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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름달 Sep 11. 2023

그건 니 생각이고

각자 다른 방법으로 자기 삶을 살아간다.

내가 너로 살아봤냐 아니잖아            
네가 나로 살아봤냐 아니잖아
걔네가 너로 살아봤냐 아니잖아         
아니면 니가 걔네로 살아봤냐 아니잖아
아니잖아 아니잖아 어? 어?               
그냥 니 갈 길 가
이 사람 저 사람  이러쿵저러쿵         
뭐라 뭐라 뭐라 뭐라 뭐라 뭐라 해도     
상관 말고 그냥 니 갈 길 가
미주알고주알 친절히 설명을            
조곤 조곤 조곤 조곤조곤 조곤 해도
못 알아들으면 이렇게 말해버려         
그건 네 생각이고                            
아니 그건 니 생각이고  

장기하의 <그건 니 생각이고> 가사 중에서


  젊음의 투지로 불타오를 때 어떤 일에 대해서 늘 옳고 그름을 논했다. 모 아니면 도를 외치는 성격 급한 나에게 중간지점은 없었다. 좋다 싫다도 확실하게 이야기하는 것을 좋아하고 이쪽 아니면 저쪽을 선택하는 사람을 도리어 편하게 생각했다. 특히, 모호한 언행을 보일 때는 언제든지 태세전환을 쉽게 하기 위한 방법이라고 비난하기도 했다. 흑백논리가 최고조에 달했을 때는 보이는 것도 들리는 것도 없었다. 딱히 잘난 것도 없는데 뭘 그리 자신했던 것일까. 내가 틀릴 수 있음을 깨닫고 인정하게 되면서 그동안 세웠던 틀이 깡그리 무너져 내렸다. 산산조각이 나면서 조금은 유연해졌다. 사실 얼마 되지 않았기에 심히 부끄럽다.


  백 사람이 있으면 백 개의 사연이 있다고 한다. 같은 공간에서 지내는 가족도 나와 다르다. 지향하는 방향이나 기본적인 생각, 삶에 대한 태도는 비슷하고 서로 물들어가지만 완벽하게 '나'를 이해해 주길 바라는 것은 욕심이다. 곁에서 함께 걸어주고 비를 맞아줄 수 있지만 나의 모든 것을 고스란히 느끼지 못하는 것은 당연하다. 가족도 그러한데 다른 사람들은 오죽할까. 내가 그로 살아보지 않고 그가 나로 살아보지 않았는데 어떻게 알 수 있을까. 그럼에도 자신의 입장에 서서 '상식'을 논하고 '기본'을 이야기한다. 자신의  생각이 옳다고 들이민다. 쉽게 조언을 하고 충고를 하거나 평가하고 비난한다.

언제부터인지 나 아닌 다른 사람을 이해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마음이 든다. 이해하고자 온갖 사정과 상황을 덧붙여서 생각하지만 당사자가 아니고도 그 마음을 그대로 느끼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 어쩌면 공감이라는 것도 사실 불가능한 것이리라. 그동안 어줍지 않은 그 많은 말들로 상대를 가늠하려 하고 위로하고자 하는 마음이 닿기에 한참 부족하다 못해 폼만 그득한 말로 들리지 않았을까 걱정이 된다. 그냥 옆에 있어주기만 해도 되는데 어설픈 위로와 조언들이 상대 마음을 파고들어 가 되려 더 상처를 후벼 파는 무기가 되어버렸을까 봐 겁난다.


  같은 일이라 해도 사람마다 느껴지는 온도가 다르다. 내가 그 사람이 아닌 이상 그 온도를 "짐작"만 할 뿐이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다. 그럼에도 경험이 많다는 이유로 감히 넘겨짚을 때가 많다. 그것도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이다. 딴에는 공감해 주고 도움이 되는 이야기를 해주고자 하는 의도이지만 의도는 의도일 뿐 상대에게 상처 주는 일이 많다. 그렇다고 상대방을 나 몰라라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정혜신박사는 무조건적인 공감이 '심리적 CPR'이라 했다. 상대로 살지 않았는데 어떻게 무조건적인 공감을 할 수 있는지에 대해 의구심이 들었다. 고개를 끄덕여주면서 맞장구쳐주는 것은 그냥 대충 듣고 넘기고자 하는 수작 같아 보이기도 한다.

  그런데 어느 순간, 난 왜 꼭 상대를 이해하려고 노력할까라는 마음이 생겼다. 아무리 나의 경험을 박박 끌어와도 느끼고 생각하는 것이 다른데 왜 이해하고자 했을까. 그런 노력이 '공감'이라 생각한 것은 아니었는지 돌아보았다. 사실 이해할 필요 없이 보이는 대로 들리는 대로 받아들이기만 하면 되었다. 부정하지 않고. 생각하고 말고도 없다. 그냥 그 사람 자체로 '인정'하면 비난도 조언도  필요하지 않다. 어쩜 우리 사회에서 필요한 것은 무조건적인 공감이 아니라 무조건적인 수용인 것이 아닐까.


  가수 장기하의 노래를 듣고 사이다라는 사람이 많다. 그만큼 그동안 다른 사람의 참견과 간섭에 상처받으며 지친 것이 아닐까. 나와 "다르다"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은 쉽지 않다. 아무래로 닮은 쪽이 끌리고, 익숙한 것을 이해하는 것은 인간의 본성이다. 나이와도 상관없다. 늙은 사람만 조언을 하는 것이 아니니까 말이다. 물론 젊은 사람들은 자기와 다른 이들을 보며 조언이나 충고 대신 외면의 길을 더 많이 선택하니, 방법이야 어떻든 결과는 피장파장이다.

  자기 기준에서 서로를 이해하고자 하고 돕고자 하니 문제가 되는 것이다. 그냥 좀 다르더라도 인정하면 문제가 생기지 않는다. 그 사람을 낱낱이 해부하면서 해석하고 평가하기보다 그 자체로 봐주면 된다. 불의를 참자는 것은 아니다. 어떤 일을 향해 달려갈 때 목적에 도달하기 위해 자신만의 방법으로 가는 것을 인정하자는 것이다. 한 마음이 된다는 것은 그런 것이 아닐까. 모든 것을 통일해서 최선의 방법을 정해서 가는 것이 아니라 선한 목적이 달성되기 위해 나아가되 각자의 방법으로 목소리를 내고 움직이는 것이 더 끈질긴 생명력을 갖게 되지 않을까.  


  우리는 제 각기 자신만의 방식으로 삶을 꾸려가고 있다. 방법도 다르고 생각도 다르다. 나이를 먹을수록 '정답'이 없음을 깨닫는다. 많은 생각을 하고 이야기를 나누면서 선한 목적을 향해 가고 있다면 서로 그 방법이 다를지라도 인정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절실한 요즘이다. 내가 틀릴 수 있음을 감안한다면 상대를 비난하기 어려워진다. 내가 항상 맞는 것이 아님을 기억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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