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가 여자인 줄 모르고 살았다
머리가 허옇고 정수리가 휑하다. 미장원에 가서 펌을 하고 와도 일주일 넘기지 못하고 풀린다. 동창회나 퇴직 교사 모임에 다녀오실 때마다 한숨을 푹푹 내쉰다. 암 치료 받은 친구가 있는데, 아주 참하게 가발을 맞췄다면서 관심을 보이신다. 아내가 인터넷으로 몇 군데 알아본 후 '하이모 레이디'를 찾아 나섰다.
거울 앞에 앉아 직원이 이리 저리 씌워주는 가발을 가만히 바라보는 어머니 표정이 발갛게 상기됐다. 소녀 같았다. 내가 봐도 20년은 젊어 보였다. 예쁘다 어머니.
"아이고, 너무 비싼 것 같은데."
어머니는 시종일관 가격만 말씀하신다. 그러면서도 계속 거울만 보신다. 여섯 번은 무료로 가발을 관리해주고, 이후로는 2만원 정도 내면서 지속 관리하면 된다고 한다. 집으로 돌아오는 동안 뒷좌석에 앉은 어머니와 아내는 끝도 없이 수다를 늘어놓는다. 어머니는 기분 좋을 때마다 말을 계속한다.
생로병사. 한 때는 그런 생각을 했었다. 사람이 태어나 살다가 죽는 것까지는 뭐 그렇다 치고, 왜 힘없이 늙고 초라해지고 아파야 하는가에 대해 납득할 수 없다고. 그냥 멀쩡하게 살다가 가면 안 되는 거냐고.
이제 조금은 이해가 간다. 사람이 너무 멀쩡하게 나이 들면 삶에 대한 집착을 내려놓지 못하기 때문 아닐까. 병들고 아프고 힘들어야 죽음을 좀 더 가까이 느낄 수 있을 테지. 신이 만들어놓은 세상 이치니까 따를 수밖에.
나는 평생 어머니가 그냥 어머니인 줄로만 알았다. 나이 여든 넘은 머리 허옇고 다 빠진 어머니. 꼬부랑 허리에 한 쪽 다리를 절뚝거리는 그냥 어머니. 아니었다. 어머니는 여자였다. 못난 아들은 어머니가 여자란 사실을 평생 모른 채 살았다. 예쁜 가발을 머리에 얹고 거울을 바라보며 지긋이 웃는 어머니는 천상 여자였다.
어머니한테 핸드크림 하나 사드린 적 없었다. 예쁜 원피스 한 벌, 매니큐어 한 번 사다드린 적 없었다. 밖에 나가서 고기 한 번 거하게 사먹으면 그것이 노모를 위한 최선의 선물인 줄 알았다. 뭘 먹어도 세 끼 밥 챙겨 먹으면 그만이고, 여든 넘은 나이에 고기 크게 아쉬울 것도 없었을 텐데. 그저 내가 편하고 내가 배부르면 그만이라 여겼던 것일까.
"요즘은 마흔만 넘어도 숱 적은 분들은 다들 가발 한두 개쯤은 하세요. 보기엔 조금 어색하고 이상하게 느껴질지 모르지만, 일단 한 번 머리에 착용해 보고 나면 확 달라진 자기 모습에 완전히 생각이 달라지는 거죠."
장사꾼의 달콤한 입담인 줄 뻔히 알면서도 구구절절 맞는 말 같아서 아무런 시비를 붙이지 못하였다. 진즉에 알았더라면, 어머니라는 여자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일찍 알았더라면.
가발인 줄 모르는 친구도 많고, 알아보는 친구들도 한결같이 예쁘다 잘 맞췄다 보기 좋다 하더라. 퇴직 교사 모임에 다녀오신 어머니 입이 귀에 걸렸다. 답답하지도 않고, 불편하지도 않다고. 이리 비싸고 좋은 걸 해줘서 고맙다고. 쉴 새 없이 말씀을 하신다.
남자는 선물을 받을 때보다 선물을 줄 때 더 기분이 좋다. 특히, 사랑하는 여자에게 선물했을 때 좋아하는 모습 보면 더 없이 기쁘고 행복하다. 내 여자, 어머니께 좋아하는 선물 줄 수 있어 다행이다.
숨소리가 거칠다. 동작도 느리다. 한 걸음 내딛는 것이 힘겹다. 앉았다 일어설 때마다 조심스럽다. 언제 이렇게 나이를 잡수신 걸까. 그 옛날 양 손에 장바구니 들고 시장에서 집까지 성큼성큼 걸어가고, 혼자 힘으로 출퇴근에 가족 식사에 집안일까지 모두 해내셨던 대장군 어머니는 어디로 사라진 걸까. 세월이 야속하기만 하다.
"저, 사장님. 어머님도 어머님이지만, 사장님도 하이모 한 번 생각해 보세요. 중년 남자들도 관리하고 가꿔야 해요. 조금만 신경 쓰면 확 달라보인다니까요."
그렇구나. 내가 지금 어머니만 신경 쓸 때가 아니구나. 내 머리가 더 문제구나. 어머니 생각에 애처로움과 안쓰러움 느끼다가 문득 정신이 번쩍 들었다.
지금 행복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