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 전 주말이 되면 이불에서 슬금슬금 기어 나와 늦은 아침을 먹기 위해 부엌으로 향한다. 그럴 때면 엄마는 어김없이 압력밥솥에 밥을 하고 계셨다. 코끝에 전해오는 구수한 냄새를 맡고선 얼음이 된 것처럼 가만히 식탁에 앉아 때를 기다린다.
전기밥통에도 이미 밥은 있지만 나는 출출함을 참고 압력밥솥의 그 밥이 다 되기를 기다렸다. 얼마간 뜸을 들였다가 밥솥 뚜껑의 추를 한쪽으로 젖히자치익 소리를 내며온 집안이 밥냄새로 가득 찬다.
밥솥 뚜껑을 열면 그 열기에 주걱을 쥔 손이 델 정도이다. 식탁엔 어제 먹던 밑반찬과 된장찌개가 놓여있었다. 엄마가 밥 한 공기를 퍼서 주시면 단연코 주인공은 그 뜨거운 밥이 된다.
평소 뜨거운 음식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데도 김이 연기처럼 나는 그 밥을 나는 호호 불며 먹곤 했다.
엄마는 오랜 기간 당뇨를 가지고 계셨다. 그러면서 야채를 많이 먹어야 한다며 고기 없이도 상추를 상에 내놓곤 했다. 금방 한 그 밥을 고기도 없이 상추에 싸 먹는데 그렇게 맛있을 수가 없었다. '진짜 맛있다'는 말을 중얼거리며 밥을 먹고 있으면 엄마는 굉장한 칭찬을 받은 사람처럼 흡족해하셨다.
엄마의 그 뜨거운 밥이 생각난 것은 아이들이 학원 가느라 밖에서 밥을 먹고 귀가하는 날이 많아지고 남편도 회사 숙소에서 지내는 때가 종종 생기면서 10인용 밥통에 밥을 하는 것이 의미 없다고 판단할 즈음이었다. 물론 쌀을 적게 안치고 밥을 하면 되기야 하지만 나는 찬장 한 구석에 처박혀 있던 작은 뚝배기에 밥을 해보기로 했다.
미니 뚝배기에 쌀 한 컵을 넣고 밥을 지으면 그 작은 솥에 따끈한 밥이 하나 가득 찬다. 뜸이 들이고 완성된 찰진 밥 위에 어느 반찬이라도 곁들이면 진수성찬 같았다. 내 것으로 연습이 된 실력으로 남편밥을 해주었다. 남편은 누룽지를 좋아해서 바닥면을 좀 더 노릇노릇하게 만들어주면 코스요리를 먹듯 물을 부어 끓여 놓은 미니 뚝배기 속 누룽지를 살살 긁여가며 식사를마무리한다.
뚝배기에 그 누룽지는 그때까지도 뜨거움이 유지되어 호호 불며 입천장이 데지 않게 먹어야 한다. 남편의 그 모습을 보고 있자면 예전에 엄마가 뜨거운 밥을 먹고 있는 나를 바라보는 느낌이랄까.
고사리와 콩나물,애호박, 당근, 느타리버섯이 흰쌀밥에 잘버무려진그것을 입을 크게 벌리고 또 한입 먹었다. 사장님은 옆 테이블에 놓여있는, 얼핏 보면 막걸리 같은 우유 대접을 들어 또 한 모금 들이켰다. 반찬이 필요 없었지만 구색을 맞추려고주신 반찬 중 콩자반을 박자를 맞추듯 숟가락으로 한 숟가락 떠서 먹었다.그리고선 숟가락을 살살 움직여서 또 한 숟가락 가득 밥을 담아본다.
난 원래 밥을 비벼 먹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비비려면 밥양이 제법 많아야 보기 좋을 것 같은데'푸지다'라고 표현할 수 있는양의 밥을 먹는 것은 부담스럽고 그렇다고 먹다 만 것 같은 양의 비빔밥을 만들어내는 것은 비빔밥에 대한 예의가 아닌 것 같았다.
명절이 되면 양푼에 각종 나물 종류를 밥 위에 얹고 다시마 튀긴 것을 손으로 부숴 뿌린 다음 어머니는 힘주어 그것을 비볐다. 나와 형님은 비빈 것을 먹지 않는다고, 밥과 반찬을 따로 먹겠다고 했는데도 어머니는 꽤 많아 보이는 양의 밥을 양푼에 비비셨다. 1인분이라고 하기에는 제법 많은 그것을 어머니는 다 드셨다. 그러면서 뒷집 며느리들은 이렇게 비빈 것도 잘 먹는다고 말씀하셨고 형님은 '그 집은 며느리들도 경상도 사람이잖아요.' 했다.
서울서 나고 자란 형님은 명절에 제사 지낸 나물 종류를 넣고 비벼놓은 밥을 안 먹는 이유를 그렇게 말했다. 나는서울 출신도아니지만 아무 대꾸도 안 하고 형님처럼 서울 출신인척 시치미를 떼고 앉아있었다. 한편으론 명절에 비벼놓은 밥을 안 먹는 쪽에 나를 포함하여 팀을 구성해 줘서 고마운 생각도 들었다.
형님에게는 비벼놓은 밥을 안 먹는 것에 그런 새초롬하면서도 세련돼 보이는 이유가 있었다면 나는 그 이유가 무얼까 기억을 더듬어봤다.
종종 남은 찬밥에 조금 전 식구들이 먹다 남긴 김치 쪼가리를 담고 고추장을 푹 떠서 넣고는 화가 난 듯 힘을 주어 그것들을짓이겨가며 비벼 우적우적 드시던 젊은 시절의 엄마가 기억 저편에 남아있던 이유가 아닐까 싶다. 밥은 제대로 비비지도 않아 흰 부분이 떡진 듯 군데군데 뭉쳐있었고 김치는 먹기 좋게 자른 것이 아니어서 밥과 어우러지지 않고 겉도는 모양새였다.
양은 또 어마어마하게 많았다. 엄마는 밥을 먹을 때도 화가 난 사람 같았다.나는 그런 엄마의 모습이 별로 슬프지도 애처롭지도 않았다. 음식을 먹는 것인지 육아와 고된 집안일로 인한 스트레스를 그렇게 풀고 있는 것인지 나는 그저 그 모습이 내 친구들이 놀러 왔을 때 목격이 될까 봐 조마조마할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