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역사를 기록하는 일
할아버지는 제가 고등학교 2학년 때 돌아가셨습니다. 세상 떠나기 전 3년 동안 집에서 모셨습니다. 병환으로 거의 매일 거실에 누워 계셨는데요. 산에서 뱀 잡은 얘기 해달라고 졸랐던 적이 있습니다. 그럴 때마다 할아버지는 말씀하셨지요. "아이고야. 내가 이제 기억이 하나도 안 난다."
감옥에 있을 때부터 매일 일기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이 치욕스러운, 이 절망스러운 나날의 심정을 죽는 날까지 잊지 않겠다 다짐했던 것이지요. 그런데, 최근에 그때 썼던 일기장을 들춰보면, 그 시절 제가 어떤 감정을 느꼈었는가 도통 기억이 나질 않았습니다.
특별한 경험, 대단한 기억 등 일반적이지 않은 이야기는 평생 기억될 것 같습니다. 하지만, 살다 보면 어느 순간 살아온 이야기 대부분을 잊게 됩니다. 소중하고 아름다운 추억이든, 아프고 괴로웠던 심정이든, 모든 기억이 서서히 옅어지는 것이지요.
자신의 역사를 기억하는 것은 중요합니다. 첫째, 오늘과 지금을 살아가는 버팀목이 되기 때문이고요. 둘째, 나와 내 삶을 소중하게 여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셋째, 앞으로의 삶에 의미와 가치를 부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모든 사람에게는 자신만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유명한 사람만 쓸 만한 이야기를 가진 게 아닙니다. 평범한 직장인도, 주부도, 학생도 각자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 이야기는 오직 그 사람만이 쓸 수 있습니다. 같은 식당에서 밥을 먹어도 각자 다른 경험을 합니다. 같은 회사에 다녀도 각자 다른 이야기를 만듭니다. 자신의 시선으로 본 세상, 자신의 감정으로 느낀 순간, 자신의 언어로 표현한 생각은 오직 자기 자신만이 가지고 있습니다.
문제는, 자신의 이야기를 하찮게 여기는 사람이 많다는 사실입니다. '내 이야기가 뭐가 특별해?' '누가 내 일상에 관심 있겠어?' '이런 걸 굳이 써야 하나?' 이런 생각 때문에 쓰지 않습니다. 지금 내가 하찮다고 여기는 이야기가 10년 후에는 소중한 기록이 됩니다. 지금 내가 별것 아니라고 생각하는 순간이 20년 후에는 더 없이 소중한 추억이 됩니다.
수강생 중에 60대 여성분이 있습니다. 그분은 평생 주부로 살아왔습니다. "저는 쓸 이야기가 없어요. 그냥 평범하게 살았어요." 하지만 몇 차례 이야기를 들어보니 전혀 달랐습니다. 1980년대 시골에서 도시로 온 이야기, 중국 여행 다니면서 우연히 지금의 남편을 만난 이야기, 세 아이를 키우며 겪은 좌충우돌 이야기, 시장에서 장을 보며 느낀 물가와 경제 변화에 대한 남다른 소견 등. 모든 이야기가 마치 한국 현대사의 축소판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쓰지 않으면 사라지는 이야기는 단순히 과거의 기록만이 아닙니다. 생각과 감정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이 순간 느끼는 감정, 품고 있는 생각, 고민하는 문제들도 쓰지 않으면 사라집니다. 한 달 전에 무슨 생각을 했는지, 일주일 전 저녁에 무슨 감정을 느꼈는지, 대부분은 기억하지 못할 겁니다. 기록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일기를 쓰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단순히 하루를 기록하는 것이 아니라 그날의 나를 보존하는 것입니다. 오늘 내가 무엇을 생각하고, 어떻게 느끼고, 무엇을 원하는지 기록해 두면 나중에 과거의 나를 만날 수 있습니다. 그 과거의 나는 현재의 나를 이해하는 열쇠가 됩니다. 어떻게 변했는지, 무엇이 변하지 않았는지, 어떤 가치관이 여전한지 알 수 있습니다.
부모님 이야기도 마찬가지입니다. 부모님이 젊었을 때 어떤 사람이었는지, 어떤 꿈을 꾸었고, 무엇을 두려워했고, 어떤 연애를 했는지, 대부분은 알지 못합니다. 부모님도 당신들의 이야기를 하찮게 여겨 말하지 않고, 자녀들도 물어보지 않습니다. 그렇게 한 세대의 이야기가 통째로 사라집니다.
아버지에게 부탁한 적이 있습니다. "아버지 인생 이야기를 써주세요." 아버지는 손사래를 치셨습니다. "쓸 게 뭐 있어. 그냥 평범하게 살았는데." 하지만 저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계속 질문하고 계속 부탁했지요.
아버지와 어머니는 두 분의 이야기를 엮어 작은 책을 만들었습니다. 가족과 일가 친척들에게만 나눠주려고 만든 비매품이었습니다. 아버지는 그 책을 받고 한참을 말없이 읽었습니다. "내가 이렇게 살았구나." 아버지와 어머니의 이야기가 영원히 사라지지 않고 남게 되었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충분했습니다.
역사책에는 왕과 장군의 이야기만 나옵니다. 전쟁과 정치의 기록뿐입니다. 하지만 진짜 역사는 평범한 사람들의 삶 속에 있습니다. 그 시대를 살았던 보통 사람들이 무엇을 먹고, 어떻게 일하고, 무엇을 걱정했는지가 진짜 역사입니다. 아쉽게도, 그런 이야기는 대부분 사라집니다. 쓰지 않은 탓입니다. 평범한 사람들은 자신의 이야기를 기록할 가치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다릅니다. 누구나 글을 쓸 수 있고, 기록을 남길 수 있습니다. 일기장에 쓸 수도 있고, 블로그에 올릴 수도 있고, 컴퓨터 파일로 저장할 수도 있습니다. 방법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건 쓰는 행위입니다. 나의 이야기를 기록으로 남기는 과정입니다.
어떤 이야기를 써야 할까요? 특별한 내용일 필요 없습니다. 오늘 본 풍경, 오늘 나눈 대화, 오늘 느낀 감정이면 충분합니다. "오늘 출근길에 개나리가 피었다. 봄이 왔구나 싶었다." 이 한 문장도 소중한 기록입니다. 10년 후 이 문장을 읽으면 2025년 봄이 떠오를 것입니다. 그때의 내가, 그때의 마음이 생생하게 되살아날 테지요.
가족 이야기도 중요합니다. 조부모님, 부모님 이야기를 들으면서 기록해 두는 거지요. 그분들 젊었을 때 이야기, 힘들었던 시절 이야기, 행복했던 순간들을 물어보고 적어둡니다. 그것이 가족의 역사가 됩니다. 자녀들에게 물려줄 가장 소중한 유산 아니겠습니까.
직장 생활 이야기도 기록할 가치 있습니다. 첫 출근 날의 떨림, 힘들었던 프로젝트, 동료들과의 추억, 퇴사를 결심했던 순간. 이런 이야기들은 지금은 별 것 아닌 것 같아도 나중에는 의미 있는 기록이 됩니다. 자신의 직업 인생을 돌아볼 수 있는 자료가 될 수도 있습니다.
연애 이야기, 우정 이야기도 마찬가지입니다. 누군가를 좋아했던 마음, 이별의 아픔, 친구와 나눈 깊은 대화. 이런 감정들은 시간이 지나면 희미해집니다. 글로 남겨두면 그 감정을 다시 느낄 수 있습니다. 그때의 나를 다시 만날 수 있겠지요.
여행 이야기도 순식간에 사라집니다. 사진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사진은 풍경을 보여주지만 감정은 보여주지 못합니다. 그 순간 무엇을 느꼈는지, 무슨 생각을 했는지는 글로 써야 남습니다. "파리의 작은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며 사람들을 구경했다. 다들 여유로워 보였다. 나도 이렇게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짧은 문장 하나가 사진 백 장보다 더 많은 것을 전해줍니다.
책을 읽고 나서도 기록해 두어야 합니다. 어떤 부분이 인상 깊었는지,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몇 줄이라도 적어두는 거지요. 나중에 다시 그 책을 읽을 때 과거의 내가 남긴 메모를 보면 신기합니다. 그때는 이 부분이 와닿았지만, 지금은 또 다르구나, 이렇게 변화하는 나를 관찰할 수 있습니다.
쓰지 않으면 사라지는 것은 개인의 이야기만이 아닙니다. 시대의 모습도 사라집니다. 지금 우리가 사는 2025년의 일상은 훗날 역사가 됩니다. 지금은 평범한 일상이지만 50년 후에는 귀중한 역사 자료가 됩니다. 그 때 사람들은 궁금해할 겁니다. 2025년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무엇을 걱정했을까? 어떤 음식을 먹고, 어떤 옷을 입고, 어떤 말을 사용했을까?
그 답은 지금 우리가 쓰는 글 속에 있습니다. 블로그, 일기, SNS에 남긴 기록들이 훗날 역사가 됩니다. 그러니 자신의 일상을 기록하는 것은 단순히 개인적인 행위가 아닙니다. 시대를 기록하는 역사적 행위입니다.
물론 글쓰기가 힘들고 어려울 수도 있습니다. 시간도 걸리고 귀찮기도 합니다. 쓰지 않으면 영원히 사라진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나중에 쓰겠다고 미루면 결국 쓰지 못합니다. 기억은 계속 흐려지고, 감정은 점점 잊혀지고, 결국 쓸 수 없게 될 겁니다.
지금 써야 합니다. 오늘을 써야 합니다.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문장이 서툴러도 괜찮습니다. 중요한 건 기록하는 행위 그 자체입니다. 오직 나만 쓸 수 있는 이야기, 지금 쓰지 않으면 영원히 사라집니다.
10년 후, 20년 후의 내가 지금의 기록을 읽으며 고마워할 겁니다. 내 자녀가 부모의 젊은 시절 이야기를 읽으며 감동할 테지요. 나의 손주들이 조부모의 삶을 이해하게 될 겁니다. 그 모든 것은 지금 내가 쓰는 한 문장에서 시작됩니다.
쓰지 않으면 사라지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바로 나의 이야기입니다. 그 이야기를 지켜낼 수 있는 사람은 오직 나 자신뿐입니다. 오늘부터 한 페이지씩 나의 이야기를 기록하면 좋겠습니다. 그것이 내가 이 세상에 남길 가장 소중한 흔적이 될 겁니다.
지금 행복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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