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함은 맨 나중에

격식보다 내실

by 글장이


"죄송합니다만, 저는 아직 명함이 없습니다."

명함 있으면 한 장 달라는 이들에게 나는 늘 이렇게 대답했다. [자이언트 북 컨설팅]을 운영한 이후 4년 동안 명함 없이 일했다. 작은 종이 한 장에 담을 만한 나의 모습이 아직은 덜 익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2020년. 코로나 사태 이후 온라인 강의로 전환하면서 정식으로 명함을 제작했다. 사실은 그때도 좀 더 미뤘으면 하는 마음 없지 않았다. 수강생이 많아지고, 대외적으로도 어느 정도 알려진 상황이라 아무래도 명함을 만드는 게 낫겠다고 결정했다.


명함을 만들고 난 후에 뭐가 좋아졌을까? 글쎄다. 대답할 말이 없다. 없어도 그만이었다. 낯선 사람 만날 기회 별로 없고, 매일 꾸준히 글을 발행하고 있는 블로그가 있고, 출간한 책도 몇 권 있었다. 그 정도면 명함의 필요성은 그닥 절박하지 않다고 봐야 한다.


명함에 회의적인 이유는, 과거 내 삶의 태도 때문이다. 대기업에 다니던 시절, 나는 회사에서 나오는 명함 덕분에 꽤나 인정 받고 살았다. 사람들은 내 명함에 찍힌 회사 로고를 보는 순간 나를 대하는 태도가 달라졌다. 나는 우쭐했다. 아침 7시부터 밤 10시까지 회사에 묶여 죽어라 일만 했으면서도, 누군가를 만나 명함을 교환할 때만큼은 내가 무슨 대단한 존재라도 된 것마냥 기분이 좋았던 거다.


10년 다닌 회사를 그만두고 나왔을 때, 세상에는 찬바람이 불고 있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명함이 사라진 나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사람들은 나를 그냥 '이은대씨'라고 불렀다. 직함이 떨어져나간 존재는 힘이 없었다. 나는 회사에서 일을 했던 게 아니라, 그저 회사의 일부였을 뿐이란 생각에 허탈하고 속상했다.


명함이 필요없는 일을 해야겠다고 다짐했었다. 그냥 내 이름 석 자만 대면 다들 나를 알아볼 수 있을 만한 존재로 거듭나야겠다고 각오를 다졌다. 그런 생각이 돈 욕심을 더욱 부추겼고, 결국 나는 무모한 사업에 손을 대면서 무너지기 시작했다.


고난의 시간을 겪은 후, 글 쓰고 강연하면서 두 번째 삶을 만났다. 명함이 필요 없는 존재가 되기. 그리고, 돈에 미련 갖지 말기. 두 가지 원칙을 정했다. 아직은 한참 멀었지만, 그래도 글쓰기/책쓰기 분야에서는 내 이름 석자가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았다. "이은대=글쓰기/책쓰기"가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


일인기업이든 다른 사업이든, 새롭게 시작하려는 이들에게 꼭 전하고 싶다. 명함은 나중에 만들라고. 그럴 듯한 사무실도 나중에 차리라고. 겉으로 화려하게 보이는 구색에 매달리면 본질을 잃게 된다. 번듯한 명함부터 만들어 돌리다가 흔적도 없이 사라진 사람 많이 봤다. 번쩍거리는 사무실 끝내주게 차렸다가 손해만 보고 도로 파는 꼴도 셀 수 없이 보았다.


실속이 먼저다. 내실이 우선이다. 나는 집도 없고 차도 없다. 주변에는 삐까뻔쩍한 집에 살면서 수입차 굴리는 사람 적지 않다. 내 수입이 더 많다. 내가 더 많이 번다. 내가 더 여유롭다. 집과 차 따위가 필요가 아니라 그 이상일 때, 사람은 불안하고 초조해진다. 나도 좋은 집에서 살아 봤고 수입차도 몰아 봤다.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거품이다. 겉멋이다.


외모를 참하게 가꾸는 것도 중요하다. 때와 장소에 맞는 격식을 갖추려는 노력도 의미가 있다. 허나, 모든 것에는 정도가 있다. 한 달 수입이 500만원도 채 되지 않는 사람이 수입차를 끌고 다니며 돈을 펑펑 써대는 것은 품격이 아니라 낭비이자 사치다. 순간의 멋과 쾌락을 위해 삶을 내다보지 못하는 꼴이다. 내가 딱 그랬다. 망하고 나서도 씀씀이가 줄지 않았으니, 결국은 파산까지 하고 말았던 거다.


명함이 꼭 필요한 직업도 있을 터다. 거의 매일 새로운 사람을 만나면서 자신을 알려야 하는 일. 그런 경우에는 당연히 명함을 만들고 지참해야 한다. 그러나, 나처럼 글 쓰고 주로 온라인에서 강의하는 사람은 굳이 시작부터 명함을 만들 필요 없다. 어느 정도 자리를 잡은 후에 하나씩 필요한 것들을 갖춰도 늦지 않다.


8평짜리 원룸을 사무실로 쓰고 있다. 방 절반이 책으로 가득 차 있다. 온라인 강의를 위한 시스템 갖추고 나니 빈 자리가 없다. 더 큰 사무실로 옮길 만한 여력 충분하지만 그럴 필요 없다. 지금 방으로도 책 읽고 글 쓰고 강의하는 데 아무 불편 없다. 더 작게, 더 소박하게, 더 덤덤하게. 실속과 가치, 본질과 태도에 집중하는 것이 잘사는 비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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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함 없어도 된다. 사무실 없어도 괜찮다. SNS로 나를 알리고, 집이나 카페에서 일해도 아무 상관 없다. 근사하게 폼 잡고 격식 차리고 싶겠지만, 나부터 먼저 조각한 후에 밖을 꾸미는 것이 마땅하다.


지금 행복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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