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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장이 Nov 16. 2023

마음에 작은 공간 하나쯤

많은 일이 있었는데


일찍 서둘렀다. 출근 시간이었지만 차가 막힐 염려는 없었다. 수능 시험날이다. 대부분 직장인과 대학생들 출근과 등교 시간이 늦춰졌을 터다. 병원 예약은 9시다. 8시에 출발하면 충분히 도착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오늘은 지난 주에 했던 아버지 심장 혈관 검진 결과를 들으러 가는 날이다.


신천대로는 하나도 막히지 않았다. 병원 주차장에 차를 세우니 8시 40분이다. 적당했다. 2층 심장혈관센터로 가서 환자 등록을 하고 번호표를 뽑았다. 아버지는 5분쯤 의자에 앉아 숨을 고르셨다. 의사 만나기 전에 혈압을 재야 한다. 괜히 고혈압으로 나오면 약만 더 타야 하는데, 아버지는 그게 싫다 하셨다.


"혈압도 좋고, 검사 결과도 좋습니다. 지난 번에 통증이 좀 있다 하셨는데, 지금은 어떠세요? 예, 그렇군요. 다행입니다. 아무 이상 없습니다. 다만, 연세도 있으시고 심장 상태가 보통 사람 3분의 2정도밖에 되지 않으니 늘 조심하세요. 3개월 뒤에 뵙지요."


아버지도 나도 기분이 좋았다. 그렇게 집까지 모셔다 드린 후, 바로 사무실로 향했다. 음향 시스템에 문제가 발생했다. 어제 두 번의 강의를 하는 동안 식겁했다. 온라인 강의는 음향 시스템 망가지면 끝장이다. 오늘 밤 문장수업 직전까지 어떻게든 고쳐야 한다.


기계치다. 속이 터진다. 잠깐 집중해서 이런저런 조치를 취해 보았는데, 아무리 손을 써도 복구되지 않는다. 시간은 벌써 오후 2시. 점심도 못 먹었다. 이러다가 정말 큰일 한 번 내겠다 싶어 이창현 강사에게 전화를 걸었다. 원격으로 몇 가지 조치를 해주었으나, 여전히 완전하지는 않았다. 늘 자기 일처럼 마음 써주는 그가 고마웠다. 


다시 처음부터 하나씩 점검했다. 아무리 봐도 특별한 이상이 없었다. 컴퓨터를 재시동하고 음향을 체크했다. 불안하다. 시간이 없다. 일단 오늘은 이 상태로 문장수업 진행해야 한다. 뜻대로 되지 않으니 애가 탔다. 마음은 조급해지고, 배까지 곯아 신경이 예민해졌다. 


중간중간 걸려오는 전화를 최대한 예를 갖춰 응대했다. 음향 시스템은 내 문제다. 수강생들과는 아무 상관 없다. 내가 책임져야 하고 내가 수습해야 한다. 그렇게 몇 차례 수강생들과 상담 전화를 하다 보니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무엇 때문에 이리도 조급하고 불안하게 난리를 피우고 있는 것인가. 


완벽하지 않아도 된다. 수강생들이 내 목소리를 선명하게 듣고 수업에 집중할 수 있는 정도면 충분하다. 그럼에도 자꾸만 음악과의 묘한 조화를 고집한다. 아무 쓸데없는 욕심이다. 내려놓기로 한다. 마음이 한결 편안해졌다. 


무슨 일을 하든 마음 조급하고 불안하고 초조하면 될 일도 안 된다. 방 안에 여러 가지 물건들이 놓여 있는 이유는, 방이라는 공간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마음에도 공간이 있어야 한다. 행복이 놓일 만한 공간. 그래야 언제 어느 때든 행복한 마음을 느낄 수가 있다. 오늘 나는 저녁 때가 다 되어서야 행복할 수 있었다. 아버지 건강하다는 결과 들었을 때부터 이미 행복할 수 있었는데. 종일 그 많은 시간을 쫓기는 듯한 마음으로 보내버렸다.


사무실에서 라면과 볶음밥 시켜먹었다. 배달온 친구가 비에 폭삭 젖었다. 수건을 건넸다. 어려 보인다. 몇 살이냐고 물었다. 열아홉이란다. 오늘 수능 시험날 아니냐고 물으려다 말을 삼켰다. 11월 16일 목요일. 온나라가 수능시험이라는 말에 떠들썩한 날. 또래 아이들 중에는 수능시험을 보지 않는 친구도 많다는 사실을 나도 깜빡 잊었다. 


마음에 공간이 없으면 많은 걸 놓친다. 시간이 흐르고 나면, 그 많은 걸 놓쳤다는 생각에 후회를 한다. 잠시만 멈춰서서 호흡을 가다듬으면 더 많은 걸 보고 듣고 느낄 수 있다. 그러고보니, 하루 내내 가을비가 내리고 있었다는 사실도 까맣게 잊고 있었다. 


아버지 건강이 고맙고, 도로에 차가 많지 않아서 감사했다. 가을비가 내렸고, 라면이 맛있었고, 배달온 친구가 안쓰러웠다. 많은 일이 있었고, 많은 걸 느낄 수 있는 하루였는데. 나는 무엇을 위해 종종걸음으로 오늘을 보냈는가. 


마음 쫓긴다고 문제 빨리 해결되는 것도 아닌데. 급하게 서두른다고 일이 빨리 풀리는 것도 아닌데. 송곳처럼 날카로운 물건들 좀 드러내고, 마음에 공간 하나 비워야겠다.


지금 행복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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