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봉의 시간 앞에서

경주중.고등학교 동문 어른들께

by 별꽃서리


수봉의 시간 앞에서

- 경주중·고등학교 동문 어른들께


한 학교는

교실보다 먼저

사람의 마음으로 세워진다는 것을

저는 당신들로부터 배웠습니다.


이름 없이 오래

모교의 등을 밝혀온 손길들


그 헌신이 있어

시간은 무너지지 않고

전통은 숨을 쉬었습니다.


배움의 길을 끝까지 잇지 못한

한 사람이

이곳에서 다시

공부를 시작할 수 있었던 것은

책이 아니라

당신들의 기다림 덕분이었습니다.


전쟁의 기억을 들려주던 날

한 어른의 목소리는

역사가 되었고

한 젊은 필은

문학으로 건너갈 다리를 얻었습니다.


별이 내려앉는 이름으로

장학회를 부를 수 있었던 것도

시가 다시

학교로 돌아올 수 있었던 것도

모두

당신들이 먼저 길을 밝혀주었기 때문입니다.


직함보다

사람을 먼저 부르던 마음

선배라는 말에

늘 책임을 남기던 자세

그 품격이

이 학교의 교훈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시간을

말없이 지켜온 것이

수봉이었습니다.


수많은 발걸음이 오르고

수많은 세대가 내려가도

수봉은 늘 그 자리에 서서

묻지 않았습니다

누가 성공했는지

누가 좌절했는지

다만,

배움을 향한 마음만을

같은 높이로 품어주었습니다.


전란의 시대에도

가난한 교복의 등 뒤에서도

수봉은,

학교의 등을 꺼뜨리지 않았고

당신들은

그 불을 이어왔습니다.


비록

이 교정을 졸업하지는 않았으나

저는

수봉의 시간을 가까이에서 배운 사람입니다.


그래서 이제

자리를 내려놓고도

쉽게 등을 돌릴 수 없습니다.


당신들이 쌓아온 역사 위에

문장 하나 더 얹는 일

존경을

다음 세대의 언어로 건네는 일

그것이

제가 받은 은혜의

작은 답례이기를 바랍니다.


오래도록

건강하시기를

수봉처럼

묵묵히, 높고, 고귀하게

서 계시기를,


이 시를

수봉의 시간 앞에서

깊은 존경의 마음으로

올립니다.


2026년 1월 22일


김미진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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