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1922> 리뷰
인간은 오래전부터 쥐라는 생물에게 부정적인 이미지를 가지고 있었다. 아마 정착생활을 한 인류의 역사 속 식량을 좀먹어 가는 행위를 시작으로 지금까지 이어져온 이미지일 것이다.
가장 결정적인 원인은 역사상 최악의 전염병이라고도 불리는 '페스트'때문이다. 쥐를 숙주로 하여 퍼진 벼룩으로 약 3년 동안 2천만 명 가까운 희생자를 만든 이 병은 쥐를 경계의 대상을 뛰어넘는 공포의 대상으로 자리 잡게 했다. 어쩌면 몇 천년 간 누적되어 온 쥐에 대한 공포는 현대의 우리의 DNA에 박혀있는 걸지도 모르겠다.
식량 파괴자, 붕괴의 상징, 전염병의 숙주, 어두운 곳의 주민, 다산의 상징 등 많은 이명을 가지고 있는 '쥐'.
여기, 그 쥐라는 생물과 상징에게 가정과 정신까지 붕괴되어 버린 한 농부가 있다.
바로 오늘 리뷰할 작품, 스티븐 킹의 동명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 <1922> 속 주인공 '윌프레드 제임스'이다.
영화는 1930년 어느 호텔에서 노인이 되어버린 윌프레드가 자신의 회고록을 작성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모든 사건의 시작은 1922년이다. 그 당시 윌프레드는 아내 알레트가 물려받은 땅에서 자신과 아내, 그리고 14살의 아들과 살고 있었다. 사건의 발생은 아내와의 의견충돌이었다. 물려받은 땅을 팔고 도시 생활을 하고 싶어 하는 알레트, 그런 그녀와 달리 이곳에서 계속 농사일을 하며 살고 싶은 윌프레드, 두 사람의 의견충돌은 점점 거세져갔고 기어코 이혼과 아이 양육에 대한 얘기까지 나오게 된다. 법적으로 지주로서 인정받는 아내와 달리 변호사를 고용할 형편이 되지 않았던 윌프레드는 점점 초조해진다.
윌프레드는 회고록에서 그 시점의 자신을 이렇게 표현한다. '남자 안의 또 다른 어둠의 남자가 있다.'라고.
가정을 지킨다는 명목 하에, 자신의 고집으로 끝내 '아내 죽이기'라는 결론에 다다른 윌프레드.
혼자만의 힘으로는 역부족이라 여긴 윌프레드는 아들 헨리의 어린 첫사랑이란 감정을 이용하기로 하고, 마치 성경에 나오는 선악과의 뱀처럼 그를 회유한다.
헨리는 자신의 의견 없이 양육권을 가져가려는 부모의 이기심과 독불장군과도 같은 엄마의 모습, 무엇보다 옆집 소녀 새넌과 이곳에서 정착하고 싶은 마음에 아버지의 계획에 동참한다.
윌프레드는 헨리와 함께 고집은 버리고 도시로 떠나는 길에 동행하겠다며, 거짓말로 알레트의 긴장을 풀어내고 그녀가 잠든 사이 칼로 무자비하게 그녀의 목을 그어버린다.
그렇게 그녀의 시체는 웰프레드 내면 속 어둠의 남자가 사는 버려진 우물 속에 던져진다.
다음날 아침, 우물 속의 상태를 확인하러 온 윌프레드는 충격을 받는다.
예상보다 끔찍한 모습으로 썩어가고 있는 새넌의 시체를 목격해 버린 탓이다. 우물에 연결된 파이프를 통해 많은 수의 쥐들이 들락날락 거린다. 그중 대범한 쥐들은 싸늘해진 그녀의 눈과 피부를 갉아먹고 입안을 통해 장기 깊숙한 곳까지 드나든다.
예상보다 끔찍한 모습에 급히 우물문을 닫은 윌프레드는 애써 그 장면을 잊으려 하며 본인이 바라던 평화로운 일상을 이어나간다.
하지만 쥐가 갉아먹은 균열의 작은 구멍은 잊는다고 해서 없어지지도, 작아지지도 않는다. 구멍은 더욱 커져만 간다.
새넌과 속도위반을 해버린 헨리는 두 사람을 지원하기 어렵다는 윌프레드의 말에 화가 나 차를 훔쳐 연인과 달아나고, 그 뒤 부부 강도단이 된다. 결말은 뻔하지만 두 사람 모두 오랫동안 삶을 이어가진 못한다.
홀로 남겨진 윌프레드는 애초에 땅을 팔 생각이 없었기 때문에 여전히 빈곤하다. 남아있는 건 멀쩡한 몸뚱이뿐이었지만 마구간과 집의 장롱 속까지 침투해 온 쥐에게 물린 탓에 한쪽 손을 잃게 된다. 외부적인 요인에 더해 아내의 망령과 무수히 많은 쥐에 대한 환상이 그의 숨통을 더욱 조여 온다.
그렇게 쥐가 파 먹은 지붕 사이로 불어오는 겨울 찬 바람 속, 윌프레드는 다시 일어설 의지를 점점 잃어간다.
지키고자 했던 집까지 헐값에 넘기게 되고 윌프레드는 자신이 그렇게도 싫어하던 도시에서 노동자의 삶을 살아간다.
그리고 1930년 어느 호텔, 회고록을 쓰고 있는 윌프레드는 여전히 아내와 헨리, 새넌. 그리고 쥐가 자신을 갉아먹는 환상에 살고 있다.
공포소설의 대가라고 불리는 '스티븐 킹'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만들어진 만큼 기대에 만족하는 스릴과 재미를 주는 작품이다. 또한 1922년 당시 미국 농가의 현실을 슬며시 엿볼 수 있다. 엄청나게 넓은 땅과 몇 명이 살지 않는 가구지만 그들끼리의 결혼을 추구하는 문화, 아내의 재산이 자신의 것이라고 은연중에 여기는 가부장적인 생각 등...
하지만 스티븐 킹은 그 시절의 어리석은 부분을 꼬집는다. '집을 지키기 위해'라는 방패를 앞세워 자신의 욕망을 충족시키려던 윌프레드는 결국 스스로 혐오하던 도시에서 노동자 생활을 살게 된다.
'자신의 것이 아니라면 탐내지 말아라.'라고 했던가. 자멸하는 윌프레드의 말년을 향한 여정을 잘 꿰뚫는 문장인 듯하다. 그 여정에서 '쥐'라는 오브제가 주는 의미를 다시 한번 되돌아볼 필요성이 있다. 앞서 말했듯 쥐는 여러 상징을 가지고 있지만 이 영화에서 한 단어로 그 의미를 풀어보자면 '붕괴'라고 표현하고 싶다. 쥐의 개입으로 윌프레드의 삶 속 여러 방면이 붕괴되어 가는 걸 쉽게 볼 수 있는데, 그 안에는 집과 가족, 그리고 육체 나아가 그의 모든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아마 감독은 윌프레드의 트라우마 속 환상과 관련하여 그의 정신적, 신체적 부분의 점진적 피폐를 쥐를 통해 표현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추측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