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글장이 Oct 23. 2023

삶은 늘 구체적이다

관념과 추상에서 벗어나길


아버지는 매일 새벽 산에 가신다. 나는 새벽 4시에 일어나는데, 30분쯤 지나면 현관에서 등산화 신는 소리가 난다. 그렇게 나갔다가 6시 30분쯤 돌아오신다. 6시 40분에 온가족 아침밥을 먹는다. 어머니는 비슷한 시간에 일어나긴 하지만, 주로 집에서 정좌를 하고 명상하듯 시간을 보내다. 아내는 6시에 일어나 밥을 짓는다. 약간의 차이는 있겠지만, 거의 매일 같은 시간 우리 가족 모습이다.


바람이 차다. 어깨는 저절로 올라가고 몸은 움츠러든다. 어이쿠 춥다 소리가 나온다. 찬물에 머리를 담그면 찌릿하다. 포근하고 따뜻한 공기와 물에 감싸이고 싶다는 충동이 일어난다. 하지만, 그렇게 하면 금세 몸이 녹아들고 한숨 더 자고 싶다는 욕구를 이겨내기가 힘든다. 조금 불편하긴 해도, 이른 아침부터 내 삶을 시작한다는 주도적인 기쁨을 누리는 것이 차라리 낫다. 벌써 10년째다.


된장찌개에 김치와 김무침. 아내는 반찬이 별로 없다며 계란후라이를 부쳐 내놓는다. 고추장 한 숟가락 퍼서 참기름이랑 붓고 밥을 비빈다. 아침부터 웬 비빔밥이냐고 하겠지만, 별다른 나물반찬 없이 고추장과 참기름만으로 밥 비벼 먹는 걸 즐긴다. 술술 잘 들어간다. 


똑같은 일상을 지겹다고 느낀 적 있었다. 뭔가 새로운 이벤트와 즐겁고 재미난 일이 벌어지길 기대하며 살았다. 내 인생은 왜 이리 고리타분하고 흥미지진하지 않냐며 투덜거린 날도 많았다. 그러다가 사업에 크게 실패하고 감옥에까지 가게 되었는데, 매일 똑같은 일상을 보내는 것이 얼마나 행복하고 다행스러운 일인지 그때서야 깨달았다. 


감옥에서의 아침은 침울하다. 기상 방송에 깜짝 놀라듯 잠을 깨고, 모두가 입을 굳게 다문 채 잠자리를 정리한다. 깊은 잠에 빠졌다가 눈을 떴을 때, 이곳이 나의 집이 아니란 사실을 깨닫게 되어 저절로 입을 다물게 되는 것이다. 시간이 지나고 아침밥을 먹고 설거지까지 끝내고 나면, 비로소 달력을 보면서 자신이 나갈 날을 세어 보는 것이다. 


세상으로 돌아온 날 다짐했다. 하루에 한 번씩 그곳에서의 시간을 잊지 않겠노라고. 혹시라도 살면서 또 다시 내 삶을 지겹다거나 재미 없다고 느끼는 배부른 때가 온다면, 참혹하고 처절했던 감옥에서의 시간이 나를 때리는 회초리가 되어줄 거라 믿었기 때문이다. 


삶은 늘 구체적이다. 아버지 등산화 신는 소리도, 어머니 참선하는 모습도, 아내 밥 짓는 냄새도, 모두 오감을 타고 흘러들어오는 실체적 감각이다. 볼 수 있고 들을 수 있고 만질 수 있다. 그래서 '살아 있다'고 표현하는 모양이다. 신체와 정신의 기능을 상실한 이들은 안타깝게도 보아도 보는 게 아니고 들어도 듣는 게 아닌 시간을 보내야 한다. 살아 있으나 산 게 아닌 셈이다. 그럴 때 우리는 '불행'이라는 단어를 쓴다.


아침에 눈을 뜨면 가장 먼저 감사해야 한다는 말을 들은 적 있다. 이해할 수 없었다. '왜?'라는 질문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감사라는 건, 누군가로부터 선물이나 도움을 받았을 때 하는 인사가 아닌가. 큰 실패를 겪고 난 후에 알게 되었다. 모든 걸 당연하게 여기고 살았다는 사실을. 


세상은 당연하지 않다. 1년 6개월. 아버지의 등산화 신는 소리가 끊어졌고 어머니 참선하는 모습이 사라졌고 아내 밥 짓는 냄새가 없어졌다. 단절이었다. 당연하게 여기던 모든 일상이 한순간에 사라진 것이었다. 낯설게 느껴지는 세상 뒤편의 풍경에 적응하기까지 한참이나 걸렸다. 지금 이렇게, 매일 똑같은 일상을 보내며 살아간다는 것이 어찌 감사가 아닐 수 있겠는가. 


문득 삶을 돌아볼 때가 있다. 스쳐 지나는 일상의 모습 하나하나 구체적이지 않은 때가 없었다. 그럼에도 많은 이들이 글을 쓸 때 관념과 추상에 매달린다. 감옥에서 집에 갈 날만 손꼽아 기다린다는 내용을 '희망'이라는 두 글자로 압축해버린다. 다시 살기 위해 인력시장 문을 두드렸던 심정을 '용기'라는 말로 대체해버린다. 


친구가 땅을 사니 왠지 배가 아프고, 다른 사람 잘나가는 모습을 보니 마음이 편치 않고, 주변 사람들로부터 조그만 삐딱한 소리를 들어도 힘없이 무너져내리고, 나도 성공하고 싶다는 욕망은 생기지만 막상 열심히 노력하려니 두렵고 게을러 실천하기 어렵다는, 이런 내용들을 하나하나 쓰는 대신 '내면의 자아'라고 퉁쳐버린다. 


마음이 조금만 평온해지면 '치유의 글쓰기'라고 마구 떠들고, 왜 슬프냐고 묻거나 빵 어디 있냐고 찾으면 F다 T다 한 글자로 단정 짓는다. 사람을 향해 좋다 싫다 평가를 내리는 속도도 LTE급이며, 스마트폰으로 소통을 할 때도 상대방 글을 읽는 시간은 0.3초에 불과하다. 다 놓치고, 전부 대충이고, 모조리 추상이다. 깊이를 찾기 힘들고 믿음직스럽다는 말이 그리울 지경이다. 


2023년이 저물어간다. 관념으로만 보면, 새해 목표와 계획을 세우는 것으로 한 해를 마무리하게 될 터다. 구체적으로 해야 할 일을 하나씩 따져 보면, 마무리도 아니고 출발도 아닌 '오늘을 사는 행위'가 될 수 있다. 추상과 관념은 행동으로 이어지지 못한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머릿속으로는 많은 것을 한 것 같은 착각을 하기 때문이다. 그런 사람은 제자리에 맴돌거나 퇴행할 가능성이 크다. 대신, 말이 많다. 


삶과 글이 모두 구체적이었으면 좋겠다. 보고 듣고 말하고 느끼는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보여줄 수 있는 당당한 글을 읽고 싶다. 김 훈 작가가 그러하고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가 그러하며 법정 스님이 그러했다. 그들은 자신의 삶을 보여준다. 우리는 그대로 볼 수 있어서, 그들을 신뢰한다. 기꺼이 어깨를 기댈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돈 되는 글도 좋고 팔리는 책도 좋다. 하지만, 어떤 글이든 삶이 녹아 있지 않으면 그것이 돈이 되고 많이 팔린들 무슨 소용 있겠는가. 삶과 글이 일치하지 않으면, 쓰는 행위는 언제까지나 단순 노동일수밖에 없다. 쓰는 시간이 내 인생에서 '낭비'로 기록된다는 의미이다. 삶을 낭비하고 돈을 버는 것이 마땅한 일인가. 생각이 많아진다. 


거실에서 아버지와 어머니 툭탁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이 또한 매일 일어나는 우리집 소음이다. 소음은 활력이다. 소음이 사라지는 날이 오면 나는 또 무너질 게 뻔하다. 그래서 지금은, 저 소란스러운 당신들의 입씨름이 소중하고 행복하게 들리는 것이다. 


지금 행복하십시오!


작가의 이전글 나쁜 생각을 좋은 생각으로 바꾸는 방법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