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명상을 하면서 느끼는 감정은 설명이 어려운 행복감 내지 쾌감 같은 것이었는데 강사님이 설명하기로는 그러한 감정은 명상의 초기 단계 즉, 명상을 처음 시작하는 사람들이 느끼는 감정이고 진정한 명상의 마지막 단계에서는 그저 평정심이 유지되는 것이라고 했다. 명상의 궁극적인 목표는 평정심 유지였다. 생각해 보면 어떠한 상황에서도 평정심을 유지하는 사람이 얼마나 강인한 사람인지 나는 익히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명상을 한다고 잠시 누그러져있던 성질이 또다시 꿈틀댄 적이 있었다. 나와 친한 누군가가 나를 '속였다'라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내가 기분이 조금 상한 것뿐이지 나에게 직접적인 손해를 끼친 것도 아니었다. 내 감정이 조금 상한 것 때문에 그 사람에게 언짢은 소리를 한다면 그건 분명 과한 행동이었다.
나는 명상의 궁극적인 단계에 이르기까지 나는 아직 멀었구나 생각하며 욱하는 성질을 누그러뜨리려고 애를 썼다. 아직 신체에서는 갱년기 증상이 없는데 가슴속만 갱년기가 먼저 온 것인지, 감정이 오르락내리락하더니 당장 전화를 걸어 싫은 소리를 퍼부을 상상을 하다가 또 멈칫했다.
당연히 내가 욱했던 이유가 오해일 수도 있었다. 한껏 치솟았던 성질은 상대방이 내가 찍소리 못할 이유를 댄다면 그 민망함을 어찌 감당할까라는 생각에 또다시 누그러졌다. 그러다가 또 롤러코스터를 타더니 마지막에 상대의 '명상 배우러 다닌다고 하지 않았나....?'라는 말이 귓가에 스치며 급하강을 했다. 그것으로 의미 없는 대화 아니 다툼은 마무리가 될 것이다. 당장의 감정을 조절하지 못한 대가를 호되게 치르는 샘이 되고 만다. 허허
명상 배우러 다닌다는 말을 하지 말걸 그랬나?라는 짧은 생각도 떠올랐다. 그러면 조금 성질을 부려도 될 것 같았다.
직업이 스님인 교수님의 여유롭고 자상하신 모습을 보며 배우고 싶다, 따라 하고 싶다고 막연하게 바랐지만 평생을 마음 근육을 다져온 그에 비해 내 마음의 근육은 한없이 빈약했다. 하긴 비할걸 비해야지. 감히 누구에게.
TV에 나오는, 얼굴이 알려진 유명한 사람이 안 그런 사람보다 행동을 더 조심해야 하는 것처럼 내가 주변인들에게 '나 요즘 명상 공부해요'라고 말한 것이 나의 잘못된 행동을 제어하는 한 가지 방법이 되었다. 이런 의외의 효과가 있었네! 명상 배운 척이라도 하려면 그 최고 단계인 평정심을 유지하는 척도 해야 했다. 대부분 사람이 그렇듯 시간이 흐르면 그 감정이 누그러지기 마련이니 답답한 상황에서 '명상으로 평정심을 유지하는 사람인 척'을 하는 것도 그다지 나쁘지 않을 것 같다.
며칠이 지나니 당연히 언짢았던 감정은 누그러졌다. 그것이 오해이건 아니건 관심도 없어졌다. '나를 속였다'라고 여긴 일은 그 사람이 입에 담기 불편했던 일로 이해하기로 했다. 앞으로도 나는 명상 수업을 계속 들어야 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