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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름달 Mar 22. 2023

진심을 받을 수 있는 마음

상대의 마음을 받는 것은 선택이겠지만 받을수록 커지는 것은 분명하다.

  교실에서 만나는 아이들은 진짜 다양하다. 3월 초에 만나 “내 새끼”로 안고 가고자 꽤 많은 정성을 들인다. 진심을 다해서 말이다. 어떤 녀석은 발칙하게 혹은 귀엽게도 “내 새끼” 안 하고 옆반 선생님 새끼가 되길 자청하기도 하지만 괜찮다. 내 첫인상이 별로 좋지 않았을 것이고 엄해 보였으리라 이해하면서 달랬다. 그런 녀석들은 순수해서 나의 진심을 알고 곧 나의 편이 되리라는 것을 안다. 사실 개학 첫날,  아이들이 반에 들어오는 순간, 굉장히 설레고 두근거린다. 일 년을 함께 하면서 우리는 얼마나 많은 감정들을 주고받으며 마음을 나눌까 하는 기대감에 부푼다. 그래서 기본 예의를 강조하면서도 몰래몰래 그 아이만의 강점, 매력을 찾아본다. 어른도 그렇겠지만 아이는 그 아이만의 사랑스러움을 가지고 있다. 이상하게 난 어른보다는 아이의 사랑스러움을 더 쉽게 찾고 크게 볼 수 있다. 겉으로 드러나는 아이도 있지만, 잘 보아야만 보이는 아이도 있다. 장난꾸러기도 반항기를 가지고 있는 녀석도, 말없는 녀석도 다 저마다 매력이 있다. 다른 사람은 쉽게 찾을 수 없다고 생각되는 매력포인트를 찾고 나면 마치 산삼을 발견한 듯 "심봤다."를 외치고 싶다. 행복하다. 학기 초를 그렇게 시작한다.


  일주일이 지나고 또 시간이 흐르면서 아이들과 호흡이 맞아 들어가는 것을 느낀다. 함께 호흡하는 것, 나는 그것을 수업이라 부른다. 일방적인 가르침은 아이도 나도 즐겁지 않다. 한 공간에서 함께 숨을 쉬고 마음을 주고받았을 때, 단순한 지식 습득을 넘어서 신뢰감을 바탕으로 한 배움을 서로 주고받게 된다. 이는 내가 추구하는 바이기는 하지만 반 아이들 모두와 가능하지 않아서 슬프기도 하다. 아무리 많이 보여 주고 진심을 주려 애써도 받지 못하는 아이가 간혹 있다. 주는 마음 그대로 다 튕겨져 나온다. 그럴 때는 안타깝다. 주고자 하는 마음이 상처투성이가 될 때도 있다. 주는 정성과 마음을 꿀꺽 받아 더 많은 것을 받아가는 아이와 다르게 그렇지 않은 아이는 나와 있는 것이 불편해 보인다. 때론 더 많이 신경 쓰고 더 많은 양의 사랑을 건네도 소용이 없다. 받지 못하는 아이에 대해 고민하게 된다. 억지로 떠 안겨줄 수 없다. 왜 이런 차이가 날까. 어디서부터가 다를까.


  나 역시 누군가에게 받는 것은 어려워한다. 예민하고 내향적이어서 쉽게 마음을 열지 못했고 다른 사람의 호의가 늘 부담스럽기만 했다. 어쩌면 어렸을 때 겪었던 어른들의 부정적인 시선에 이미 난 “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으로 스스로를 낙인찍었을지도 모른다. 수많은 차별과 편견의 시선 속에서 당당해지고 싶었고 그래서 더 독립적으로 살려했다. 하고 싶은 모든 말들을 마음에 담았다. 순수한 호의와 도움의 손길도 부담스러워서 스스로 할 수 있다고 끙끙 앓면서까지 해내었다. 그때의 나는 다른 사람의 도움을 잘 받아들이는 것도 하나의 좋은 성품이나 능력이라는 것을 몰랐다. 도움을 잘 받지 못하는 모습을 잘난척한다고, 빡빡하다고 오해받을 수 있다는 것도 몰랐다. 딸들도 나의 영향을 받아 받는 것을 어색하고 부담스러워한다. 반면 어느 누구에게나 대가를 바라지 않고 도와주는 것은 잘한다. 물질적인 것뿐 아니라 어떤 부분에서는 감정적인 부분까혼자 감당하려는 것조차 내게 배워가는 모습에 화들짝 놀랐다. 저러다가 다른 사람의 진심이나 마음도 잘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 염려되기 시작되었다. 그래서 돌아보게 되었다. 딸들에게 진심으로 대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잘 받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에 대해 말해주었다. 나 역시 잘 받아보려고 노력하였다.

아직도 호의나 도움을 받고 나면 너무도 고맙고 미안해서 안절부절못하는 나를 가라앉히는 것은 쉽지 않다. 조금씩 익숙해지겠지 한다. 그러면서 딸들에게 다른 사람의 도움, 그 마음을 감사하게 받으라고 말한다, 지금 고마운 마음을 잘 받고 기억해서 다른 누군가에 잘 줄 수 있다면 서로 나눌 수 있는 것이 커진다는 것을 느끼는 것 같다. 고마움을 잊지 않고 도울 일이 있을 때 기꺼이 도와주면 되고 진심을 전하면 되지 않을까. 사람은 나이를 먹는다고 다 아는 것은 아닌 것은 확실하다. 아이들을 만나면서 고민하면서 배우고 바꾸려고 노력하면서 그렇게 성장하나 보다.


  만나는 아이들에게 늘 말한다. 너희가 이 교실에 들어선 순간 선생님에게 너희는 이미 사랑스럽고 지켜내야 하고 많은 것을 주고 싶은 ‘내 새끼’라고. 다만 선생님이 아무리 많은 진심을 준다 해도 너희가 받지 못하고 믿지 못하면 전해지지 못한 채 허공으로 날아가버린다고, 우리 마음을 열고 서로를 대했으면 좋겠다고 한다. 잘 받는 사람은 더 많이 받을 수도 있지만 다른 사람을 진심으로 대하는 법을 알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세상은 혼자 살아갈 수 없다. 도움받는 것을 여전히 부담스러워하지만 혼자 해결해 나갈 수 없는 일이 세상에는 너무 많다. 내가 손을 내밀기 전에 이미 나를 도와주는 사람이, 지지해 주고 응원해 주는 사람이 많음을 알고 얼마나 큰 위로를 받는지 모른다. 그분들 덕분에 나는 아직 이 자리에서 잘 버티고 있다는 것을 알기에 감사하다. 삶이 팍팍할 때는 몰랐다. 열심히 살면 되는 줄 알았고 내 힘으로 살아왔다고 생각했으나 아니었다. “더 글로리” 문동은의 말이 정말 맞다.


“한때는 그런 생각을 했어요. 누가 됐든 뭐가 됐든 날 좀 도와줬다면 어땠을까. 그렇게 열여덟 번의 봄이 지났고 이제야 깨닫습니다. 저에게도 좋은 어른들이 있었다는 걸. 친구도 날씨도 신의 개입도요. 그리고 봄에 죽자던 말은 봄에 피자는 말이었다는 걸요.”


  우리 아이들은 나보다 좀 더 빨리 알았으면 좋겠다. 정말 힘든 상황이라 보이지 않을 수 있지만 주변에 좋은 어른들이 있고, 친구도 있고 날씨도 신의 개입도 있다는 것을 말이다. 그러면 더 밝고 명랑하게 자라서 본인 역시 누군가에게 좋은 어른이 되어주고 친구가 되어주지 않을까. 그래서 아이들에게 진심을 툭 건네면서 진심 그대로를 받아 더 크게 피어날 수 있게 돕고 싶다. 진심이 거부당했을 때의 아픔은 온전히 내 몫이지만 진심을 받아들이지 못해 세상 사람들에 대한 신뢰를 갖지 못하는 것은 받아들이지 못하는 아이의 삶이 얼마나 팍팍해질 것을 알기에 더 말해주고 싶었나 보다.

  우리는 여러 이유로 상대방의 진심을 왜곡할 때가 있다. 그리고 가끔은 말도 안 되는 자존심을 내세우면서 상대의 마음을 바라볼 때도 있다. 삐딱하게 그리고 나에게 의도적인 피해를 준다는 시선으로 말이다. 상대의 진심을 올곧은 시선으로 바로 볼 수 있는 아이로 자랐으면 좋겠다. 상처 주는 사람도 있겠지만 순수하게 도와주고자 내밀어 주는 손을 기꺼이 잡는 아이로, 어른으로 크면 좋겠다. 그렇게 사람에 대한 신뢰감을 갖고 한 발을 내딛는다면 세상이 조금은 따뜻하게 느껴지지 않을까. 인간미가 흐르는 세상을 만들어가는데 한몫을 하지 않을까 하는 욕심을 가져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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