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이 다 가도록 아이는 나타나지 않았다. 그것은 그 아이에게 흔치 않은 일이었다. 카메라에 비친 나의 모습을 확인하며 커피를 홀짝 들이켰다. 고개를 숙여 커피를 마시면서 눈은 아이의 얼굴이 나올 네모칸을 응시했다. 머그잔이 책상에 닿는 잠깐의 순간을 빼고는 정자세로 앉아서 거울처럼 나를 바라보았다.
아이가 늦는 경우에는 시작 전에 이렇게 한숨을 돌릴 수 있어서 좋다. 1분이 지났다. 곧게 폈던 등의 긴장을 풀고 다리는 자연스럽게 엉덩이 쪽으로 하나 둘 접어 올려 양반 다리를 한다. 오늘의 진도를 확인하려 관리용 모니터를 조작한다.
2분이 지났다. 나는 회사에서 제공하는 인터넷 전화기에 학부모의 연락처를 입력하고 통화 버튼을 눌렀다.
아이를 기다리는 동안 이전에 끝낸 수업의 정리 코멘트를 학부모에게 보내고 서브모니터의 북마크에 저장되어 있는 유튜브를 클릭했다. 아이가 갑자기 입장할 것에 대비해 마이크는 꺼두었다. 잡다한 영상을 보는 사이 화상 수업 솔루션의 초시계는 째깍째깍 에누리 없이 올라가고 있었다.
친절하게 녀석은 내가 요즘 즐겨 보는, 엉터리로 요리하는 어느 채널을 상단에 띄어 주었다. 와플이 완성되었다. 이미 고철 쓰레기통에 들어갔어야 할 새까만 프라이팬에 엉터리 반죽으로 대충 휘저은 반죽은 개도 잠깐 킁킁거리다가 고개를 돌릴 것 같은 새까만 와플을 탄생시켰다. 와플이라고 말해주지 않으면 일부러 태우려고 작정한 밀가루 덩어리에 불과한 그것을 보고 나는 큭 하고 짧게 웃었다. 그리고는 정면의 네모칸을 한번 휙 바라보았다. 내 얼굴 옆에는 아직 빈칸이었다.
음식을 보기 좋게 만드는 것도 재미있지만 실패한 영상도 나름의 매력이 있었다. 전자 못지않게 조회수가 꽤 나오는 걸 보면 어떤 것의 정석이 그 정석을 벗어나는 것은 때로 어느 것도 정석이라는 테두리 안에 가둘 필요가 없다는 것을 깨닫게 해 준다.
또한 그것들은 '이렇게 하면 망해요'라는 친절한 정보 전달의 기능까지 갖추고 있어서 그것을 접하는 초보자에게는 유용한 콘텐츠가 아닐 수 없었다. 그 엄청난 탄생의 장본인은 아마 와플이라고 잠시 불렸던 납작한 덩어리를 그것이 식기도 전에 싱크대로 던져 버렸을 것이다.
그 정석 같은 오류들은 좁은 방구석에 갇혀 있는 나의 늘어진 광대뼈를 잠시나마 상향 조정 해주었다. 전혀 의도된 것이 아닌 창작하는 이조차 예측 하지 못한 즉흥적인 이 코미디는 그 분야의 정석이라고 불릴 만했다. 맞다. 세상의 모든 것이 정석일 필요는 없었다.
사람들은 본래의 목적에서 벗어나 생각지 못했던 결과를 보면서 일종의 카타르시스를 느끼나 보다. 새까맣게 태워 실패한 와플은 그것의 본래 기능은 상실했지만 환호하는 댓글과 함께 조회수를 올리는 훌륭한 도구가 되었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SNS 바닥에서 정석이라는 게 있을까 싶다. 엉터리 와플이라고 정의한다면 맛대가리를 상실한 저 새까만 것이 정석이라는 것에 가깝다고 한들 누가 토를 달까?
시간이 지나가고 아이가 화상 수업에 입장할 가능성이 점점 낮아지자 나는 회원관리 파일에 커서를 가져다 놓고 '결석 : 개인 일정'이라는 문구를 입력했다. 그리고는 다시 고개를 오른쪽으로 돌려 새로운 영상을 클릭했다.
방에 혼자 앉아 큭큭 거리는 사이 그 회원에게 할당된 시간이 다 지나갔다. 화면 오른쪽 끝의 엑스자를 누르고 홀로 기다리기를 마쳤다.
"성당 여름성경학교에 갔거든요. 학습 패드를 가져갔으니까 곧 입장할 거예요.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시간을 칼같이 지키는 아이였다. 내가 화상 수업방에 입장을 하고 2분 정도 지났을 때 아이가 늦는 이유를 알게 되었다. 아이의 엄마는 상냥한 목소리로 내게 양해를 구했다. 아이는 언제나 미리 입장을 하여 대기를 하고 있었으며 내가 입장하는 순간 수업이 시작되었다. 그런데 오늘은 아이가 보이지 않았다. 학습 현황을 확인하니 어제도 아이는 패드 학습을 완료했다.
"역시 정석이네. FM이야."
아이는 이제 겨우 인생의 10분의 1 정도를 살고 있으면서 지금까지 정석대로의 삶을 살고 있는 듯 보였다. 밝으면서 차분했고 어른인 나에게 농담을 할 줄 알면서도 버릇없게 굴지 않았다. 정석같이 학습을 지속하는 동안 아이는 한 번도 지루해하지 않았다. 내 추측일 뿐이다. 또 남자아이 치고는 상당히 상냥한 편에 속했다. 학교에서도 분명 다른 사람들에게 친절할 것이라고, 선생님들에게 이쁨을 받는 아이일 거라고 다시 혼자 추측해 본다.
아이는 여행지에서도 잊지 않고 화상 수업에 접속했다. 다른 회원들은 보통 캠프나 여행을 가면 당연한 듯이 결석을 하곤 한다. 세심한 엄마들은 나에게 미리 메시지를 보내어 혼자 우두커니 컴퓨터 앞에 앉아 어차피 결석을 할 아이를 기다리는 지루함을 덜게 해 준다. 물론 우두커니 앉아 있는 경우는 없다. 오늘도 덕분에 와플 영상을 보았으니까.
작년 이맘때 그 아이는 여름 성경학교에 학습 패드를 챙겨갔더랬다. 한쪽에서는 찬송가인지 노랫소리가 들리고 주변은 시끌벅적했다. 잘 들리는지 화면이 보이는지 확인을 마친 후 아이는 말했다.
"선생님 주변이 좀 시끄러우니까 이해해 주세요."
아이는 이어폰을 꽂고 밝은 표정으로 화면을 응시했다. 집에서는 책상에 편하게 놓아둔 학습 패드가 그날은 아이의 두 손에 들려있었다. 아주 공손하게.
"여름 성경학교에서 재미있나 보네."
그 회원의 시간이 다 지나가고 마침 쉬는 시간이 되었다. 화장실에 가려고 의자에서 일어서려는데 메시지 버튼에 빨간색 N표시가 나타났다. 다시 앉아서 커서를 갔다 대었다.
[선생님. 여름 성경학교에서 활동을 하느라 화상 수업을 깜빡했어요. 기다리게 해서 죄송해요.]
나는 그 문구를 중얼거렸다.
'기다리게 해서 죄송해요'
'기다리게 해서 죄송해요'
'기다리게 해서 죄송해요'
나는 갑자기 알 수 없는 감정이 북받쳐 오르더니 왈칵 눈물이 쏟아졌다. 슬픈 영화의 클라이맥스를 보는 사람처럼 볼이 다 젖도록 눈물이 흘렀다. 아이의 배려심에 감동은 했지만 그것 때문에 가슴 뭉클할 정도는 아니었다. 그렇다고 가슴속 폭풍이 일정도로 엄청 기쁜 것도 더더욱 아니었다. 그냥 눈물이 쏟아졌다. 오른쪽 모니터에는 보다만 웃기는 영상의 멈춤 화면이 떠 있었고 마치 그것을 보며 우는 것처럼 나는 어깨를 들썩이며 울었다.
왜 울음이 터졌을까. 도대체 원인을 알 수가 없었다. 아이의 단순한 메시지가 폭풍 눈물을 쏟아낼 정도로 가슴 짠한 일도 아닌데 말이다. 내가 느꼈음에도 내 것이 아니었다. 마치 나 자신이 누군지를 잊은 것처럼 이 감정의 주인은 내가 맞나 싶었다. 다른 사람이 느낄 감정이 내게 잘 못 배달되어 빙의가 된 듯 나는 원인을 모르는 나의 감정을 찾느라 꽤나 많은 시간 동안 고민해야만 했다.
며칠간은 왜 그랬을까 상념에 빠졌다가 바쁜 일상이 우선순위가 되어 잠시 잊더니 마침내 그 원인을 찾는데 성공을 했다. 그날 내 감정이 무슨 의미였는지 알기까지 상당한 집중력이 요구되었다. 그 집중력은 나를 내 어린 시절로 되돌아가게 해 줬고 갖가지 에피소드들을 수면 위로 떠오르게 했다. 그 아이의 또래로 돌아간 나는 그 아이와는 상반된 바보 같은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2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