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와 현재가 조용히 마주 앉아 있는 곳
대화장
김미진
대구 중구 북성로의 좁은 골목을 따라 걷다 보면, 낡은 간판과 벽돌 틈 사이로 오래된 숨결과 마주한다. 과거와 현재가 조용히 마주 앉아 있는 곳, 바로 대화장이다.
1920년대 여관이었던 이 공간은 한때 낯선 이들이 하룻밤 머물며 각자의 사연을 내려놓던 자리였다. 이제는 브런치 카페이자 펍, 전시장과 살롱으로 다시 태어나 ‘대화’를 중심에 둔 복합 문화 공간이 되었다.
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 이곳의 시간은 느리게 흐른다. 가옥, 창고, 사진관, 살롱으로 나뉜 공간은 서로 다른 기억의 방처럼 이어져 있다. 각각의 방은 '마음 깊은 곳에 묻어둔 이야기를 꺼내보라'며 내게 조용히 손짓한다.
이곳에서의 대화는 마술에라도 걸린 것처럼 특별함이 느껴졌다. 영남문학 북구청 시화전을 둘러본 뒤, 울산에서 오신 김정곤 원장님의 예약으로 이 자리에 함께하게 되었다. 원장님은 인터넷에서 찾았다며 이곳에 꼭 오고 싶었다고 하신다. 정석현 고문님과 지인분, 장사현 이사장님, 김정곤 원장님과 절친 성필권 선생님, 최경자 낭송가님, 유진서 편집장님, 전영귀 영남문학 작가회장님, 피송열 시인이자 수필가님, 김미경 시인님과 내가 자리를 함께 했다.
꽃 중에 꽃
- 고 임세원 교수를 그리워하며
김정곤
못내 아쉬워 뒤돌아보고 뒤돌아보는
겨울손을 붙잡고 데려다 주는 봄
봄이 오는 길목에는 달리기가 한창이네
세월이 하수상하여 계절도 혼절이라
이 때가 그때라고 앞다투어 피려하네
먼저 핀다고 먼저 지는 것이 아니듯
늦게 핀다고 늦게 지는 것도 아니네
꽃 중에 꽃은 먼저 피는 꽃이 아니듯
꽃 중에 꽃은 먼저 지는 꽃도
아니네
꽃 중의 꽃은
작아도 아름답고
못 생겨도
사랑스러운 꽃
은은한 향기가 구만리 가는 꽃
음식이 나오기 전, 김정곤 원장님은 시화전에 낸 꽃시에 얽힌 가슴 아픈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2018년, 정신건강의학과 임세원 교수가 환자의 흉기에 찔려 세상을 떠난 비극적인 사건. 강북삼성병원 동문회 회장으로 8년 임기를 마칠 때까지, 임세원 교수가 8년동안 총무를 맡아 열심히 하셨다면서... 절친을 잃은 슬픔이 담긴 그 이야기는, 한 편의 시처럼 내 가슴을 아프게 했다.
이번 영남문학 북구청 시화전은 피송열 선생님의 노력으로 마련된 자리로, 제1회 북구청 청사 시화전 <꽃, 시로 피다>라는 이름 아래 열리고 있다. 권병엽, 권서옥, 김명란, 김미진, 김승국, 김정곤, 박정미, 박치명, 유진서, 이정하, 전영귀, 정광호, 조아랑, 피송열, 황우연 등 열다섯 명의 시인이 참여했으며, 기획은 유진서 편집장님이 맡아 심혈을 기울였다. 전시는 3월 16일부터 3월 27일까지 이어진다.
레트로한 소품과 빛바랜 벽지, 은은한 샹들리에, 그리고 사진으로 남기고 싶은 순간들과 존경하는 영남문학 선생님들. 가슴이 먹먹해지는 순간이다.
"별. 노. 마!"
별을 노래하는 마음. 김정곤 원장님의 힘찬 건배사다.
대화장의 풍경은 눈에 보이는 것 너머에 있었다. 그것은 서로의 이야기를 온전히 들어주는 마음의 시간이었다. 그 시간 속에서 나는 조금씩 변해가는 내마음을 느낀다. 스스로를 엄격한 시간 속에 가두었던 지난날의 나를, 이제 조금씩 내려놓으려 한다.
바깥에 놓여있는 노란색 둥근 테이블과 의자가 정겹다. 정석현 고문님은 같이 오신 분과 그곳에 마주앉아 이야기꽃을 피운다. 마치 빈센트 반 고흐의 <밤의 카페테라스>를 연상시킨다.
우리는 얼마나 자주, 얼마나 깊이 대화를 나누며 살아가고 있을까. 빠르게 소비되는 말들 사이에서 진심은 쉽게 생략된다. 하지만 이곳에서는 잊혔던 내면의 말들이 앞다투어 나오려 하고, 감정은 나도 모르는 사이 서서히 형태를 갖춰나간다.
누군가와 마주 앉아 서두르지 않고, 판단하지 않은 채 그저 이야기에 귀 기울이는 일. 그 단순한 행위가 얼마나 귀한 것인지, 이곳의 분위기가 조용히 일깨워준다.
골목을 나설 즈음, 처음 들어설 때와는 다른 마음이 고해 성사를 하듯 나를 감싼다. 분주한 세상 속에서 잠시 멈추고 서로를 이해할 수 있었던 소중한 시간이 아닐 수 없다. 맥주 두 잔에 한껏 기분이 좋아진 걸까. 온몸의 감각이 감사와 충만함으로 가득 찬 채, 내 눈은 대낮 하늘을 보며 "별. 노. 마!" 외친다. 비틀거리는 그림자 하나가 총총히 대화장을 빠져나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