스트리를 찾기 어려웠고, 마케팅을 하려면 유통은 꼭 경험해봐야 한다는 선배의 말에, 편의점 MD로 6개월도 채 안되지만 유통에서 일을 시작했었다. 그리고 바로 퇴사하고서 들어간 첫 스타트업에 들어갈 때만 해도 내게 기준은 없었다. 그때는 나도 어렸구나 싶은 건, 유통을 꼭 경험해보라는 선배의 말 뒤에 담긴 의미에 대해서 고민해볼 생각을 못했다. 아마 특정 브랜드의 마케터가 되면 매출 목표 달성이라는 건 떼놓을 수 없는 일일 테고, 그때 유통채널에 대한 이해를 가지고 있으면 도움이 될 테니 경험해보라는 것 아닐까 싶다. 그리고 그 선배가 말했던 유통은 이커머스였을 텐데, 나는 고배의 잔을 여러번 마시며 유통 인더스트리 경험해보라는 선배의 말에, 결과적으로는 한 번도 인더스트리나 직무에 관심조차 가져보지 않았던 편의점 MD라는 일을 맡게 되었다. 그동안 생각조차 해본 적 없는 인더스트리, 직무에 엄청나게 괴로워했던 경험을 했다.
그리고 지금 생각해보면 그 선배가 말했던 것처럼 무조건 꼭 경험해야만 하는 인더스트리는 없다. 누구에게나 정답처럼 꼭 경험해야 할 인더스트리는 없고 (물론 21세기에 이커머스 경험해보면 좋기야 하겠지만), 사람마다 재미를 느끼는 요소가 다른데 어디에도 정답처럼 적용시킬 기준은 없다. 그리고 기준을 찾는 과정도 사람마다 다 다를 것이다. 어떤 사람은 첫 직장을 찾는 순간부터 너무 딱 맞는 인더스트리를 만나는 사람도 분명 있을 것이고, 나처럼 '소거법'으로 찾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연애관같은 업의 가치관
이 글을 쓰면서 일에 대한 가치관도 결국은 연애관을 정립하는 과정과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처음 연애를 할 때는 사실상 비교 대상도 없고, 잘생긴 사람 만나겠다 정도의 기준만 있을지도 모르겠다. 근데 연애를 한 번 해보았더니 잘생겼는데 연락도 잘 되지 않고 내 이야기에 관심 없는 사람이어서, 다음 연애 때는 외모보다도 나를 1순위로 두는 사람이면 좋겠다, 연락이 잘되면 좋겠다 처럼 나에게 맞는 조건들이 점점 추가되는 것이다. 처음에는 추상적이고 남들과 비슷한 조건일지 몰라도 자신이 겪는 경험에 따라서 다른 사람들과 다른 나만의 조건이 추가되는 것이다. 만약 연락이 잘 되지 않던 상황이 별로 문제로 느껴지지 않았다면 그 사람에게는 연락이라는 기준이 추가되지 않았을 것이다. 또 너무 당연하게 충족되어 문제인 줄 몰랐던 것이 (내게 중요한 줄 몰랐던 것이) 결핍되는 순간 중요도가 부각되고. 또 시간이 흐르면서 그 당시는 정말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조건이 사라지기도 하고. 나를 알기 위해서 연애를 많이 해보라는 조언은 이 끊임없는 기준 세움, 경험해보기 전에는 몰랐던 내게 중요한 요소들, 내가 필요한 요소들을 찾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경험해보는 것이기 때문 아닐까. TV로 간접 경험하고, 친구의 이야기를 들어서 분명 기준을 세울 수는 있지만 직접 경험하는 것에 비할 바가 되지 않는다.
이렇게 연애에 빗대어 말했지만, 내 업을 찾는 것 (직무를 찾고, 인더스트리를 찾고, PLC를 찾는 것) 역시 다를 바가 없다.
Connecting the dots
초년생 입장에서는 막막하게 느껴질 수 있을 것 같기도 하다. 나도 나를 모르겠는데 일단 경험해보라는 뻔한 말을 저렇게 풀어놓았구나 싶기도 할 텐데, 내가 해줄 수 있는 위로, 그냥 초년생 때의 나를 만나면 해주고 싶은 말은 쓸데없는 경험은 그 어느 것도 없다는 것이다. 머릿속으로만 이 길이 내게 맞는지 아닌지 몇백만 번 시뮬레이션을 돌리는 것보다는, 어느 곳이든 가서 하루라도 경험해보고 나의 길을 찾지 못해 자괴감을 느끼는 하루의 경험이 낫다는 것이다. 그러다 보면 어느 날 내가 가닿은 길들이 어느새 방향성을 가지고, 내가 상대적으로 더 행복한 직무, 더 행복한 인더스트리에 대한 기준을 갖게 될 것이다. 혹은 몇 번의 경험으로 그 기준을 찾지 못한다 할지라도, 특정 인더스트리가 나와 맞지 않는다는 것 하나라도 소거법으로 찾는다면 큰 수확일 것이다. 많고 많은 선택지 중에 진짜 나와 맞지 않은 것 하나를 제거한 것만으로도 큰 위로가 될 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