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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름달 Jul 24. 2023

교사 그리고 학부모

교사가 교육을 제대로 하기 위해서 서로 간의 신뢰감을 회복해야 한다. 

  교사생활 10년을 훌쩍 넘고 20년을 채우기 직전이다. 무난하고 평온한 시간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무수히 많은 민원과 항의를 받아보았고 심각하게는 교육청신고에 국민신문고까지 올리는 학부모를 만나기도 했다. 홈페이지 검열까지 이루어졌지만 아이를 학대하거나 차별한 증거를 찾지 못해 하나의 심각한 해프닝으로 끝나기도 했다. 물론 가장 심각한 사항을 마주했을 때 내 옆에는 나를 지키고자 하는 든든한 선배선생님과 남편이 온몸을 다해 그 학부모의 공격을 막아주셨다. 그래서 버티어냈다.  


  문제의 시작은 언제나 부모와 함께 함으로 아이를 바르게 성장시키고 싶은 나의 욕심일 것이다. 일 학년 아이가 보여주는 어떤 말과 행동에서 지나치게 성에 대한 관심을 보이는 것을 여러 차례 보게 되었다. 그냥 두면 안 될 것 같은 마음에 그 사실을 알고 있냐고 조금 염려스럽다고 부모에게 전하게 되었다. 그러자 부모는 아이를 잠정적인 성범죄자 취급을 했다고 민원을 넣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그동안 이루어졌던 교육 하나하나에 대해 말도 안 되게 부풀린 이야기를 지역 맘카페에 올렸다. 그런 이야기가 올랐다고 알려준 학부모로 인해 글과 댓글을 살펴보았고 내가 하지 않은 행동들이 마치 진실인양 여겨져 수없이 달린 댓글은 그런 교사는 없어져야 한다고 난리였다. 나를 모르는 사람들은 그 학부모를 옹호하고 교사를 비난하는 댓글을 무자비하게도 계속 올렸다. 유명연예인이 된 것처럼 하루에 100개 이상 달리는 댓글에 숨이 막혔다. 그때 딱 들었던 생각은... 죽고 싶다였다. 모든 나의 교육이 부정당했으며 그동안의 노력과 정성이 무너져버렸다. 옆에서 지켜보던 남편과 선배선생님은 내가 무너져 내릴까 봐, 교사로서의 삶을 포기하고 스스로를 저버릴까 봐 불안해했다. 전화를 하지 말았어야 했나. 아이가 보여주는 그 많은 문제적인 행동에 대해 묵살하고 묵인했어야 하는 것이었나. 끝없는 후회의 늪으로 빠졌다. 결국 학급의 다른 부모들의 호응을 얻지 못하고, 어떤 학대의 증거를 발견하지 못한 학부모는 결국 자기가 오버했다는 단순한 사과로 다시 아이를 학교에 보냈다. 아무렇지 않은 듯 나 역시 그 아이를 가르쳤지만 아직도 그 아이의 이름과 비슷한 이름을 만나면 가슴이 내려앉는다. 


  올해 역시 힘들었다. 내가 한 말과 다르게 전하는 아이의 말만 믿는 학부모의 민원에 지쳤다. 혼내면 혼낸다고 항의를 하고 아이가 적응할 때까지 기다리겠다고 했더니 아이를 방임한다고 문자가 왔다. 부모와의 원활한 소통을 위해 휴대폰 번호를 기꺼이 공유한 스스로가 원망스러울 정도로 시간을 가리지 않고 항의성 문자를 계속 받아야 했다. 있지도 하지도 않은 행동들을 사실처럼 이야기하는 것을 견딜 수 없었다. 학교 가는 것이 두려웠다. 스스로 말을 검열하고 행동을 돌아보면서 제대로 된 수업을 할 수 없었다. 막바지에 고소하겠다는 말을 남긴 채 학교로 전화해 담임교체를 원했다. 숨이 막혔고 그 아이가 있는 교실에 들어갈 수 없었다. 다른 아이들에게 너무 미안했지만 내 교육을 할 수 없는 그곳에 갈 수 없었다. 이번에도 남편이 나서주었고 부모님들이 움직임을 보여주었다. 나를 지켜주는 것은 학교도 관리자도 아니었다. 그 아이는 결국 전학 가고 사건은 일단락되었지만 나는 한동안 우울증 약과 수면제를 먹어야 했다. 


  나의 문제였을까. 학생들 한 명 한 명에 지나친 관심과 애정을 갖는 내가 문제인가. 아이의 변화와 성장을 원하여 학부모와 소통하고자 하는 마음이 불편한가. 아이의 성향 자체를 인정하고 두는 것이 아이의 성향을 파악하고 좀 더 나은 방향으로 나가고자 하는 노력보다 나은 것일까. 그것도 아니라면 학교를 보는, 교사를 보는 몇몇 학부모의 시선과 마음이 변했기 때문인 것일까. 

  학교를 보육시설로, 교사를 보모로 생각하고 내 아이만을 위한 맞춤형 교육을 원하는 부모가 늘어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최근 받은 민원이나 항의를 살펴보아도 그렇다. 다들 자신의 아이만을 위한 교사를 꿈꾼다. 그래서 더 많은 요구를 하고 그게 마치 권리인 것처럼 말한다. 공부는 학원에서 하면 된다고 말하기도 한다. 학교는 다만 아이를 일정시간 동안 안전하게 돌보는 곳으로써의 역할이라 치부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다 보니 교사는 움츠러들 수밖에 없다. 교사에게는 학교가 더 이상 안전하지 않다. 자기 검열을 해야 하는 것은 물론 지나치게 관여하지 않아야 하면서도 너무 자유롭게 두지도 않아야 한다. 자칫하면 아이를 미워하냐는 원망을 듣거나 아동 학대, 특히 정서적 학대를 자행하고 있다는 비난을 받는다.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너무도 없다. 


  서이초의 까마득한 후배님 소식에 여러 생각이 밀려들었다. 그가 견디어내야 했던 것이 무엇이었든지 쉽지는 않았을 거라고 감히 예상해 본다. 그래서 마음이 많이 아팠다. 많은 교사들이 같은 마음일 수밖에 없는 것은 아마 비인간적이며 말도 안 되는 항의나 민원을 겪어보지 않은 사람이 없기 때문은 아닐까. 내 일처럼 여겨지는 마음을 가지는 것은 암담한 교육현실을 모르는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많은 이들이 학생인권이 문제라고 한다. 학생인권, 중요하다. 다만 학생에게만 인권이 있는 것이 아니라 교사에게도 있음을 잊고 있다는 것이 문제다. 무엇보다 학생과 교사를 이분법적으로 나누는 것이 문제다. 누구에게나 인권이 있음을 인정하고 서로의 인권을 존중해야 한다. 학생과 교사 그리고 학부모를 나누기 전에 "인권"은 인간이라면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권리임을 인식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학교는 작은 사회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아이가 커서 사람들과 어울려 살아야 하는 사회는 다양한 사람이 존재한다. 이런 사람들과 어울리는 법을 배우는 곳이 학교이다. 협상하는 방법, 양보하면서도 자기 것을 지키는 힘과 갈등을 겪으면서 나아갈 힘을 얻는 것은 경험을 통해 배울 수 있는 곳이 학교다. 그리고 그런 학교에서 아이들을 교육하는 사람이 교사이다. 부모가 건드려주지 못하는 부분을 건드려주기도 하며 사회 속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깨닫게 한다. 내 아이에게 상처를 주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과 어울려 살기 위해 조절하는 방법을 배우는 과정이다. 아이가 혼자 사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면, 사회적 인간으로 성장하길 바란다면 막무가내로 교사에게 요구할 수 있을까. 공주/왕자 대접을 받으면서 이기적이고 비도덕적이며 자기만을 위한 삶을 사는 사람으로 성장하길 원한다면 굳이 학교에 보낼 필요가 있을까. 학교와 교사를 바라보는 시선을 바꾸어야 한다.  


  사실 난 특정 학부모로 인해 깊은 상처를 입은 동시에 많은 학부모들과 아이들에게 힘을 얻고 위로를 받았다. 그들의 지지와 응원으로 일어날 수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결국 교사를 죽고 싶게 하는 것도, 또 살아서 교육현장에 있게 하고 싶은 것도 아이들과 학부모들이다. 서로를 믿어야 한다. 존중하면서 나아갈 길을 도모해야 한다. 스승의 그림자조차 밟지 말라는 옛말을 지키자는 것이 아니다. 다만 학부모와 교사, 각자의 위치에서 서로를 존중하고 믿어야 한다. 서로의 인권을 존중하고 그 영역을 침범하지 않아야 한다. 언제부터 그 믿음이 깨졌는지 중요하지 않다. 서로에 대한 믿음을 회복해야 한다. 우리 아이가 바르게 자라 한 사회의 구성원으로 자리매김을 하기 위해 부모와 교사의 관계의 재정립이 무엇보다 중요한 시점이다. 

 




**세상을 등질수밖에 없던 선생님께 마음 깊이 애도를 표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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