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것도 하기 싫은 날, 가만히 있기는 싫을 때 요리를 한다. 그런 날은 복잡하게 손을 놀려야 하는 요리보다는 단순한 행동을 반복해야하는 레시피를 고른다. 계속 저어주며 뭉근히 끓여야 하는 비프스튜, 호박죽, 카레와 같은 음식이 좋다. 냄비 속을 긴 나무 주걱으로 이리저리 휘젓다보면 잡생각은 사라지고 맛있는 냄새가 나기 시작한다. 막상 요리를 하다 보면 냄새에 질려서 당장 먹고 싶은 마음은 사라지지만, 하룻밤 묵혀두었다가 다음 날 아침으로 먹으면 맛있다. 되직하게 끓여내는 음식과 마찬가지로 오래 볶아야 하는 음식도 좋다. 예를 들어, 깨 볶기. 팔이 뻐근해 질 정도로 오랫동안 반복해야 하는 일이다. 밑에 있는 깨가 타지 않도록 계속해서 긴 나무주걱으로 바닥을 휘저어야 한다. 멍하니 뒤적뒤적 볶다보면 고소한 냄새가 집안을 가득 채운다. 내 뇌의 어딘가에서는 깨 터지는 소리, 고소한 냄새, 더운 김에 대한 기억을 저장하느라 바쁘겠지만 어쨌거나 내가 의식할 상념은 없다.
부모님과 함께 살 때에는 부모님께서 드실 간식거리를 만들곤 했다. 깨강정, 견과류가 들어간 초콜릿 바, 잔 멸치와 견과류를 넣은 강정 등을 만들어 드리면 좋아하셨다. 잡생각없이 시간을 보내면서 부모님도 즐겁게 해드릴 수 있다니. 해야 할 일을 미루고 시간을 낭비한다는 점에서는 비생산적이지만, 요리라는 유형의 것이 만들어지고 가족을 기쁘게 했으니 조금은 생산적인 일이었지 않을까. 스스로 이런 위안을 하며 지냈던 그 시간 동안 아주 조금씩 내 안에 다시 시작할 힘이 쌓여갔다.
강정을 만들 때는 물엿과 설탕의 비율을 조절하는 것이 중요하다. 물엿만 넣으면 바삭거리는 식감이 없이 끈적거리기만 하고, 설탕을 많이 넣으면 강정이 너무 딱딱해져서 씹어 먹기가 힘들다. 보통 물엿 1컵에 설탕 두세 숟가락 정도의 비율로 만든다. 볶은 깨와 다양한 견과류들이 준비되어 있으면 요리시간이 오래 걸리지는 않는다. 물엿과 설탕을 끓인 후 다 같이 섞고 얇게 펴서 굳히면 끝이다. 단맛을 끌어올리기 위해서 소금을 추가하기도 하고 잔멸치를 넣어 짭짤한 맛을 더해도 좋다. 문장으로 쓰면 겨우 한 문장인데, 가족이 넉넉히 먹을 만큼 크고 깊은 팬에 가득 만들면 꽤 손이 많이 간다. 물엿과 설탕의 끈적거림 때문에 따라오는 부수적인 잡일들도 많다. 얇게 펼쳐서 굳힐 때에도 쟁반 위에 랩을 깔고 기름을 발라두어야 하고, 다 만든 후 각종 요리도구들을 설거지 하는 것도 일이다. 팬과 주걱에 붙은 물엿과 설탕이 굳기 전에 빨리 씻어야한다. 이미 굳었다면 팬에 물을 넣고 끓여서 물엿과 설탕을 녹인 후에 설거지 하는 편이 쉽다. 글을 쓰면서 요리과정을 복기하는 것만으로도 지치는 느낌이네. 역시 이런 수고는 사랑 없이는 해내기 힘들다.
두어 달 전에 선물로 들어온 땅콩이 조금 남아있어서 어떻게 처리할까 하다가 커피땅콩을 만들었다. 볶아진 땅콩이 지퍼백 형식의 포장지에 담겨있었는데 껍질이 있는 채여서 먼저 땅콩껍질을 벗겼다. 의외로 땅콩 껍질 벗기는 일이 즐거웠다. 무념무상으로 껍질을 바스러뜨리면 땅콩이 쏙 하고 튀어나오는 모습이 귀여웠다. 땅콩 껍질의 가벼운 바스락거림과 속 알맹이의 맨들맨들 매끄러운 촉감의 대비도 재밌고.
팬에 설탕을 바글바글 녹을 때까지 끓이고 소금 한꼬집, 커피가루와 땅콩을 섞고 버터도 있다면 추가한다. 잘 섞은 후 한 김 식혀 설탕을 다시 솔솔 뿌린다. 에어프라이어에 기름종이를 깔고 끈적한 커피땅콩을 부어 돌리면 더 바삭해진다. 커피땅콩을 한두 시간 쟁반 위에 식혀두고 한 알 집어먹어봤더니 맛이 괜찮다. 카누 미니스틱 하나를 넣었는데 생각보다 커피 향이 진하지 않다. 하나 더 넣을 걸 그랬나. 껍질을 다 까고 보니 한 컵 분량이라 요리가 별로 힘들지 않을 줄 알았는데, 팬이 큰 것밖에 없으니 설거지가 힘든 건 마찬가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