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보름달 Jul 19. 2023

가짜 상처와 자해

자해를 하는 아이들을 만나면 참 아프다

  한동안 유행했던 아이들의 가짜 상처 그리기 놀이는 아직도 성행 중이다. 처음 가짜 상처를 보고 허석 하여 가슴을 부여잡았다. 놀란 나를 보고 웃으면서 "진짜 같죠?!" 말한 아이는 등짝 한 대를 맞았다. 단순히 놀라서 때린 것은 아니었다. 약간의 괘씸죄도 있었다. 가짜 상처를 동맥 즉 자해한 것처럼 보이게 그려놓고 해맑게 웃던 모습이 철딱서니 없어 보여서 순간 화가 났다. 아이는 장난이었겠지만 난 정색했다. 무슨 의미인 줄 아냐고 물었다. 어설프게 답하는 녀석을 뒤로하고 한바탕 아이들에게 설교했다. 그 뒤로도 해마다 고학년을 맡을 때마다 눈여겨보았다. 역시 한두 명은 꼭 있다. 그래서 내 손등에도 한번 그려보라 했다. 5분도 안 되는 시간에 3색 펜으로 쓰윽했는데 순식간에 큰 상처가 생겼다. 가벼운 장난일 텐데 하면서도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복잡해졌다.


  중고등학생의 자해는 특히 여자아이들 사이에서 공공연하게 이루어진다. 사실 초등학교에도 없지 않다. 머리의 한 부분을 골라 머리카락을 끊임없이 뽑는 행위(자발적 부분탈모로 휑한 부분이 보인다.), 두피의 같은 부분을 쉴 새 없이 긁어서 상처 내는 것, 손톱을 물어뜯는 것 등 여러 가지 모습이 있다. 무의식적으로 스트레스상황에 놓였을 때 하기도 하고, 의도적으로 하는 경우도 있다. 의도적인 자해는 교실 안에서 보기 힘들다. 다만 무의식적인 것보다 마음이 더 쓰인다. 무의식적인 것은 힘들거나 스트레스받는 상황에서 벗어나면 자연스레 멈출 수 지만 의도적인 자해는 아이가 마음을 먹어야 그만둘 수 있기 때문이다.


  중학생의 자해는 좀 더 교묘하다. 도구를 사용하기도 한다. 샤프의 날카로운 부분을 사용하기도 하고 거기에 익숙해지면 커터칼을 사용한다. 위치도 다양하다. 손목 안쪽 부분, 턱선, 손등, 귀 뒤 등 신경 써서 보지 않으면 잘 보이지 않지만 아는 사람에게는 보이는 곳이다. 마치 모두에게 알리고 싶지 않지만 누군가에게는 보여주고 싶어 하는 듯하다. 관심이 필요한 아이가 말썽을 부리는 것처럼 아는 이들의 애정을 애타게 바라는 듯하다. 자해의 이유도 너무도 다양하다. 그들의 고통과 괴로움을 감히 폄하하고 싶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자해하는 것이 이해된다고 혹은 괜찮다고 말하고 싶지 않다. 유행이라서, 하지 않았을 때 여자아이들 사이에 낄 수 없어서, 호기심에 하는 경우도 있지만 정말 사는 것이 괴로워서 하기도 한다. 육체의 고통으로 정신의 고통을 잊으려고 하기도 하고, 살아있다는 것이 저주스러워서, 자기 혐오감에 못 이겨서 하기도 한다. 내가 얼마나 힘든지 보여주고 싶어 은밀하게 자행하는지도 모른다. 보이고 싶지 않지만 보이고 싶기도 한 그 마음을 어찌 모를까. 다 안다고 할 수 없지만 그렇다고 모르지 않는다. 긴 사춘기의 터널을 지나면서 나 역시 고통스러운 시간이 있었으니까.


  아이가 자해를 하는 것을 알면 부모의 입장에서, 교사의 입장에서 당황스럽다. 모르고 지나가기도 하지만 알게 되었을 때 어찌 대처해야 할까. 어설픈 공감은 반감을 불러오고 어른의 권위적인 잣대는 마음을 닫게 한다. 아는 척을 해야 하는 것인가 아니면 그냥 모르는 척 두는 것이 맞는가. 상황마다 다르고 자해하는 이유마다 대처방법은 다르겠지만 보이는데 모르는 척은 하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처음에는 짠했다. 왜 저렇게까지 할까 싶어서 마음이 아팠다. 아이를 안아주면서 함께 울기도 하고 상처는 못 본 척하면서 사는 게 괜찮냐고 괜한 안부를  묻기도 한다. 처음에 아이는 아무 일 없다고 한다. 하지만 상처를 보았다는 것을 알면 아이는 운다. 하염없이 울다가 이야기를 하기도 하고 그냥 울기만 할 때가 있다. 그런 아이를 처음 보았을 땐 감히 아는 척할 수 없었다. 두려웠다. 어떤 이 나올지 몰라서 그리고 그다음에 무슨 이야기를 해주어야 하는지를 몰라 물을 수 없었다. 누군가의 고통을 재단할 수 없고 그 상황을 다 알 수 없기에 오히려 망설였다. 다만 가만히 안아주었다. 그러나 안타깝게 자해는 반복된다. 상처가 나을 때쯤 다시 한번 상처를 만든다. 주기가 짧아진다. 그냥 몇 번 하다 그만하는 경우도 있지만 지속적으로 하는 경우도 있다. 기분이 한없이 가라앉을 때마다, 감정이 요동칠 때마다,  처음에는 가볍게 그리고 점점 날카롭게 상처를 낸다. 습관이 된다. 그게 무섭다. 자해를 반복하면서 작은 고통에 익숙해지면 되려 자살하지 않을까 싶다가도 되려 충동적으로 자살할 수도 있지 않을까 싶어서 두렵다. 그렇다면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어느 순간부터 마음을 단단하게 먹는다. 그리고 자해하는 아이를 만나면 단도직입적으로 묻는다. 자해의 상처가 맞냐고, 자해했냐고 묻는다. 감정의 동요 없이 묻는다. 이유도 묻는다. 한참 들어준다. 언제 들어도 아이의 아픔이 고스란히 전해진다. 그래서 아프고 나 역시 고통스럽다. 다른 방법을 찾아보자고 하며 대화를 마무리한다. 그러나 번복되는 상처를 보면 모질게 말할 준비를 한다. 그것으로 네 삶이 나아졌냐고, 고통이 잊혔냐고 묻는다. 그냥 말로 아프다 해도 안아주고 같이 아파해줄 수 있다고 단호하게 말한다. 자기 위안의 방법으로 옳지 않다고 차라리 미운 누군가를 저주하는 것이 나을지 모르겠다고도 한다. 그렇게 모질게 말하는 이유를 아는 아이는 오열하기도 한다. 뭘 안다고 그런 말을 하냐고 감정을 쏟아낸다. 되려 감정을 쏟아내는 것이 아이가 살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렇게라도 쌓인 감정을 소진하면 조금은 낫지 않겠는가. 그렇게 말하는 것이 쉽지 않다. 아니 사실 고통스럽다. 그러나 자해를 조금이라도 덜 할 수 있다면, 울어서 감정을 소진하고 소모하여 괜찮아질 수 있다면 그 정도는 감수할 수 있다. 솔직하게, 적나라하게 이야기하고 나면 아이는 조금은 괜찮아진 것 같아 보인다. 그래도 같이 아파해주는 사람이 있음을 알게 된 것 같다.


  그럼에도 뭐가 옳은 방법인지 아직도 모르겠다. 정답이 없어서 어렵다. 자해를 하는 아이가 스스로를 마주하고 그러는 이유를 찾다 보면 습관적으로 하지 않으리라 생각하고 싶은 것도 나의 희망사항뿐일지 모른다. 모르는 척하는 것이 더 나으려나 늘 고민이 된다. 그럼에도 피하지 않는 것은 아이에게 알려주고 싶은 마음 때문이다. 너를 봐주는 누군가가 곁에 있음을 그러니 자신을 덜 미워하길, 아파하길 바라는 진심을 잔뜩 담아 건넨다.

작가의 이전글 아이들의 연애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