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강해진다
피부는 늘어지고 주름 진다. 동작은 느려진다. 달리는 것보다는 걷는 게 편하다. 사과 두 박스 정도는 거뜬하게 들었는데, 이제는 힘에 부친다. 머리카락은 빠지고 힘이 없고 가늘어졌다. 여간해선 근육도 잘 붙지 않는다. 척추와 신경 손상으로 일상 모든 동작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떡국 한 그릇 먹으면 나이 한 살 더 먹는다는 말이 듣기 싫어졌다. 살아온 날보다 살아갈 날이 적게 남았다는 사실을 직시할수록 조급해진다. 나는 지금껏 무엇을 이루었고, 어떤 삶을 살았으며,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곰곰이 생각하는 시간이 많아졌다.
나이를 먹는다는 건 어떤 의미인가. 어느 책에서, 노인 한 사람의 죽음은 도서관 하나가 사라지는 것과 같은 사건이라는 문장을 읽고 그 책을 가슴에 껴안은 적 있다. 나이 든다는 것은 그 만큼 세상과 인생의 이치를 깨달아 간다는 의미가 아닐까.
대만에 여행 갔을 때, 어느 지하철 플랫폼에서 있었던 일이다. 나와 아들 갑작스럽게 용무가 급해졌다. 우리나라처럼 고개만 돌리면 화장실이 있을 줄 알았는데, 대만은 달랐다. 아무리 찾아도 화장실 표식을 볼 수가 없었다.
상황은 점점 급해지고 방법을 찾지 못해 안절부절하고 있는데, 머리가 허연 노인이 다가와 "토일릿?"이라고 말을 건다. 아들과 내가 세차게 머리를 끄덕였다. 노인은 주머니에서 메모지를 한 장 꺼내더니 약도 비슷한 걸 그려주면서 그리 따라 가면 화장실 있을 거라고 영어와 손짓 발짓 섞어 혼신을 다해 알려주었다.
급한 마음에 인사도 제대로 못한 채 메모지를 보며 화장실을 찾아 갔다. 볼 일 다 마치고 나와서야 그 노인에게 감사 인사조차 옳게 못 했다는 후회가 밀려왔다. 2년이나 지난 일이지만 아직도 생생하다. 허연 백발, 주름진 이마, 구부정한 몸, 더듬거리는 말. 낯선 땅에서 갈팡질팡 애를 먹고 있을 때 어디선가 나타난 천사를, 나는 오래도록 기억할 것이다.
아버지와 어머니께 늘 당부드린다. 어디 가서든 입은 다물고 지갑은 여시라고. 용돈 두둑히 챙겨드릴 테니, 눈칫밥 먹을 생각일랑 마시고 누굴 만나든 밥도 사고 차도 사시라고. 대신, 남들 하는 말에 한 마디 얹으려는 생각 아예 하지 마시고, 그저 입을 다문 채 지긋이 바라보고 듣고 고개만 끄덕이시라고.
나이 드는 건 품격의 문제다. 뒷방 늙은이 되자는 말이 아니다. 청춘은 뜨겁지만 인생을 모른다. 나이는 은근하지만 삶을 안다. 아는 사람의 입은 무겁다. 그래서 노인은 어떤 자리에서든 그 자리를 지켜주는 것만으로도 힘이 되고 든든하다.
나이 들수록 내가 아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생각이 자주 든다. 아니, 내가 아직도 뭘 잘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고 하는 게 맞을 듯하다. 매 순간 바뀌는 세상과 인생과 나 자신에 대해 어떤 항상성을 주장하는 것 자체가 아이러니다. 달라질 수 있음을, 바뀔 수 있음을 알기에 그저 바라보는 것만으로 제대로 사는 거라 할 수 있는데. 이것은 나이가 들어야만 알 수 있는 진리인 것 같다.
육체는 시들어간다. 운동하고 관리하면서 싱싱함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하지만, 한계가 있다. 결국 우리 모두의 몸은 노화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나 정신은 다르다. 눈 감는 순간까지 성장할 수 있다. 나이 듦의 미학을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몸은 약해지지만 정신은 강해지는 과정이라 하겠다.
정신은 이성이다. 판단하고 결정하고 선택하는 힘이다. 더 옳은 판단을 하기 위해 공부와 노력을 게을리하지 말아야 한다. 더 나은 결정과 선택을 위해 부단한 연습과 훈련을 거듭해야 한다.
나이를 먹었다는 사실이 삶에 대한 공부와 살아내는 연습과 훈련을 멈춰도 된다는 의미는 결코 아니다. 나는 노인을 존경한다. 70년 80년 세월 살아낸 것만으로도 그들은 존중받을 만하다. 완전한 인간이야 없겠지만, 인생에 도움 될 만한 누군가를 콕 집어 곁에 둘 일 생긴다면, 나는 단연코 노인을 고를 작정이다.
나이 든 사람을 꼰대라 칭하고, 그들의 사고방식을 낡은 것으로 치부하고, 빠르게 돌아가는 세상에 적응하지 못하는 아웃사이더로 여길 때, 그 사회는 침몰을 면치 못한다.
세상은 노인을 위해야 하고, 노인은 공부를 멈추지 말아야 하며, 청년과 중년은 노인이 되어가는 과정을 기꺼이 맞이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행복한 인생, 충만한 세상을 만들 수 있는 것이다.
고집불통 늙은이도 있지 않느냐는 반문은 무시하겠다. 고집불통은 세 살부터 여든까지 어떤 세대나 다 존재하는 몇몇 특정인에 불과한 것이지, 노인들에게서만 발견되는 특징이 아니다. 빠른 현대사회에 적응하지 못하는 것도 사실 아니냐는 질문도 무시하겠다. 그 빠른 현대사회 만든 게 노인들이다. 나이는 소외가 아니라 존중이어야 마땅하다.
젊은이들이여! 노인이 보이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어르신! 이쪽으로 오세요! 여기 앉으세요!"라고 말하며 존중하고 사랑하라! 그것이 젊음이 가진 가장 아름다운 멋임을 알아야 한다.
지금 행복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