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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는 옥수수를 전부 다 삶자고 하십니다. 아내는 먹을 만큼만 삶아서 먹자고, 필요하면 언제든 삶아드리겠다고 어머니를 설득합니다. 아침 기온 32도입니다. 어젯밤에 샤워를 하고 잤는데, 오늘 아침에 온몸이 끈적합니다. 6시 30분. 어머니와 아내의 옥수수 실랑이가 온도를 2도쯤 높이는 듯합니다.
일전에 깻잎이 잔뜩 생긴 적 있습니다. 여기저기서 동시에 선물을 보내준 덕분입니다. 양념해서 먹어도 맛있고, 삼겹살 먹을 때 쌈 싸서 먹어도 그만이지요. 어머니는 장아찌를 담갔습니다. 조금만 덜어서 담고 나머지는 그냥 두었어도 될 텐데, 그 많은 걸 한꺼번에 담고야 말았지요. 거의 다 버리고 말았습니다. 식초를 잘못 들이붓는 바람에 도저히 먹을 수가 없었지요.
고추장은 장독에 보관합니다. 아파트에 살고 있지만, 아버지와 어머니 정서상 장은 장독에 보관해야 한다는 원칙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장독에 보관하는 것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어머니는 고추장을 자꾸만 이쪽 저쪽에 옮겨 담는 습관(?)이 있습니다. 그냥 한 군데 가만히 두면 될 텐데, 고추장도 숨통을 터 주어야 한다는 이상한 논리로 가만히 두질 못하는 것이지요.
그냥 가만히 계시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누가 어머니한테 뭘 시키는 것도 아니고, 굳이 옥수수를 삶지 않아도, 깻잎 장아찌를 담그지 않아도, 고추장을 옮겨 담지 않아도, 아무도 뭐라 하지 않습니다. 그런 것들이 꼭 해야만 하는 일도 아니고요.
자꾸만 사고를 치는 것이죠. 가만히 있으면 아무 문제 없고, 가족간 불화가 생길 일도 없습니다. 그보다 더 심각한 문제는, 옥수수를 삶다가도 화를 내고 장아찌를 담그다가도 짜증을 부리고 고추장을 옮겨 담다가도 성질을 부린다는 사실입니다. 나이도 있고 체력도 예전같지 않고 지금은 다리까지 불편하니 뭘 해도 뜻대로 잘 되지 않습니다. 그러니 감정의 기복이 심할 수밖에요.
어머니와 아내. 중간에서 누구의 편을 들어주기가 애매합니다. 지금도 제 마음은 어느 누구의 편도 아닙니다. 그럼에도 자꾸만 일을 벌리고 망치는 어머니를 보고 있자면, 어쩔 수 없이 아내의 심정을 이해하는 쪽으로 기울게 됩니다.
어머니는 35년 동안 초등학교 교사로 근무했습니다. 김대중 대통령 시절에 명예 퇴직을 하고, 그 후로 전업 주부가 되었습니다. 꼭두새벽에 일어나 식구들 아침 챙기고, 출근해서 종일 일하고, 퇴근하면 또 저녁 상을 차렸습니다. 명절에도 어머니 혼자 제사 준비 다 했고, 할아버지 살아계실 땐 주말마다 아버지와 고향집에 다녀오곤 했었지요.
지금도 제 머릿속에는 어머니가 밤 늦게까지 빨래를 하고 방바닥을 닦는 모습이 선명합니다. 그런 어머니 곁에 가서 빨리 자자고 칭얼거렸던 기억도 나고요. 단 한 번도 어머니가 여유롭게 소파에 앉아 커피 마시는 모습을 본 적이 없습니다. 늦잠 자는 모습도, TV 보면서 앉아 있는 모습도, 친구들 만나러 다녀오겠다는 인사도, 아무리 생각해도 그런 모습 본 적도 들은 적도 없습니다.
어머니에 대한 기억을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정신없이 바쁜 사람" 정도가 될 것 같습니다. 혼자 힘으로 우리 둘 남매와 시댁 식구들까지 챙겼습니다. 잠시도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겠지요.
저는 제가 해야 할 일에 최선을 다 합니다. 아내는 집안일을 빈틈없이 합니다. 아버지는 요즘도 산에 다니고 친구들 만나고 복지관에서 배움도 계속합니다. 어머니는, 그냥 집에 계십니다.
평생을 바쁘게 살아온 한 여인이, 어느 날 갑자기 모든 일을 손에서 놓고 '가만히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요. 뭔가 하고 싶었던 겁니다.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부엌일밖에 없으니까, 자꾸만 냉장고를 열어 보고 손을 댈 만한 일이 없나 살피는 것이죠.
가장 큰 보람과 희열은 존재 가치를 느낄 때 찾아옵니다. 내가 세상에 필요한 존재이구나, 내가 그들에게 필요한 사람이구나, 세상과 타인이 나를 필요로하는구나...... 바로 이런 생각이 오늘을 살아가게 만드는 힘이자 쓰러지지 않게 만드는 원동력입니다.
어머니는 그 동력을 잃어버렸던 겁니다.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뒷방 늙은이란 생각에 점점 지쳐갔던 것이지요. 아들인 저는, 그런 사실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어머니는 지금도 거실 소파에 앉아 멸치를 다듬고 있습니다. 아내는 부엌과 거실을 오가며 어머니와 멸치에관한 대화를 주고받습니다. 때로 고성이 오가기도 하고, 때로 웃음 소리가 들리기도 합니다.
옥수수를 다 삶느냐 마느냐 가지고 실랑이를 벌이는 것은 아내 나름의 어머니 존중 방식이었습니다. 하고 싶으면 하세요, 말고 싶으면 마세요, 그냥 두세요, 가만히 계세요...... 라고 하지 않습니다. 사사건건 어머니의 의견을 묻고, 거기에 반론을 제기하고, 어머니가 설득하는 소리를 듣고, 고개를 끄덕이다가, 또 다른 질문을 하고, 나름의 주장을 펼치기도 합니다. 어머니는 며느리의 질문 공세 덕분에, 존재 가치를 느끼는 모양입니다.
언젠가 TV에서 나이 많은 부모님을 어떻게 모셔야 하는지에 대한 내용을 본 적 있습니다. 똑같은 말을 여러 번 되풀이해도 친절하게 대답하고, 집을 나설 땐 반드시 목적지를 밝혀 인사해야 하며, 돌아왔을 땐 꼭 부모님의 방문을 열고 무사히 다녀왔다는 인사를 하라고 합니다. 뭔가 결정을 할 땐 반드시 부모님의 의사를 여쭤보고, 사소한 일에 대해서도 부모에게 질문하기를 꺼리지 말라고 합니다.
바쁜 일상을 보내는 우리가 전통적인 유교 사상에 근거하여 부모님을 모신다는 것이 말처럼 쉽지는 않겠지요. 하지만, 우리 모두도 결국엔 나이를 먹고 늙어갈 거란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평생을 자식 위해 헌신하고 봉사했던 당신의 삶을 존중하는 태도가 꼭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여전히 건재하다는 생각. 아직도 자식들에게 내가 충분히 인정받고 존중받는 존재라는 확신. 여든이 되신 두 분에게 행복이라면 아마 이 정도면 충분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갑자기 이상한 냄새가 코를 찌릅니다. 거실에 환하게 핀 양란에다가 아버지가 거름을 갖다 부은 모양입니다. 여름이라 냄새가 잘 빠지지도 않는데, 오늘은 종일 코를 막고 씨름해야 할 것 같습니다. 참다 못한 어머니가 아버지를 향해 한 말씀 하시네요.
"제발 사고 좀 치지 말고 가만히 있으소!"
지금 행복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