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학교 특활영어

내가 느낀 감정은 내 것이 아니었다_18

by 쓰는수 이지수


국민학교 특활영어


6학년 여름방학이 시작된 지 얼마 되지 않은 어느 날, 나는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진행자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카세트의 녹음 버튼을 누르려고 스탠바이 하고 있었다.

"한국. 한국을 영어로 써서 보내주세요. 당첨되신 분께는 소정의 선물을 보내드리겠습니다. 엽서를 보내주실 주소는 서울시 영등포구 여의도동"





국민학교 학생을 대상으로 한 그 영어 프로그램은 낮 12시, 교육방송 채널에서 시작했다. 20분 정도 진행되는 그 프로그램이 끝나갈 무렵 내 손길은 바빠졌다. '엽서를 보내주실'이라는 말이 시작되면 나는 재빨리 녹음 버튼을 누르고 고개를 숙여 테이프가 잘 돌아가는지 확인했다. 상품을 준다면서 엽서를 보내라는 건지 말라는 건지 주소를 너무 빨리 부르는 통에 나는 몇 번이고 주소 받아 적기를 실패했다. '한국을 영어로 쓰기' 퀴즈가 있기 전에도 다른 단어 퀴즈가 있었지만 주소를 받아 적지 못한 탓에 응모하지 못했었다.




테이프는 물론 새 공테이프가 아니고 실컷 들어서 재미가 시들해진 어느 가수의 노래 테이프를 재활용한 것이다. 테이프 아래쪽에 네모나게 구멍이 난 부분을 투명 테이프로 막으면 내가 필요할 때 녹음을 할 수 있는 새 공테이프가 된다. 지난번에는 그 구멍을 막는 것을 깜빡하고 녹음을 시도하다가 실패를 했다. 프로그램이 끝나자 나는 녹음을 종료하고 미리 사두었던 관제엽서를 꺼냈다.





당시에는 전집을 판매하는 영업 사원들이 집집마다 많이 다녔다. 자식들이 보던 안 보던 엄마는 전집 종류를 사다가 벽 한쪽 메우기를 즐기셨다. 책 읽기가 습관이 안된 자식들 덕에 그 책들은 그것의 고유 기능은 상실된 채 벽 한쪽에 촘촘히 박혀 외풍이 심한 우리 집의 방한 기능 정도를 하고 있었다. 영어 학습지 관련 영업 사원이 집에 들렀는데 그의 유창한 연설에 엄마는 또 넘어갔다. 카세트와 영어 학습용 카세트테이프가 포함된 그것은 그래도 쓸만했다. 라디오를 켜서 채널을 돌려대다가 우연히 내 귀에 정착한 것이 내가 즐겨 듣던 '국민학교 특활영어'였다.





나는 얼마 전 엄마가 또 채워 놓은 백과사전 전집이 있는 벽장으로 향했다. 백과사전 중에 '영어'라고 쓰여있는 책을 꺼내어 책장을 넘겼다. 마침내 한국이라는 단어를 찾아 스펠링을 확인했다. 알파벳을 완벽하게 뗀 상태가 아니라서 스펠링을 읊을 수는 없었지만 눈으로는 어느 정도 외울 수 있었다. 나는 자와 연필을 꺼내어 관제엽서 빈 공간에 선을 네 줄 그었다. 백과사전에는 'Korea'라는 글자가 그렇게 4선에 줄 맞춰 반듯하게 쓰여있었고 나는 내 엽서가 더 잘 당첨되기 위해 4 선위에 더 반듯하게 Korea를 적었다.





얼마 후 나는 누군가에게 알파벳을 가르치느라 신이 나 있었는데 그는 방바닥에 엎드려 ABC를 열심히 적고 있었다. 나에게 처음 알파벳을 배운 그 학생은 다름 아닌 내 엄마였다.


엄마에게 무슨 일이 있으셨는지 모르겠지만 어느 날 갑자기 ABC를 가르쳐 달라고 하셨다. 알파벳이라는 명칭이 있지만 ABCD, 때로는 D를 빼고 ABC라고 엄마는 말했다. 나는 각 알파벳 아래에 한글로 그것의 명칭을 적어 엄마에게 주었다. 달력을 찢어와서 뒷장에 알파벳 쓰기 연습을 한 엄마는 처음에는 열정을 가지고 열심이셨다.



26개나 되는 알파벳의 수는 엄마에게 조금 부담스러웠던 모양이었다. 기역니은은 이것보다 적지 않냐고 물으셨다. 한참 장사가 잘 되는 때여서 (그 당시는 IMF라는 단어조차 모르고 살 때였다) 집안 살림과 아버지의 가게 일까지 병행하는 엄마에게 알파벳 공부는 무엇보다 사치스러운 취미가 돼버렸다. 엄마는 알파벳 전체의 절반에 못 미치는 J까지 쓰기 연습을 하고 알파벳 연습을 그만두셨다. 엄마가 마지막으로 쓴 J는 오른쪽으로 꼬부라져 있었다.





엄마가 어울린 동네 아주머니들은 (내가 판단하기에) 하나같이 교양과는 거리가 먼 분들이었다. 즐거울 때면 누군가의 흉을 볼 때였고 안 좋을 때는 이곳이 자기네 집인지 남의 집인지 잊은 채 아줌마들의 싸움판이 벌어지곤 했다.





주병진이 속옷 회사를 차린 이유가 높은 등수를 받아서라고 대답하거나 전원일기를 보며 내가 전원일기가 무슨 뜻이냐고 했을 때 손을 크게 올려 원을 그리며 '전원'이 나오니까 전원일기라고 하시기는 했지만 (나는 그래서 전원일기에는 출연자가 많구나 생각했었다) 엄마는 동네 아주머니들과 쌈박질을 일삼지는 않았다. 우리 집에서 쌈박질을 하는 사람들은 다른 집에서 온 이들이었다.





어느 날 우리 집에 놀러 온 두 아주머니의 언쟁이 점점 심해지더니 고성이 오갔다. 그 사이에서 싸움을 말리던 엄마가 난 한없이 불쌍했다. 부엌 한구석에 피신하듯 웅크리고 앉은 동생과 나는 '싸우려면 자기네 집에서 싸울 것이지'하며 안 좋은 소리로 가득한 거실을 노려보았다.




그런 아줌마들과는 다르게 내 친구 경이의 엄마는 교양이 있으신 분 같았다. 경이네는 우리 집 근처의 18평쯤 되는 아파트에 살았다. 그 아주머니는 우리 집에 와서 쌈박질도 하지 않았고 알파벳도 알고 계셨고 괜찮은 과외 선생님들 구해올 정도로 교양 있고 능력 있는 분이셨다. 그 아주머니는 아이들이 6학년이 됐으니 영어 과외를 시켜 보는 것이 어떻겠냐고 하셨다.












이전 17화고양이가 싫으면 '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