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일 아침. 주말이라 달콤한 늦잠을 즐길 시간이지만 단잠에 빠져있는 아이를 깨운다. 대충 씻고 향한 곳은 삼성 서울 병원. 채혈실로 가서 번호표를 받고 기다린다. 토요일은 항상 환자가 많은데 오늘은 운 좋게 사람이 별로 없다. 곧 번호표에 적힌 번호가 띵동 뜨고 한 데스크 앞으로 다가간다. 아이는 익숙한 듯 팔을 걷고 채혈이 시작된다.
아이가 성장호르몬 치료를 받은 지 3년이 다 돼간다. 어릴 적부터 항상 또래에 비해 키가 한참 작았다. 병원에서 유아 건강검진을 했을 때, 의사 선생님의 '키가 작다'라는 말씀이 항상 있으셔도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나중에 클 때 되면 크겠지, 늦게 크는 아이들이 더 많이 큰데. 라며 주변 사람들의 응원 아닌 응원 속에 어느새 아이는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었다. 어느 날 아이가 감기 기운이 있어서 소아과를 갔는데 그날따라 환자가 너무 많았다. 할 수 없이 한 건물에 위치한 다른 소아과를 가게 되었다. 아이의 키와 몸무게를 확인하신 의사 선생님께서는 아이가 많이 작다, 큰 병원에 가보라면서 소견서를 써 주셨다. 나와 아이는 살짝 충격에 빠졌다. 이게 병원에 가야 하는 일인가? 뭐가 잘 못된 건가? 하면서 어리둥절해했다. 삼성 서울병원에 예약을 하고 저성장, 성조숙 분야를 진료하는 선생님을 만났다. 선생님은 먼저 아이의 갑상선 기능을 확인했다. 갑상선 기능의 저하를 진단하고는 약을 처방해 주셨다. 갑상선 기능이 키 성장에 영향을 주는지 처음 알았다.
갑상선 약을 복용하고 2~3개월이 지났을까 아이의 키 성장에 별 차도가 없자 선생님은 뇌하수체 검사를 권했다. 1박 2일로 진행되며 검사비는 100만 원이 넘었다. 돈 때문에 망설일 수는 없었다. 검사일을 예약하고 무사히 검사를 할 수 있기를 기다렸다. 대형 병원이기 때문에 만약 응급 환자가 입원을 해서 사용할 수 있는 병실이 없어지면 예약은 다시 수포로 돌아가고 다시 예약을 해야 하는 불상사를 겪어야 하기 때문이다. 다행히 예약 시간까지 응급환자는 없었던 모양이다. 오후 3시가 넘어서 병원에서 오라는 연락을 받고 짐을 챙겨 아이와 부지런히 병원으로 갔다.
입원 수속을 마치고 해당 병실로 갔다. 병원복으로 갈아입고 맛있는 병원밥도 나오고 아이는 그저 좋단다. 어디 아파서 입원을 한건 아니지만 딸아이가 병원에 입원을 하게 됐다고 아이 아빠와 오빠도 병문안을 왔다. 캠핑을 온 건지 호텔에 온 건지 오래간만에 누려보는 상전 행세가 즐겁기만 했을 것이다. 곧 다가올 끔찍한 검사를 모른 채.... 성장 호르몬 검사를 하기 위해 정해진 시간 간격으로 약물을 주입한 뒤 그에 따른 성장호르몬의 반응을 확인한다. 그 과정에서 구역질, 구토 등의 고통이 따르고 몸이 까라지면서 사람이 아주 녹초가 돼버린다.
저녁 식사를 마치고 잠자리에 들었다. 밤 1시가 넘은 시각, 병원 관계자가 와서 우리를 깨운다. MRI 검사를 받아야 하니 준비하란다. 졸린 눈을 비비고 MRI 촬영을 하러 갔다. MRI 촬영이 처음인 아이가 놀랄까 봐 며칠 전부터 유튜브에 올라와있는 MRI소리를 아이에게 들려주었다.
'이런 소리가 나니까 놀라지 마.'
좁디좁은 동굴 같은 MRI통 속에서 어떤 소리가 나는지 이미 알고 있는 아이는 그 시끄러운 검사를 잘 견뎌주었다.
병실로 돌아와 다시 잠을 청했다. 아침이 되면 뇌하수체 반응 검사가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시간이 흘러서 기억이 가물가물한데 내 기억이 맞다면 아마 아침 식사를 하지 않고 검사가 진행되었던 것으로 기억이 난다. 의사 선생님은 울렁거림을 방지하기 위해 중간중간 오렌지 주스를 마시라고 권했다. 병원에서 주스를 제공해준 건 아니고 보호자가 알아서 준비해야 한다. 아침부터 본격적인 검사가 진행되었다. 채혈 및 약물을 주입할 관을 팔에 설치했다. 처음에 채혈을 시작으로 뇌하수체 반응을 유도하는 약물을 주입한다. 약물을 주입하고 채혈하고를 반복한다. 약물이 몇 차례 들어가자 아이가 까라지기 시작한다. 병원에서 제공한 비닐봉지에 계속 토하고, 두 번 다시는 못할 짓이다.
생고생의 시간이 지나고 집으로 돌아왔다. 아이 몸에 문제가 있는 것이 좋은 건지, 아무 문제가 없는 것이 좋은 건지 대체 감이 잡히지 않는다. 몸에 문제가 있다면 치료를 하면서 키가 더 클 것을 기대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반대로 아이가 정상이라면 '그냥 작은 거구만, 잘 먹이면 잘 크겠지, ' 하면서 어느 쪽이든 긍정적으로 생각하려고 노력했다.
한 달 후 다시 병원에 갔다. 선생님은 환한 목소리로 말씀하셨다.
'성장호르몬 결핍입니다. 질병으로 분류되기 때문에 국가지원을 받으면서 진료받을 수 있어요. 정말 다행이에요.'
아이가 작았던 이유가 밝혀진 순간이었다. 아이가 정상적으로 성장호르몬이 분비가 안 되는 상태에서 그동안 보약이며 성장에 좋다는 약을 먹인 것은 헛짓이었나? 답답한 가슴이 쿵 내려앉는다.
언젠가 학교 운동회에서 아이의 친구 엄마가 건넨 특별한 인사가 떠올랐다.
"ㅇㅇ이 키가 조금씩 크고 있긴 하죠?"
아이가 하도 작으니 '잘 크고 있냐'라는 물음이 그 엄마의 의도와는 다르게 코믹하게 승화가 돼버렸다. 나는 그런 표현이 너무 재미있어서
"조금씩은 크겠죠, 설마 그대로 있겠어요?"라고 되물었다. 서로의 엉뚱한 표현에 둘은 얼굴을 마주 보고 박장대소를 했다, 근데 이제 와서 생각해보니 그것은 절대 간과해서는 안 되는 질문이었다. 아닌 게 아니라 아이는 정상적으로 자라는 다른 집 아이들에 비해 거의 '자라지 않는 중'이었다.
어쨌든 그렇게 국가 지원을 받고 아이가 태아 때 들어 두었던 보험의 보장까지 더해서 저렴한 비용으로 성장호르몬 치료를 받게 되었다.
제약 회사에서 파견 나온 간호사 선생님은 아주 친절하고 상세하게 주사하는 방법을 알려주셨다. 주사라는 것이 위험할 수도 있기에 명함을 주시면서 궁금한 거 있으면 언제든지 밤이라도 괜찮으니 전화하라고 하셨다. 처음에는 내가 실력이 부족한 건지 애가 계속 아프단다. 주사 맞힐 준비를 하고 늦은 밤이었지만 간호사 선생님께 전화를 했다. 선생님이 전화기 너머 실시간으로 지도를 해주시며 주사를 놓았는데 내가 주사약을 주입하는 속도가 너무 빨라서 아이가 아파했던 것이다. 한 번은 약이 차가운 상태로 주사를 하여 통증이 유발되고, 또 한 번은 살을 두툼하게 잡지 않고 주사를 놔서 아프다 하고 시행착오가 여러 차례 있었다.
치료의 효과는 아주 좋았다. 1년에 3~4센티도 겨우 크던 아이가 평균 한 달에 1센티를 컸다. 치료를 시작할 때 130cm가 채 안되던 키가 1년 만에 140cm를 넘었다. 아이 아빠는 진작에 병원에 가보고 시작할걸 하며 후회를 했다. 성장 호르몬 치료를 하면서 밤마다 주사를 맞고 맞히는 시간은 나와 아이 사이에 큰 숙제가 되었다. 여행을 가게 되면 제일 먼저 챙겨야 하는 중요 물품 중 하나이다. 만약 해외여행을 가게 되면 여행 가기 한 달 전에 담당 의사 선생님을 통해 영문 소견서를 받아야 한다. 이런 내용들을 아이 아빠한테 설명을 해주고 있는데 큰 아이가 옆에서 툭 끼어든다. '우리는 해외여행 안 가니까 상관없잖아.' 그렇다고 그렇게 뼈 때리는 소리를 하면 어쩌니....
<2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