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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름달 Mar 08. 2023

용서의 몫

미안해라는 말에 괜찮아라고 하지 않아도 된다.

  우리 집에는 개와 고양이가 산다. 성향이 정말 다르고 나이 차이도 없는 두 딸이 개와 고양이처럼 많이 치열하게 그리고 자주 싸운다. 얼굴만 마주하면 으르렁 거리는 소리가 절로 나는 듯하다. 하루에 한 번 아니 한 시간에 한번 이상 싸우지 않으면 입안에 가시가 돋나 보다. 많이 컸는데도 지금도 그렇다. 저녁식탁에서 개그프로그램에서 인간다큐로 넘어갔다가 다시 동물의 왕국으로 찍는 것이 정해진 수순 같다. 괴롭고 시끄럽지만 웃기기도 하고 이게 사는 낙 인지도 모른다. 결국 마무리는 나의 분노 섞인 한마디를 시작으로 미안해-괜찮아로 끝이 난다.


  두 아이가 유치원을 다닐 무렵, 정말이지 꽤나 지겹게 들었던 두 마디 “미안해-괜찮아.”가  지금도 음성지원되는 것 같다. 1학년 아이들에게도 어떤 일이 있거나 “미안해-괜찮아.”은 국룰과 같다. 다툼이나 놀림이 있어 부르면 잘못한 아이가 한 손으로 상대의 어깨를 두드리거나 쓸어내리면서 “미안해.”라고 한다. 그러면 사과받은 아이는 아직 해소가 되지 않고 분이 풀리지 않아도 울먹이면서 “괜찮아.” 한다. 이것으로 모든 사건은 종결된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인가 의문이 생겼다. 진짜 미안한가? 사과를 받으면 진짜 괜찮은가? 물론 나이가 어릴 때 소소하게 싸우거나 깊게 상처받지 않을 때 “미안해.”라는 말로 해결되는 마음은 있다. “미안해”는 그만큼 큰 힘을 가지고 있는 말이기는 하다. 저학년 교과서에서 “미안해.”라는 사과에 응답하는 말로 “괜찮아.” 로 가르치는 것도 아마 그렇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살다 보니 사과를 받아도 괜찮지 않은 일이 꽤 많다. 사과의 진정성이 느껴지지 않거나 미안하다고 하고도 같은 일을 반복할 때, 아직 사과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지 않았는데 사과한 사람은 할 일을 끝낸 양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갈 때, 진심으로 사과를 했음에도 내 안에서 풀리지 않고 용서가 되지 않을 때도 많다. 어떤 사람들은 말한다.


  “미워하면 너만 힘들어.” /“빨리 용서하고 잊는 편이 좋지 않아?!”/ “결국 용서는 너 자신을 위한 거야.”


마치 용서를 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다. 용서를 못하는 내가 옹졸해 보인다. 사람을 미워하는 것 자체가 잘못된 것 같아 죄책감이 느껴진다. 왜 상처받은 사람이, 피해 입은 사람이 더 아파야 하는 것일까. 잘못한 사람이 사과를 하는 것은 당연한 것을 넘어선 의무이다. 그렇지만 그로 인해 피해를 받은 사람이 상대를 용서하는 것은 온전히 그 사람의 몫이 아닌가. 미안하다는 한 마디에 녹을 일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일도 많다. 우리 사회에서의 여러 얼굴들의 폭력들을 비롯하여 가족 간의 쌓인 미움과 원망은 쉬이 용서가 되지도 잊히지도 않는데 자꾸 용서를 하라고 은근한 강요를 할 때가 있다. 용서를 하지 못하는 것에 대해 또 상처를 받아야 하는가. 용서할 수 있다는 것은 그들이 그렇게밖에 할 수 없었던 상황과 배경 그리고 그들의 말과 행동이 이해되고 수용될 수 있다는 것이 아닌가. 나는 아직 이해할 수 없고, 피가 철철 흐르는 것처럼 아픈데 아무렇지 않게 잘 살고 있어 보이는 그들을 어떻게 이해하고 받아들여야 하는가.

학원을 다니는 큰 딸이 우울하고 낮은 목소리로 전화할 때가 있다. 학원가에서 중학교시절 학폭 가해자였던 아이를 우연히 보았을 때 다시 중학교 때로 소환되어 가슴이 쿵 내려앉는다고 한다. 그런 아이와 통화하면서 나는 벼랑 끝에 몰린 듯 불안해진다. 꽤 오래 전인 듯 하지만 그때의 악몽이, 그 당시 아이의 아픔이 어제일처럼 생생하게 떠오른다. 용서하지 않아서 그렇다고? 그럴 수도 있겠다. 하지만 어떻게 용서해야 하는지 모르겠다. 6개월이 넘게 아이는 학교에서 밥을 먹지 못했고 말 한마디를 하지 못했다. 자신감을 잃어 중학교 내내 친구를 사귈 엄두를 내지 못하고 한없이 웅크렸고 자기만의 세계로 숨어 들어갔다. 동생이 친구와 노는 모습을 보며 조용히 눈물을 흘리고 자의식이 강해져서 외부 사람과 눈을 마주치지 못하였다. 상대는 별로 미안해하지 않았고 오히려 자신들이 피해를 입었다 했다. 그런데 용서를 했어야 했을까. 나는 죽어도 아이에게 용서하라는 말을 할 수 없었다.  그냥 한없이 미워해도 되고, 저주해도 된다고, 다만 너를 잃지 말라고 했다. 그들을 미워하면서 스스로 그 속에 빨려 들어가지 않으면 되는 것이 아닌가. 사실 난 그들도 그런 일을 똑같이 겪길 진심으로 바랐는지 모른다. 나쁘다고 말할지 모르겠지만 그랬다. 지금은 아이도 나도 마주치지 않으면 별로 떠오르지 않을 만큼 바닥으로 가라앉아버렸지만 용서를 입에 담지 않는다. 용서하느냐고 너무 애쓰고 마음 쓰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더 글로리>에서처럼 복수하느냐고 인생을 소진하는 것은 말리고 싶지만(사실 오죽하면 그럴까 싶다.) 굳이 자기의 마음과 시간을 써가면서까지 용서하라고 하고 싶지 않다. 나 역시 내 인생에 용서하지 못한 몇몇 사람은 불쑥 생각나면 마음으로 실컷 욕하고 글로 증오심을 담아낸다. 그러면서 상처받은 나를 지켜낸다.


  미안하다는 말은 중요하다. 하지만 그 안에 얼마나 진심을 담아내고 있는가 고민해야 한다. 그리고 상대에게 괜찮음을 강조하지 말아야 한다. 사과를 받고 괜찮을 수도 있지만 아닐 수도 있다. 괜찮다고 말하라고 하는 것은 마치 괜찮지 않은 것이 이상한 것이라는 묘한 죄책감을 안겨주기 때문이다. 용서를 구할 수는 있지만 당연한 것처럼 요구하거나 강요하지 말아야 한다. 이런 마음은 1년 동안 한 교실에서 지내면서 아이들 사이를 중재할 때 드러난다. 상황에 따라 차분하게 이야기를 나누기도 하지만 어떨 때는 나도 모르게 울분에 차서 말할 때도 있다. 피해받은 아이의 마음을 120% 공감하면서 마치 내가 상처받은 것처럼 강하게 화를 뿜어낸다. 사과를 하게 하되 사과받은 아이가 “괜찮아.”라는 말을 하기 전에 먼저 말한다.


  “괜찮지 않으면 괜찮다고 말하지 않아도 돼. 미안하다는 말에 풀리면 좋지만 그렇지 않아도 네 잘못이 아니야. 네 마음을 들여다봐.”


사건에 따라 성향에 따라 어떤 아이는 금방 사과받은 것만으로도 괜찮다고 하고 어떤 아이는 아직 마음이 풀리지 않는다고 답해준다. 교실에서 이런 해결방법은 좋지 않다. 쉽게 넘어가지 않고 시간과 마음을 들여야 하기 때문이다. 사과하고 금방 받아들이는 것으로 “쾅쾅” 판사봉을 두드리면서 사건종결을 외치면 빠르게 해결된다. 그러나 쉽사리 끝내 또 같은 일을 재생하게 하고 싶지 않다. 미안하다면 같은 행동과 말을 다시 하지 않는다는 다짐을 바탕으로 해야 한다고 말한다. 사과를 받지 않는다면 더 미안해해야 하며 그 사람 마음이 풀릴 때까지 기다려야 하는 것이 당연하다. 어떤 일은 용서받지 못한 채 미움과 원망을 계속 받을 수도 있다. 그것도 가해자의 몫이다. 상처가 깊다는 것은 상대에게 하지 말아야 행동과 말을 깊게 또는 여러 번 했다는 것이지 않을까. 그러니 본인이 감당해야 하는 것이 당연하다.


  초등학생은 아직 어리기에 순수하고 유연하다. 그래서 어쩌면 “미안해-괜찮아.” 공식이 통하는 것이 당연할 수 있다. 그리고 진심을 담아 사과하는 법과 상대를 이해하고 용서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한 번의 잘못으로 낙인찍히거나 미움의 대상이 되는 것은 옳지 않다. 그래서 어른의 입장에서 미안하다고 말하는 상대를 용서하지 않아도 괜찮다고 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도 안다. 그럼에도 난 잘못을 저지른 것에 대해 죄책감을 느끼길 원한다. 죄책감을 느껴 진심으로 미안해하고 다시는 그 행동과 말을 하지 않도록 신중을 기하기를 바란다. 형식적인 사과는 상대에게 피해 주고 상처 주는 일을 반복하게 한다. 미안하지 않지만 일의 해결을 위해 미안하다고 말하고 땡! 하게 한다. 이런 부분들이 아이를 괴물로 만드는 것이 아닐까. 아이를 위해 부모가 변명을 해주고 잘못을 감싸주고 더 이상의 미움을 받지 않게 하는 노력들이 다른 사람을 아프게 하고도 무감각하게 미안한 일이 없다고 말할 수 있는 괴물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진심으로 미안하다면 용서가 당연하다고 생각하지 않아야 한다. 주변에서 더 이상은 피해자를 위한다는 명목으로 용서하라고, 잊으라고 말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충분히 분노하고 화를 내도 괜찮다고 말해주는 것이 더 나을 수 있다. 용서는 할 수도 있고 못할 수도 있다. 다만 미움에 스스로 잠식당하지 않으면 된다. 자기를 미워하지 않거나 원망하지 말고 한이 쌓이지 않도록 상대를 미워하고 그 사람의 잘못을 탓하고 토로해도 괜찮다.


  용서, 할 수 있으면 좋다. 그러나 본인이 괴로우면서까지 할 필요는 없다. 물론 시간이 흐르고 상대가 진짜 미안해하는 모습에 마음이 풀린다면, 용서해 주고 다시 같이 잘 지내는 것, 좋다. 그러나 주변에서 더 이상 용서를 강요하거나 은근히 요구하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사실 그렇게 하지 않아도 아이들은 한 공간에서 함께 지내면서 서로를 쉽게 받아들이고 그래서 쉽게 용서해주기도 한다. 마음이 풀리지 않으면 굳이 괜찮다고 하지 않아도 된다는 나의 말을 들으면서 이미 위로를 받고 한번 더 사과하는 아이에게 기회를 주는 아이들을 본다. 죄책감을 느껴 진심을 다해 사과하는 아이와 그런 상대를 용서하게 되는 아이가 자라면 서로를 존중할 수 있는 사회를 만들어가는 어른이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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