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갈 곳이 없었다.
2005년 5월
그날은 한 주의 성패가 결정되는, 가장 중요한 토요일이었다.
아침부터 주방은 묘한 긴장과 기대가 뒤섞인 공기로 가득했다.
토요일은 매출이 가장 많이 나오는 날이자, 사장님의 불시점검이 있는 날이기 때문이다.
정갈한 백발과 늘 반듯한 양복차림의 사장님.
여러 매장을 운영하는 재력가라는 얘기는 실장님에게 술자리에서 이미 들었었다.
형들은 일정한 리듬으로 빠르게 칼질을 했고, 실장님은 예민한 눈빛으로
비법 동치미를 담갔다.
나는 그 틈에서 눈치껏 잡일을 도맡았다.
점심시간(12:00 pm)이 시작되면 주문 내역표 알람이
“띵동!~띵동!~띵동!~띵동!”
구급차 사이렌처럼 쉼 없이 울려댔다.
냉면을 뽑고, 떡갈비를 굽고, 불고기를 볶고,
몸은 기계처럼 움직였지만, 머릿속은 점점 멍해져 갔다.
생각은 뒤로 밀려나고, 나는 마치 자동으로 움직이는 그림자 같았다.
2시간이 쏜살같이 지나고, 오후 2시가 되자 주문이 줄어들기 시작했다.
숨을 돌리려는 찰나, 사장님이 주방으로 불쑥 들어오셨다.
그 순간 우리는 모두 굳어버렸다.
그 단단한 실장님조차 유일하게 긴장하는 순간이었다.
동치미 육수를 한 술 떠보신 사장님이 작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간이 잘 맞는구만.”
그 짧은 말 한마디와 함께 매장밖을 나가시자 비로소 긴장이 풀렸다.
동치미는 각 매장의 실장들만 아는 비밀 레시피.
사장님은 그 맛을 무엇보다 중요하게 생각했다.
지난번 간이 맞지 않았을 때 사장님은 웃음기 없는 차가운 표정으로 나지막하게 말했다.
“간이 좀 안 맞는구만.”
그 말 한마디가, 밤새 동치미를 다시 담가야 했던 사장의 무언의 명령이었다.
실장님은 수십 번 맛보며 고민하고 수정해도 답을 못 찾자 결국 전부 버리고,
비밀 노트를 꺼내 처음부터 다시 꼼꼼하고 섬세하게 밤을 꼬박 새워 동치미를 담갔다.
그리고 나 역시 그 옆에서 새벽을 함께 견뎠다.
오후 3시. 푸드코트가 한가해지는 시간.
형 둘이 먼저 1시간 쉬고, 그다음에 실장님과 내가 쉴 차례였다.
주방에는 우리 둘만 남아 있었다.
그때, 실장님의 '여자 사람 친구'가 갑작스럽게 찾아왔다.
평소 술자리에서 자주 얘기하던 짝사랑하는 여성이었다.
실장님은 들뜬 듯 당황했고, 잠시 고민하더니 내게 말했다.
“너 이제 냉면 뽑을 줄 알지? 바로 앞 카페 좀 갔다 올게. 주방 잘 보고 있어!”
그 말만 남기고 실장님은 다급히 그분과 나갔다.
주방에는 나 혼자 덩그러니 남았다.
혼자 주방을 맡아본 건 처음이라 갑자기 심장은 요동치고
손은 미세하게 떨리기 시작했다.
그래도 '40분만 버티면 된다.'
그 생각 하나로 마음을 붙들었다.
오후 3시 이후엔 주문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불길한 예감은 늘 틀리지 않는다.
홀에 가족 단위 손님 두 팀이 들어왔고,
그리고는 정확히 내가 가장 원치 않던 냉면을 주문했다.
물냉 2, 비냉 2, 떡갈비, 불고기...
형들이라면 여유 있게 한 손으로도 만들 양.
그런데 당시의 나는 숨조차 가빠지게 만드는 양이었다.
오픈 주방에서 손님들의 시선은 그대로 내 손에 꽂혔다.
손은 덜덜 떨렸고, 가슴은 쿵쾅대고, 머리는 하얘졌다.
불안이 몸 전체를 뒤덮었다.
냉면은 비비 꼬였고, 떡갈비는 내 속처럼 새까맣게 타버렸다.
엉망진창인 음식들은 모두 버리고 처음부터 다시 만들기
시작했는데 머리가 하얘져서 뭐부터 어떻게 시작해야 될지
몰라서 5초 정도 멍하니 서있다가 문득
'그냥 도망갈까?'
라는 생각까지 했다.
우여곡절 끝에 음식들을 모두 조리한 뒤 주문번호를
당당한 척 떨리는 목소리로 외쳤다.
"000번 손님 음식 나왔습니다~"
혹시 음식에 문제가 있을까, 그 걱정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다행히 손님들은 맛있게 먹고 있었다.
하지만 그때 또다시 주문이 들어왔다.
쟁반냉면 2, 물냉 2.
문제는 쟁반냉면은 내가 한 번도 만들어본 적 없던 메뉴였다.
몸과 마음이 완전히 멈춰버렸다.
나는 1초도 고민하지 않고 실장님에게 전화를 걸었다.
잠시 후 실장님이 매장으로 뛰어들어와
익숙하고 단정한 동작으로 모든 음식을 순식간에 만들어냈다.
그리고 손님에게는 친절하게 말했다.
“맛있게 드시고 좋은 하루 보내세요.”
하지만 손님이 돌아서자 실장님의 얼굴은 돌처럼 굳었다.
그리고 내 얼굴 가까이 다가와 말했다.
“이거 하나도 못하냐? 어휴… 병X 같은 새끼.”
그 말은 날카롭게 내 귀에 꽂혔다.
데이트를 망친 화풀이였다는 걸 지금은 알지만,
그 당시의 나는 너무 어린 마음이었기에 그 말이 매우 뾰족했다.
나는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그리고 속에선 화가 잔뜩 난 목소리가 맴돌았다.
'그냥 지금 앞치마 짚어 던지고 때려치워?'
'내가 여기 말고 일할 곳이 없어?'
'병X새끼? 빡치네 진짜!'
그 이후부터 내 마음속은 부정적인 말들이 끊임없이 팽창했다.
그리고 실장님은 그 뒤로도 형들 앞에서 계속해서 나를 조롱하며 이야기했다.
결국, 참아왔던 말이 조용히 내 입에서 흘러나왔다.
"저 그냥 오늘부로 그만둘게요."
앞치마를 벗고 주방을 나가려고 하자 실장님은 내 뒤통수가 깨질 듯이 외쳤다.
“야! 여기가 네 놀이터야?!”
그리고 내게 달려와 멱살을 잡고 주먹을 들어 올렸다.
형들이 말리지 않았다면 정말 맞았을지도 모른다.
나는 더 이상 버틸 힘이 없었다.
고시원으로 뛰어가 방 안에 눕자마자
오늘 하루가 파도처럼 밀려왔고
세상에 대한 원망과 서러움이 섞인 눈물이 쏟아져 멈추지 않았다.
그렇게 한참을 울고 난 뒤,
차갑고 현실적인 걱정들이 밀려왔다.
'당장 다음 달 고시원비는 어떡하지?'
'월급은 받고 그만뒀어야 되는 거 아니야?'
'아빠도 빚 독촉으로 도망 중이라 돌아갈 집도 없잖아..'
'나 이제 어떡하지..?'
그 당시 나는 비빌 언덕도 기댈 가족도 없었다.
정말 돌아갈 곳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