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이 화장실로 들어간 후 우당탕 소리가 난다. 화장실 타일에 붙어 있던 뭔가가 또 떨어진 모양이었다. 남편의 한숨 소리 후 문이 열리더니 딸을 부른다.
"이 분홍 칫솔 네 거지? 아빠가 칫솔 꺼내다가 변기에 빠뜨렸다. 이거 버릴 테니까 새거 하나 꺼내 써라."
변기행 칫솔을 뒤이어 탄생한 새 칫솔
칫솔을 꺼내다가 다른 식구들 칫솔도 같이 꺼내지면서 칫솔 몇 개가 변기로 다이빙을 한 것이다. 여전히 냉전 중이라 나에게는 아무 말도 없어, 내 칫솔은 무사한 가 보다 난 속으로 생각한다. 잠시 후 양치질을 하려고 보니 내 칫솔이 없다. 아까 변기행 칫솔들 중에 내 것도 포함이 된 것으로 추측한다. 순간 이 사람이 지나치게 정직한 면이 있다는 건 익히 아는 사실이지만 꼴배기 싫은 마누라 칫솔 가지고 장난을 치지는 않는 사람이니 과연 내가 잘 고른 내 남편이다.
코미디 영화나 만화 속에 양심 없는 캐릭터들의, 배우자를 향한 사소한 복수가 떠오른다. 배우자의 칫솔로 변기를 닦고 지저분한 곳을 솔질하고 대충 씻어서 다시 칫솔꽂이에 꽂아두는 장면이었다. 실제로 그런 짓을 할 사람이 있을까 하면서도 하도 흉흉한 세상이라 가능성이 아예 없지는 않겠다 생각이 든다. 하지만 결백증에 가까운 깔끔쟁이 남편으로서 지저분하고 더러운 꼴은 절대 용납이 안됐으리라.
17년 전 그 사람과 처음 만났던 날은 내가 인생을 살면서 현명한 판단을 한 날들 중 하나이다. 선만 보면 하도 퇴자를 맞아서 미팅 자리에서 할 말이 레퍼토리처럼 줄줄 나온 그날 그의 명언이 있다.
'나는 월급 받는 사람이라 평생 부자는 될 수 없고 생활비도 여유롭지 못하고 아껴서 살아야 되고...'
선본 자리에 나와서 호강시켜 준다 소리는 못할 망정 부자 못된다, 아껴야 된다 말을 하는 남자라니 젊은 여자들 입장에서 듣기 좋다 할 사람이 있을 리 만무할 것이다. 남편이 나를 만나기 전 소개팅을 많이 했단다. 소개팅 자리에서 쓴 밥값만 모아도 중형차 한 대 값이 나온다니 그의 선보는 자리에서의 '아껴야 산다' 발언은 퇴자로 이어지는 명언 중에 명언이렷다. 다행히 그 명언 덕분에 다른 여성들이 패스 패스하여 나에게까지 왔으니 나에게는 훌륭한 어록이 아닐까.
저 사람은 거짓말을 안 할 것이고 정직할 것이다라고 판단한 그의 첫인상은 결혼해서 살다 보니 정직 수준을 넘어서서 '노골적' 단계로 들어섰다. 집안에서 조금이라도 정리가 되어있지 않은 모습을 보면 노골적으로 싫은 내색을 하는 모습에 곧 잘 둘 사이가 틀어 지곤 한다. 30대 때는 그 깔끔한 수준에 맞추려고 노력을 했지만 어느 순간 다 부질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당연히 깨끗이 치우고 살아야 하는 것은 맞지만 인생의 기준이 청소가 될 수는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