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사현 교수님의 102세 어머니를 기억하며
슬픔의 태도
- 장사현 교수님의 102세 어머니를 기억하며
김미진(소설가)
교수님의 102세 어머니께서 2025년 12월 17일 임종하셨다는 연락을 받았다. 다음날 퇴근 후 버스를 타고 대구로 향했다. 용계에서 나순희 선생님, 이현숙 선생님을 만나, 영남대학교의료원 장례식장 201호에 도착했다. 복도로 들어서자 꽉 채운 조화들 사이로 커다란 슬픔이 흘러나왔다. 조화가 겹겹으로 길게 이어져 있었다. 그것은 살아있는 사람들이 끝까지 지켜야 할 태도를 보여주듯 질서 정연하게 서 있었다.
엄숙한 분위기 속에 빈소에 들어서니 각계 지도층에서 보내온 조기가 둘러 있고 많은 상주가 맞이해 주었다. 옆 공간에는 문상객들이 자리를 채우고 앉아 음식을 먹으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문상을 온 사람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고개를 숙이고 인사를 건넸다. 그 누구도 슬픔을 앞질러 가지 않았다. 그 느슨한 거리감이 오히려 슬픔을 단단히 붙들고 있는 듯 느껴졌다.
교수님께서 초췌한 얼굴로 내게 다가왔다. 앞으로 나와 어머니께 술잔을 올리라 하신다. 순간 몸이 굳어졌다. 엄숙한 분위기 속에 잔을 어떻게 들어야 할지, 어디까지 올려야 할지, 많은 생각이 교차했다. 다시 돌아올 수 없는 이별 앞에서 교수님의 102세 어머니께 예를 다해야 한다는 내면의 목소리가 크게 울려 퍼졌다.
두 손으로 술잔을 들다가 잠시 멈칫했다. 이상하게도 잔이 따뜻했다. 술의 온기 때문일까 싶었지만, 그 따뜻함은 술잔에만 머물지 않았다. 손바닥을 지나 가슴으로 천천히 옮겨왔다. 급하지 않은 온기, 오래 기다렸다는 듯 서두르지 않은 온기였다. 그 순간 교수님의 어머니가 내게 말하는 듯 들려왔다. "잘 왔다." 그건 소리로 들리지는 않았지만 분명 내게 전해지는 어떤 음성이었다. 어떤 설명도, 위로도 아닌 무언의 언어였다. 오래 살아온 사람만이 남길 수 있는 따뜻한 사랑의 메시지가 내 주위를 포근히 감쌌다. 그 온기 앞에서 말없이 술잔을 올렸다. 어떤 말도 그 순간에는 필요치 않았다. 어머니의 삶이 그러했듯 이별 또한 요란하지 않았다. 감정을 앞세우지 않고 슬픔을 과장하지 않는 태도로 정중히 큰절을 올렸다. 어머니는 마지막 가는 자리를 많은 문상객과 손자들을 내려다보며 그렇게 지키고 계셨다. 요란하지 않고, 넘치지 않으며, 감정을 함부로 드러내지 않는 자세. 어머니는 평생 그 인자한 태도로 삶을 건너오신 분이 아니실까. 한 많은 삶이었음을 교수님께 익히 들어서 알고 있었다. 그 세월을 조용히 통과하신 분. 붙잡기보다 내려놓는 쪽을, 말하기보다 묵묵히 감내하는 쪽을 선택하며 살아오신 분이 아니시던가.
잠시, 빈소 위에 놓인 책자와 눈이 마주쳤다. ‘鄭承華 여사 100세 기념 傳言錄’이었다. 제 작년 봄에 교수님이 어머님 백세를 기념하여 어머님의 사상과 말씀을 정리 기록한 책자였다. 그 속에 기록된 어머님의 인품과 덕망을 나는 알고 있었다. 102세 어머니에게 오래 산다는 것은 특별한 성취가 아니었을 것이다. 다만 주어진 시간을 성실히 지나오는 일이었을 것이다. 남보다 앞서려 하지도 않고, 뒤처지는 것을 부끄러워하지도 않으셨을, 오직 자식만을 위해 살아오신 그 성실한 면모. 중심을 알고, 그 중심을 지키는 일에 충실한 삶을 살아오신 분이시기에 고개가 절로 숙여졌다.
이윽고 교수님께서 나를 상주들께 소개했다.
“내 딸, 수현이 언니입니다.”
그 한마디가 가슴을 쿡 찔렀다. 아픈 몸으로 누구보다 충실히 세상을 살아냈던 나의 막냇동생 수현이. 2023년 6월 9일 하늘의 별이 된 내 동생. 그 이름 앞에서 그동안 삭혀온 시간들이, 말하지 않았던 그 애의 착한 마음들이 함께 불려 나왔다. 눈물이 맺혔지만 흘러내리지는 않았다. 참아낸 눈물이라기보다 가만히 머무는 눈물이었다. 이별 앞에서 내가 선택한 가장 정중한 슬픔이었다. 슬픔에도 각자의 방식과 속도가 있으리라. 타인이 규정하거나 재단할 수 없는 각자가 자기 방식으로 머무는 시간이라고 롤랑 바르트는 말했던가.
상주들이 많으니 그 광경이 참 든든해 보였다. 슬픔은 혼자 견디는 것이 아니라 여럿이 조금씩 나누는 것이라는 사실이 그 광경 속에 고스란히 드러났다. 고개를 숙인 사람들 사이로, 말없이 건네지는 손길들 속으로, 슬픔은 조금씩 옅어질 것이리라. 문상객을 위해 마련한 상 위에는 흰쌀밥과 쇠고깃국, 수육과 새우젓, 전과 오징어무침, 김치와 떡, 견과류와 귤, 술과 음료수가 차려졌다. 한 사람의 생은 끝났지만 남아있는 사람의 일상은 계속되고 있었다. 사람들은 숟가락을 들며 조용조용 서로의 안부를 물었다. 먹는다는 행위는 살아 있음의 확인일까. 문상객이 한꺼번에 들어오자 임복희 선생님과 나는 조용히 자리를 비켜줬다.
102세 어머니가 떠난 자리에 남은 것은 말로 다 할 수 없는 큰 사랑이리라. 말로 다 형용할 수 없는 그 사랑은 어쩌면 자손 대대로 이어져야 할 삶의 몫이 아닐까. 그분은 아마 이 모든 것을 미리 알고 있었을 것이다. 오래 산다는 것은 많이 가지는 일이 아니라, 덜어내는 연습을 오래 하는 일이라는 것을. 남기기보다 비워두는 쪽을 선택하며 살아온 어머니만의 결코 녹록지 않은 세월이었으리라.
장례식장을 나온 뒤에도 나는 내 몸에 흐르는 그 따뜻한 온기를 쉽게 내려놓지 못했다. 그것은 손에 남은 것이 아닌, 마음속 깊숙이 남은 온기였다. 교수님의 어머니는 안타깝게 세상을 떠났지만, 나는 그분의 인자함과 의연한 태도를 잊지 않고 배우려 한다.
삶은 결국 무엇을 가졌는가 보다 어떻게 살았는가로 기억될 것이다. 상대에게 말보다 먼저 사랑이 전해지고, 기억보다 마음속에 오래 머무는 것. 그것이 교수님의 어머니께서 102년을 사시며 자식들에게 물려준 값진 유산이 아닐까.
그 온화한 태도를 내 삶에서 조심스럽게 이어가려 한다. 조금 느리더라도 소박하게 감정을 잘 조절하며 살아갈 것이다. 그것이 교수님의 102세 어머니를 가장 오래 기억하는 방식일 것이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