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리병이 또 도졌다. 원래 허리가 아프거나 하는 체질은 아니었다. 주변에 키 큰 사람들이 허리가 아프다는 말을 들으면 으레 나는 키가 작은 사람이라 허리는 잘 안 아프다고 말했다. 키도 작고 덩달아 허리길이도 길지 않은 것을 그것과는 거리가 먼 장점이라고 여기며 허리 통증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고 했다. 그러면서 키가 작아서 좋은 한 가지가 있다고 단단히 착각을 하면서 살아왔다. 친정 엄마는 한때 심각한 비만이셨던 것만 빼면 대체로 건강한 체질이셨는데 70이 넘으신 연세에도 이제는 늙어서 무릎이 아프지 허리 아픈 것은 모르겠다고 하셨다. 유전적인 것만 따지고 보면 내 허리는 건강함을 타고났다고 얘기할 수 있다. 나보다 키가 훨씬 큰 엄마도 허리 통증은 모르고 사셨으니 허리길이와 허리 통증의 상관관계를 논한 것도 우습기만 하다.
처음 허리에 이상한 조짐을 느낀 것은 이 일을 시작하고 삼 개월쯤 지난 때였다. 좋지 않은 자세로 컴퓨터 앞에 오래 앉아 있다 보니 통증이라는 것도 서서히 다가와 자리를 잡았다. 평소 느끼지 못했던 통증에 정형외과를 찾았다. 뜨끈한 열이 올라오는 침대에 누워있으니 조금 나아지는 것 같았다. 병원에서는 바르지 않은 자세로 인해 근육이 뭉쳤으니 자주 스트레칭을 하라고 다양한 자세가 그려진 종이를 주었다.
화상 수업으로 아이들을 만나기 전에는 집집마다 다니며 일을 했다. 꼬맹이들의 미술을 가르치는 일이었다. 엄마들의 만족도를 높이기 위해 온갖 미술 도구를 큰 가방에 바리바리 챙겨 넣고 다녔다. 그러면 아이가 준비해야 할 준비물은 상대적으로 적었다. 보따리장수가 따로 없었다. 비나 눈이 오면 보따리장수는 더 처량했다. 한 손에는 우산을 다른 한 손에는 기저귀 가방처럼 보이는 커다란 가방을 들고 길을 걸어갔다. 걷기 운동이 절로 됐다. 회원의 집이 지하철역이나 버스 정류장에서 멀면 먼데로 좀 더 걸을 수 있어서 좋았다. 지금보다 젊을 때이기도 했지만 적절한 체중을 유지하면서 허리 통증이라는 건 경험할 일이 없었다.
내가 맡은 지역은 강남이라 다양한 집들을 구경할 기회가 많았다. 15평 공무원 아파트에 살 때 동네 엄마의 말이 딱 맞았다. 그 엄마는 맞벌이를 하느라 집안일을 대신할 가사 도우미를 고용해야 했는데 일을 하러 온 분은 이왕 남의 집 일을 하는 거, 넓은 집에서 하는 게 좋다면서 집이 좁을 것을 탓했다고 한다. 한여름에 소독을 하러 온 분은 땀을 닦으며 우리 집에 오면 더 덥다고 했다. 내가 그분들과 같은 경험을 했다. 우리 집처럼 좁고 낡은 집은 흥미가 없었다. 복권에 여러 번 당첨돼도 사지 못할 집들이 다니기에 재미있었다. 아이의 학부모는 내가 그 동네에 살지 않은 이상 나와 친분을 맺을 일이 없는 젊은 사모님들이었다.
그런 집에서도 내가 사는 모습과 비슷한 모양을 발견한 적이 있었다. 집에 들어가자마자 인사를 하고 수업을 하는 방에 들어가면 간단한 다과가 준비되어 있었다. 어느 날은 미리 다과를 준비하지 못한 아이의 엄마가 냉장고 문을 열었는데 코를 찌르는 냉장고 냄새가 방안으로 훅 들어왔다. 우리 집에서도 종종 나던 익숙한 그 냄새가 오히려 편안했다. 나와 조금 친해졌다고 생각된 아이는 집안 구경을 시켜주겠다며 내 손을 잡고 이방 저 방을 구경시켜 줬다. 작은 방에, 사실 이 집에서 작은 방이었지만 우리 집 거실보다 넓은 그 방에 들어서자 방 한 구석에 널브러진 빨래 더미가 눈에 들어왔다. 아이의 엄마는 아이고 하며 아이를 끌어내고 덩달아 집구경을 하던 나도 끌려 나왔다.
컴퓨터 모니터에는 벽돌이 촘촘히 쌓여있다. 벽돌은 대부분 같은 색이었는데 보충이나 추가 수업을 의미하는 벽돌은 색을 달리하여 포인트를 준 것처럼 보인다. 각각의 벽돌은 최저시급보다 살짝 더 높았다. 열심히 쌓아 놓은 벽돌은 나의 의사와는 무관하게 하나씩 빠져나가기도 하고 영업사원들이 얼마나 뛰어다니는지, 회사에서 얼마나 광고를 하는지에 따라 다시 채워지곤 했다. 화상 수업 교사로 일을 시작하면서 교육을 받을 때 수업 하나하나를 벽돌이라고 표현했다. 쉬는 시간이 적고 촘촘히 쌓아진 모양을 벽돌 쌓기라고 했다. 벽돌 쌓기를 잘해야 수수료가 올라간다고 했다.
이왕 일하는 거 남들 받는 월급처럼 받으려면 벽돌을 제대로 쌓아야 했다. 벽돌이 쌓인 만큼 내가 컴퓨터 앞에 앉아있는 시간은 당연히 더 길어지고 말은 많아졌다. 또한 높인 쌓인 벽돌은 다른 사람들로부터의 고립을 의미하기도 했다. 누군가에게는 작은 다락방 같은 안락함을 누군가에게는 답답하게 올려진 담이 되었다. 답답한 담이라고 여긴 선생님들은 진작에 그 담을 허물고 회사를 떠났다. 어떤 선생님의 경우에는 그 남편이 오히려 그 보이지 않는 담이 답답했는지 집에서 일을 하는 모습을 탐탁지 않게 여겨 그만두었다는 일도 있었다. 집안에 콕 박혀 적게나마 가계에 도움을 주며 퇴근하고 오면 식탁에 새로운 국과 반찬이 차려져 있는 것을 다행으로 여기는 보수적인 남편 덕분에 나는 여전히 벽돌을 알맞게 쌓아오고 있다.
컴퓨터 속의 벽돌은 선생님들의 열정에 적잖이 영향을 끼쳤다. 영업을 하지 않는 이 일의 특성상 월급여는 아니 수수료에는 한계치가 있었지만 그 한계치를 뛰어넘고 싶은 열정의 신입 선생님들은 사력을 다해 벽돌을 쌓았다. 어떤 선생님은 밥과 반찬을 담은 그릇을 책상 한편에 두고 벽돌과 벽돌 사이를 지날 때 눈은 모니터의 초시계에 고정하고 한입한입 먹어가며 수업을 했다고 했다. 화장실은요? 하는 나의 물음에 그 어마어마한 벽돌의 소유자는 벽돌과 벽돌 사이에 후다닥 화장실에 다녀온다고 했다. 변기물을 내리자마자 일바지의 허리춤을 끌어올리며 화장실을 나와 컴퓨터방으로 달려가는 선생님의 모습이 그려진다. 교양 있으면서도 활달한 모습으로 헬로~하며 아이를 맞는다. 역시 엄마는 강하다.
나는 그렇게까지 벽돌을 쌓아보지도 않았지만 알맞은 양의 벽돌이 마치 내 등짝에 쌓아진 것처럼 어느새 내 허리 건강은 위협당하고 있었다. 한때 열정을 다해 쌓아 올렸던 벽돌은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수를 스스로 줄이고 담의 높이는 자연히 낮아졌다.
미술을 가르치러 간 집에서 나는 양반다리를 하고 방바닥에 퍼질러 앉아 있었다. 상을 두고 아이와 마주 앉아 있으면서 이 일도 나름 꿀이라고 생각했다. 벽돌 따위는 없어서 사람들과 직접 대면을 해야 했지만 아이 엄마가 챙겨준 간식을 먹으며 출출한 허기를 때우고 아이에게 오늘의 작품은 무엇인지 알려주면 아이는 쓱쓱 작품을 시작한다. 마치 아이가 잘하고 있는지 못하는지 감독하듯 게슴츠레한 눈빛으로 아이를 지켜보다가 아이가 넓은 면에 색칠을 하면 부지런히 붓이나 크레파스를 잡고 같이 거들었다.
문제는 식탁에서 앉아 수업을 하는 회원의 집에서 발생했다. 아이가 그림을 그리다가 크리파스를 건드렸다. 크레파스 하나가 바닥으로 떨어지자 아이는 제 할일을 하며 말했다.
"선생님, 크레파스 떨어졌어요."
순간 나는 고민을 했다. 방바닥이었으면 몸을 쭉 뻗어 주우면 될 것이었지만 지금은 의자에서 일어나야 했다. 그러면서 이거 무슨 상황으로 이해를 해야 하지. 하는 생각으로 잠시 주춤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