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신 '이것'부터 하세요
책이 손에 잡히지 않는 날이 있습니다. 책 펼쳐 읽으려 애써도 형식적으로 글자만 읽을 뿐 머릿속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습니다. 결국 책을 덮고 스마트폰을 집어 듭니다. 묘한 죄책감이 찾아오기도 합니다.
"나는 역시 독서 체질이 아닌가 봐." 이런 경험, 한두 번이 아닐 겁니다. 독서를 오래 해온 사람도 이런 날이 있습니다. 솔직히 말하면 저도 일주일에 한두 번은 그렇습니다. 10년 넘게 책을 읽어온 사람도 그런데, 이제 막 독서를 시작한 사람이라면 이런 날이 더 자주 찾아오는 게 당연합니다.
오늘 하고 싶은 이야기가 이런 겁니다. 읽기 싫을 때 억지로 읽지 않아도 된다는 거지요. 대신 할 수 있는 것들이 있습니다.
읽기 싫은 데는 다 이유가 있습니다. 의지력이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기 쉬운데, 실제로는 그렇지 않은 경우가 훨씬 많습니다. 책이 읽기 싫어지는 데는 제법 구체적인 원인이 있습니다.
몸이 피곤한 겁니다. 가장 흔한 원인인데 가장 많이 간과하는 원인이기도 합니다. 종일 일하고, 사람 만나고, 집안일 하고 나면 뇌는 이미 에너지를 다 쓴 상태입니다. 이 상태에서 글자를 읽고 의미를 해석하는 건 뇌에게 야근을 시키는 것과 같습니다. 피곤할 때 책 읽기 힘든 건 의지의 문제가 아니라 에너지의 문제입니다.
지금 읽는 책이 자신에게 맞지 않는 경우도 있습니다. 읽기 싫다는 감정이 특정 책에서만 반복된다면, 그건 독서가 싫은 게 아니라 그 책이 지금 나와 맞지 않는다는 말이지요. 문체가 별로일 수도 있고, 주제가 지금 나의 관심사와 멀 수도 있고, 난이도가 높아서 읽는 데 힘이 드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머릿속이 복잡한 것도 하나의 이유가 될 수 있습니다. 회사 걱정, 관계 고민, 내일 해야 할 일. 머릿속에 이런 것들이 가득 차 있으면 책 내용이 들어올 자리가 없습니다. 글자는 보이는데 내용이 들어오지 않는다는 건 뇌의 처리 용량이 이미 다른 것들로 꽉 찬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이 세 가지 중 하나라도 해당된다면, 억지로 읽는 건 오히려 역효과입니다. 읽기 싫을 때 억지로 읽으면 독서 자체가 고통스러운 기억으로 저장됩니다. 그러면 다음에는 책 펼치는 것 자체가 더 어려워집니다.
대신 이것부터 해보면 좋습니다. 책 읽기 싫은 날, 그냥 안 읽고 넘기면 될까요? 물론 그래도 됩니다. 하루 읽지 않는다 해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하지만 "읽지 않는 날"이 계속 이어지면 독서와 점점 멀어지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래서 읽지 않되, 책과의 접점은 유지하는 방법이 필요합니다. 억지로 읽는 것과 완전히 손을 놓는 것, 그 사이 어딘가에 있는 방법들입니다.
첫째, 책 대신 책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보는 겁니다. 직접 읽는 건 힘들지만, 누군가 책에 대해 이야기하는 걸 듣는 건 훨씬 쉽습니다. 유튜브에서 책 리뷰 영상을 하나 틀어놓는 겁니다. 10분짜리 북리뷰 영상 하나면 충분합니다. 누군가 책 내용을 자기 언어로 풀어서 설명하는 걸 듣다 보면, "아, 이건 좀 재밌겠는데?"라는 호기심이 살아나는 순간이 옵니다.
팟캐스트도 좋습니다. 출퇴근길에 음악 대신 책 관련 팟캐스트를 틀어두면, 읽지 않아도 책과 연결된 상태가 유지됩니다. 이 연결이 끊어지지 않는 게 중요합니다.
둘째, 읽던 책 말고 다른 책을 펼쳐보는 것도 좋습니다. 읽기 싫은 감정이 "독서 전체"가 아니라 "지금 이 책"에 대한 것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읽던 책은 잠시 내려놓고, 완전히 다른 종류의 책을 한번 펼쳐보는 겁니다. 자기계발서를 읽다 지쳤다면 가벼운 에세이를, 두꺼운 인문서에 막혔다면 짧은 단편소설을 꺼내보는 식입니다.
서점이나 도서관에 가서 평소 즐겨 읽지 않던 장르의 코너를 한 번 기웃거려보는 것도 괜찮습니다. 의외의 책에서 의외의 재미를 발견할 때가 많습니다.
셋째, 예전에 읽었던 책에서 밑줄 친 문장만 다시 보는 것도 좋은 방법입니다. 새로운 책을 읽는 건 에너지가 들지만, 이미 읽은 책에서 좋았던 문장을 다시 보는 건 에너지가 거의 들지 않습니다.
예전에 읽었던 책을 꺼내서 밑줄 친 부분만 훑어보는 겁니다. 3분이면 됩니다. 그때 좋았던 문장을 다시 만나면 기분이 좋아지고, 또 이런 문장을 만나고 싶다는 마음이 자연스럽게 올라옵니다. 독서 노트가 있다면 그걸 넘겨봐도 좋습니다.
이건 독서가 아니라 독서의 잔향을 즐기는 것에 가깝습니다. 이 잔향이 다음 독서를 끌어오는 힘이 됩니다. '독서'라는 행위와 계속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죠.
넷째, 딱 한 페이지만 읽어 봐도 됩니다. 간단한 방법인데, 의외로 효과가 큽니다. "오늘은 딱 한 페이지만 읽자." 이렇게 스스로와 약속하는 거지요. 한 페이지는 1분이면 읽을 수 있습니다. 부담이 거의 없습니다.
한 페이지를 읽고 나면 한 페이지 더 읽고 싶다는 마음이 드는 때가 많습니다. 심리학에서 말하는 '시작 효과'입니다. 행동을 시작하는 게 어렵지, 일단 시작만 하고 나면 계속하는 건 훨씬 쉽습니다.
물론 실제로 한 페이지만 읽고 덮는 날도 있습니다. 그것도 괜찮습니다. 한 페이지라도 읽었으면 오늘 독서는 한 것이니까요.
다섯째, 서점이나 도서관에 그냥 가 보는 것도 좋습니다. 읽는 건 싫지만 책 있는 공간에 가는 건 또 다른 이야기입니다.
서점에 가서 신간 코너를 천천히 구경하고, 마음에 드는 표지가 있으면 들춰보고, 카페에 앉아서 커피 한 잔 마시고 나오는 것. 이게 '독서'는 아닐 수 있지만, 책과의 관계를 유지하는 행위로서는 아무 손색이 없습니다.
도서관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무 책도 빌리지 않아도 됩니다. 조용한 공간에 앉아 있는 것만으로도 독서에 대한 심리적 거리가 가까워집니다. 독서 습관이 자리 잡기 전에는, 이렇게 환경과의 접촉을 유지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의미가 있습니다.
가끔 읽기 싫은 건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하지만 그 상태가 2주, 3주 이상 계속된다면 한 가지 점검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지금 읽고 있는 책이 정말 읽고 싶은 책인지 아닌지.
"읽어야 할 것 같은 책"과 "읽고 싶은 책"은 다릅니다. 남들이 추천해서, 베스트셀러라서, 교양으로 읽어야 할 것 같아서 고른 책이라면, 읽기 싫은 게 당연할 수 있습니다.
독서가 의무가 되는 순간, 재미는 사라집니다. 특히 독서를 이제 막 시작한 단계라면, 재미가 최고의 기준입니다. 유익하지만 재미 없는 책보다, 유익성이 조금 떨어지더라도 재미 있는 책이 먼저입니다. 재미 있는 책으로 독서 체력을 키우면, 나중에는 어려운 책도 자연스럽게 읽게 됩니다.
책 읽기 싫은 날은 '독서를 포기해야 하는 날'이 아닙니다. 잠시 쉬어가는 날입니다. 억지로 읽는 건 독서가 아니라 고행입니다. 고행은 오래 못 합니다. 대신 읽기 싫은 날에도 책과의 거리를 완전히 벌리지만 않으면 됩니다.
책 리뷰 영상 하나를 보는 것, 읽던 책 대신 다른 책을 펼쳐보는 것, 밑줄 친 문장을 다시 꺼내보는 것, 딱 한 페이지만 읽어보는 것, 서점에 그냥 들러보는 것. 이 중 하나라도 했다면, 오늘도 독서와 함께한 하루입니다. 읽기 싫은 날이 있다는 건, 읽고 싶은 날도 있다는 뜻입니다. 그 마음이 돌아올 때까지, 천천히 기다리면 됩니다.
지금 행복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