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흘러가는 대로
진정한 우정. 저는 이 말을 좋아했습니다. 중학교에 다닐 때 보았던 <영웅본색>, <첩혈쌍웅>, <지존무상>, <정전자> 등 홍콩 영화에 등장하는 주인공의 목숨을 건 의리! 살면서 그런 친구 하나쯤 있으면 세상 다 가진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하며 살았습니다.
드라마 <신사의 품격>이나 <응답하라> 시리즈를 보면, 오랜 시간 함께 하면서 쌓은 우정이 평생 지속되는 모습을 볼 수 있는데요. 나이 먹고 어른이 되면 각자 자기 삶을 챙기기 바쁠 텐데, 어떻게 저런 관계를 지속할 수 있는지 궁금하면서도 부러웠습니다.
제게도 많은 친구가 있었습니다. 사업 실패로 파산을 하고 도망자 신세가 되면서 하나 둘 떠나기 시작했습니다. 아니, 떠났다기보다는 저절로 관계가 정리되었다고 표현하는 것이 맞겠습니다. 진정한 우정? 영원한 우정? 저한테는 이번 생에서 그런 우정을 기대하기는 힘들 것 같습니다.
목숨 걸고 서로를 지켜줄 수 있는 친구 하나 없다는 사실이 한동안 저를 허탈하고 허무하게 만들었습니다. 내가 인생을 잘못 살았구나. 그저 일만 하고, 비즈니스 관계로만 얽혀 있는 인생. 차갑고 냉정한 세상을 살아가는 것 같아 외로웠습니다.
사업 실패하면서 무너져내린 것 말고는 제가 친구들에게 그리 큰 잘못을 한 적은 없거든요. 서로 술자리 자주 했고, 경조사 챙겼고, 고민과 기쁨도 나누면서 제법 우정 잘 쌓았습니다. 그런데, 돈이라는 문제가 생기기 시작하니까 우정에 금 가는 것 순식간이었습니다.
한편으로는 입장 바꿔도 그럴 수 있겠다 싶다가도, 또 한편으로는 그 동안의 정이 있지 어떻게 저럴 수 있는가 싶기도 했습니다. 영웅본색? 지존무상? 웃기고 앉았네. 다 족구하라 그래! 씁쓸한 뒷맛만 남긴 채 그렇게 저는 혼자 감옥에 갔고, 이후로 세상 뒷편에서 이 악물고 인생과 싸웠습니다.
나이 오십 넘어 삶을 돌아봅니다. 이제는 생각이 조금 달라졌습니다. 친구란, 그저 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는 존재입니다. 사는 게 바빠 소원해질 수도 있고, 그러다 또 외롭고 힘들 땐 소주 한 잔 나눌 수도 있는 거지요. 사람이니까, 얼마든지 그럴 수 있다 마음 열어버리면 그만입니다.
삶을 어느 정도 궤도에 올려놓은 후, 몇몇 친구들에게 먼저 연락했습니다. 그들은 기쁜 마음으로 제 전화를 받았고 서둘러 약속을 잡았지요. 서울에서도 자리를 함께 했고, 대구에서도 만났습니다. 친구들은 여전했습니다. 그들은 저한테도 여전하다는 말을 했습니다.
오랜 시간 삶의 풍파를 격으며 닳고 닳았으며 상처와 아픔 많이도 품었을 텐데, 우리는 모두 여전했습니다. 많은 게 달라졌고, 인생도 조금 알게 되었고, 세상에 대해서도 할 말이 많아졌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여전했습니다. 아무리 오랜 세월 흐른 뒤에 만나도 여전한 존재. 친구란 이런 거겠지요.
인생에서 만나는 어떤 단어에 너무 지나친 이상을 담는 것은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친구는 그냥 친구일뿐입니다. 목숨 걸고 어쩌고 하는 우정도 있을 수 있겠지만, 굳이 그렇게 거창하고 대단한 의미를 부여할 필요가 있을까 싶은 거지요.
좋을 땐 좋다 하고 싫을 땐 싫다 하고. 살다 보니 그럴 수도 있다 하고. 또 다시 만나 술잔 기울이면서 어깨 안을 수도 있고. 그러다 또 사는 게 바쁘면 연락이 끊어질 수도 있고. 어쩌다 다시 만나면 더할 나위 없이 반갑고 기쁜 사람들.
조금은 편안하게 세상과 인생을 받아들이면 좋겠습니다. 무엇은 반드시 이러해야 한다. 이러한 자기만의 기준이나 강박을 정해놓고 그걸 벗어날 때마다 괴로워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자신에 대한 기준도 마찬가지입니다. 돈 많이 벌어야만 하고, 성공해야만 하고, 무엇을 어떻게 해야만 하고. 스스로 만들어낸 이런 강박에 휩싸인 채 살아가다 보니 다른 사람들도 자기 기준에 맞춰 보게 되는 겁니다.
각자의 삶은 모두 다른 모습이고, 나 자신도 얼마든지 선택의 여지가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예전에 제가 무너졌을 때, 주변 사람들이 모두 저한테 이제 끝장이라 했거든요. 그런데 살다 보니 또 이렇게 넉넉한 일상을 만나게 됐습니다. 이후로 남은 인생에서 무슨 일이 어떻게 벌어질지 아무도 모르는 거지요.
딱 이래야 한다, 그런 기준은 없습니다. 누가 정한 것도 아니고, 반드시 트랙 따라 달려야만 하는 것이 인생은 아닙니다. 어떤 이유에서든 벗어날 수도 있고 다시 돌아올 수도 있는 겁니다. 자신에 대한 완고하고 고집스러운 자물쇠부터 풀어야 다른 사람 대하는 마음도 편안해지고 인생도 자유로워집니다.
영화는 영화일 뿐, 드라마는 드라마일 뿐, 현실 세계에서 지나친 이상과 기대는 실망과 좌절만 거듭하게 만든다는 사실 잊지 말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냥 지금 이대로 괜찮고, 조금 틀려도 괜찮고. <첩혈쌍웅>이나 <정전자> 말고, <전원일기>나 <한지붕 세가족>처럼 살아도 아무 문제 없습니다.
지금 행복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