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보름달 Mar 06. 2023

아이의 꼬리표

어른의 라벨링이 아이를 나아가지 못하게 한다. 

  아이를 키우다 보면 누구보다 내 아이를 잘 아는 것 같다. 왜 아니겠는가. 많은 시간을 함께하고 여러 일을 겪었기에 우리 아이를 다 아는 것 같을 때가 있다. 많은 부분에 있어 당연히 부모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그런 아이를 부모가 어찌 모르겠는가. 그렇지만 내가 안다고 생각하는 순간, 깨지기도 한다. 다른 공간, 다른 사람들과 함께 할 때 보이는 아이의 모습은 조금 다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다른 어른과 혹은 또래 아이들과 함께 할 때, 숨겨왔던 모습이나 본능적인 욕구를 드러내는 경우도 있다. 우리 집 딸들만 봐도 그렇다. 집에서는 여과 없이 똘끼를 시전 하는 큰 아이가 학교에서는 모범생이고 다른 어른들 앞에서는 예의가 바르다. 여러 가지 모습이 모두 다 그 아이겠지 싶으면서도 한때는 안과 밖의 모습이 같지 않음이 답답했던 적도 있다. 반면 사람을 좋아하는 둘째는 집에서나 학교에서나 명랑 쾌활 그 자체다. 공개수업을 보러 갔는데 뒤에 누가 있거나 없거나 신경 쓰지 않고 옆 친구랑 수다 떨고 장난하는 모습에 부끄러워 얼굴이 빨개진 적도 있다. 아이를 키우면서 누군가 아이에 대해 물으면 대답을 망설이게 된다. 내가 아는 아이가 그 아이의 전부가 아니라서 망설이고, 혹시나 내가 그 아이에게 꼬리표를 달아주는 것은 아닌가 싶어 걱정이 된다. 그래서 최대한 긍정적인 표현을 사용하기도 하고 평가적 언어를 배제하려고 노력한다. 친한 사람들에게는 우리 아이가 어떻다는 단정적인 표현보다 아이가 한 일, 내가 본 아이의 행동 즉 사실적인 부분을 말하게 된다. 


  저학년을 오래 하다 보면 부모가 아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표현에서 보인다. 특히 아이 앞에서 부모가 어떤 말을 하는지에 대해 주목하게 된다. 어떤 부분에 있어서 부모는 아이의 행동과 말을 대변해 준다. 


"우리 아이가 쑥스러움을 많이 타요." / "우리 아이가 낯을 가려서 인사를 잘 못해요." / "낯선 곳에 있으면 궁금한 것이 많아서 돌아다녀요." / "우리 아이는 마음이 여려서 잘 울어요."


아이의 부족함을 덮어주고 싶은 것이 부모 마음이라는 것을 너무도 잘 안다. 아이의 행동을 이해시키고 싶었으리라는 것도 이해한다. 잘하는 행동에 대한 설명이기보다 민망한 상황이 연출될 때 아이에 대해 설명하는 부모의 말은 말로 와닿기보다 마음으로 와닿는다. 안쓰러움과 걱정스러움, 불안 그리고 답답함마저도 느껴진다. 끊임없이 교육을 하는데도 불구하고 쉬이 바뀌지 않고 변하지 않는 모습에 그 아이의 성향인가 싶기도 할 것이고 나름의 이유도 찾아보았을 것이라 짐작된다. 왜 아니겠는가. 나 역시 생일이 12월 끝자락에 걸쳐있는 작았던 둘째가 다른 아이의 손가락을 물었을 때 상대 부모에게 사과하고 또 사과하면서도 내심 너무 작고 여려서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한 방법이 무는 것이었을 거라 생각했다. 계속되는 그 행동에 한번 날 잡아서 호되게 혼내고 나니 그런 행동이 사라졌다. 작은 아이에 대한 안쓰러움은 이해하고 싶은 욕구로 남아 여지를 주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이해되지 않는 아이의 행동을 이해하고 안아주고 싶은 것이 부모일 것이다. 안다. 그래서 나는 내가 만나는 부모들에게 부탁한다. 아이 앞에서 아이의 성향을 평가하는 말은 조심해야 한다고. 아이가 그 말속에 숨어버리고 그 평가를 방패 삼고 스스로의 성향을 그렇게 믿어버릴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부끄러워서 인사를 못한다는 말에 아이는 더 이상 애써 인사를 하지 않아도 되는 방패를 얻는다. 여려서 혹은 예민해서 잘 운다는 말에 아이는 울어도 된다는 허락을 얻는다. 그래서 당황하거나 속상하면 해결해보려 하지 않고 참아보지 않고 눈물부터 보인다. 그것이 당연한 것처럼 말이다. 물론 성향일 수도 있고, 기질일 수도 있다. 그럼에도 해야 하고 지켜야 하는 부분을 강조하다 보면 아이는 기본적인 태도를 만들어가는 힘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꼬리표가 없는 아이는 크면서 자기를 이런 사람이 야하고 틀 안에 갇히기보다 탐구하고 알아가면서 스스로를 찾아가고 또 삶의 방향을 정해 간다.  


  아이는 오묘한 존재이다. 내 마음대로 가장 안 되는 것이 자식이기도 하며 커가면서 큰 깨달음을 주고 스스로를 돌아보게 하는 것도 자식이다. 도를 닦아야 하고, 나를 돌아보고, 행동과 말에 신중함을 거하게 되는 것이 아이를 낳은 부모의 숙명일지 모른다. 아이의 성장하는 속도를 따라가기 힘들다. 많이 깨지면서, 많이 뒹굴면서, 아프면서 아이와 함께 크는 것만으로도 고마워해야 할지 모른다. 좋은 어른이 되고 싶은 것도 어쩌면 아이들이 있기 때문일지 모른다. 어른으로 아이 위에 군림한다면, 유연한 존재가 아니라 당연히 존중받아야 하는 존재로 서있다면 어쩜 아이와 함께 살아가고 마음을 나누는 데 있어 이미 실패한 것인지 모른다. 아이는 아직 배워야 할 것이 많지만 나보다 더 좋은 에너지를 가지고 있으며 나보다 더 큰 힘을 가지고 있음을 인정하고 믿어주어야 한다. 나보다 더 빛날 것을 믿는다는 것은 내가 함부로 아이를 라벨링 할 수 없음을 의미한다. 우리 아이는 이래요, 저래요 하면서 이해를 바라는 것도 옳지 않을 수 있다. 아이가 자신의 성향을 존중받고 이해받기 위해서는 먼저 지켜야 할 것을 지켜가면서 마음을 나누는 방법을 익혀가게 도와야 한다. 함께 어우러져 살기 위해 서로를 존중하기 위해 필요한다. 어느 아이에게나 그럴 힘이 있다. 부모가 대신 나서거나 말해주지 않으면서 아이에게 함께 살아가기 위한 기본자세를 알려주고 기다려준다면 아이는 성장할 것이다. 

 

  우리는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아이에게 꼬리표를 달아주기도 한다. 말로 하지 않더라도 마음에서 우러난 시선으로 우리는 이미 아이에 대해 판단하고 평가하고 있을지 모른다. 아이는 그 속이 안전할 거라 믿고 숨어들 수도 있고 그게 진짜 자기라고 믿어버릴 수도 있다. 그렇게 두지 말아야 한다. 이미 꼬리표가 달려있다면 떼어주어야 하고 더 이상은 우리 아이에 대해 라벨링을 하지 말아야 한다. 아이의 가능성을 믿고 스스로 찾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나 역시 아직도 나를 찾아가고 있다. 다른 사람이 아는 "나", 내가 알고 있는 "나"는 진짜 "나"이기보다 사회화로 만들어진 나일 수 있기에 자꾸 돌아보고 들여다보면서 찾아가고 있다. 아이도 그럴 수 있도록 곁에서 지켜봐 주어야 하지 않을까. 스스로를 만나면서 진짜 자기 성향을 알아가면서 나아갈 길을 도모하게 해야 하지 않을까. 

작가의 이전글 반갑다, 친구야.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