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반도주

유혹의 신

by 중독작가

2005년 6월의 어느 날.


이제는 제법 익숙해진 냉면집 주방에서 일을 하고 있었다.
한가한 오후 시간, 마침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걸려왔다.
광고 전화겠거니 무심코 전화를 받았다.

전화기 너머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ㅇㅇ 전화 맞죠?"


약 6개월 만에 듣는 아빠의 목소리였다.

아빠는 사업 실패로 여러 문제를 겪고 있었고,
그 일로 가족들은 서로 연락을 끊은 채
뿔뿔이 흩어져 지내고 있었다.


"어? 아빠!?.. 잠깐만, 나 일하는 중이라
이따 바로 다시 전화할게."


나는 실장님께 양해를 구하고 주방을 나와,
조용한 휴게실에서 숨을 고른 뒤 다시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아빠, 별일 없지?
사업 문제는 좀 잘 해결됐어?"


"잘 해결됐으니까 걱정 말고.
요즘은 뭐 하고 지내나?"


"난 잘 지내고 있어. 냉면집 주방에서 요리해~"


"냉면집에서 요리를 한다고!? 아무튼 잘 지낸다니 다행이네.
다름이 아니라 아빠가 이번 여름에
동강에서 래프팅 사업을 준비 중이거든."


"오, 잘됐네!
그전 사업 문제들도 어느 정도 해결된 거야?"


"응, 잘 정리됐고...
아빠가 이번엔 네 도움이 좀 필요할 것 같다."


"응? 내가 뭘 도와주면 되는데?"


"래프팅 가이드 인원이 모자라서 말이야.
여건이 쉽지 않으니까
이번엔 아빠 사업 좀 도와줘라."


"설마 나보고 래프팅 가이드를 하라고!?
그건 체육 전공한 사람들이 하는 거 아니야?"


"너 어릴 때 수영 좀 했잖아.

그 정도면 할 수 있어.
7월 초에 가이드 자격증 시험 있으니까
정리해서 늦지 않게 내려와."


"어... 일단 알겠어.
실장님한테 얘기해 볼게."


"그래... 아빠가 늘 미안하다.
이번엔 꼭 잘해볼 테니까 같이 한번 해보자!"


"알겠어! 말씀드려 보고 다시 전화할게."


전화를 끊고 자리를 오래 비운 터라
서둘러 주방으로 돌아갔다.

그날은 하루 종일 두 가지 선택지 사이에서만
마음을 오가다 주방을 마감했다.


'냉면집에서 계속 일을 하느냐'
'아빠 사업을 돕기 위해 고향으로 내려가느냐'


퇴근 후, 어김없이 실장님과 단골 뼈해장국집에서
소주 한잔을 기울였다.
취기가 조금 오르자,
그동안 꺼내지 못했던 나의 가정사와
오늘 아빠와 나눈 전화 통화 내용을 모두 털어놓았다.

실장님은 오른손에 쥔 소주잔을 만지작거리며
약 5분간 말없이 고민했다.

잠시 후, 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나도 네가 아버지 사업을 돕는 게 맞다고 생각해.
근데 지금 네가 당장 그만두면,
주말이나 바쁜 날엔 주방이 돌아가질 않아.
새 직원이 구해질 때까지만 버티고,
그때 그만두자. 알겠지?"


"네, 실장님.
갑작스러운 연락이라 죄송하고...
말씀하신 대로 하겠습니다."


집으로 돌아와 침대에 누워 계산해 보니,
래프팅 가이드 자격증 시험까지
약 15일밖에 남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다.

그래도 15일이면 충분히 새 직원이 구해질 거라는
막연한 긍정으로 스스로를 안심시키며 잠이 들었다.

다음 날 아침.
눈을 떠도 감은 것 같은
어두운 고시원의 공기가 유독 싸늘했다.


'망했다... 늦었다!!'


세수할 틈도 없이 전력질주로 출근했다.
1시간 지각.

팔짱을 낀 채 매서운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는 실장님,
무표정하게 "일찍 좀 다녀"라고 말하는 형들.

내 지각 하나로
아침부터 그들의 일이 늘어났을 테니
화가 날 만도 했다.

나는 변명 없이 연신 고개를 숙이며
급히 주방 유니폼으로 갈아입고
곧바로 일에 투입됐다.

바쁜 점심시간이 지나고 오후가 되도록
형들과 실장님은
업무 지시 외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처음엔 내가 지각해서 그런가 보다 했지만,
냉랭한 기운이 계속될수록
내 마음속에서도 설명하기 어려운
화가 조금씩 번져가기 시작했다.


'지각한 건 내 잘못이지만...'
'없는 사람 취급하는 건 너무한 거 아니야?'
'곧 그만둘 걸 아니까 싫은 건가?'
'아… 그냥 빨리 그만두고 싶다.'


그렇게 하루, 이틀, 일주일이 흘렀다.

자격증 시험은 일주일 앞으로 다가왔지만
새 주방 보조 직원은 면접조차 보러 오지 않았다.

내 머릿속은 이미
푸른 하늘과 초록빛 산들 사이로 맑은 강물이 흐르는
강원도의 자연 속에 가 있었다.

마음이 떠난 상태에서 일이 손에 잡힐 리 없었고,
자잘한 실수가 이어졌다.

실장님의 훈육은 점점 듣기 싫은 잔소리로 변해갔다.

시험을 이틀 앞둔 날.
상황은 여전히 변하지 않았다.

그날 밤,
실장님과 소주를 기울이던 중 그가 먼저 입을 열었다.

"주방 직원 구하기가 쉽지 않네...
미안하지만 아버지께 잘 말씀드리고
조금만 더 고생해 줘야겠다."

그 순간,
광활한 자연 속으로 돌아가리라 믿었던
설렘은 거대한 상실감으로 무너졌다.

고시원으로 돌아왔을 때
그 공간이 주는 불쾌감이 유난히 크게 느껴졌다.

언제 그만둘 수 있을지도 모른 채
다시 주방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에 잠은 오지 않았다.

침대에 걸터앉아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싼 채
이 상황에서 벗어날 방법을 찾고 있을 때,

술을 마시면 찾아오는 '유혹의 신'이 속삭였다.


'고민할 게 뭐가 있어?
가족이 중요하지, 남이 중요해!?
아빠 사업이 잘되려면 네 도움이 필요하잖아!
솔직히 너 하나 없다고 주방이 안 돌아가겠어?
겁먹지 말고... 그냥 도망가!'


그 순간,
나는 '유혹의 신'에 홀린 듯 야반도주를 위해 짐을 싸기 시작했다.

모든 준비를 마친 뒤 마지막 남은 양심으로
짧은 편지를 써서
새벽 1시, 몰래 주방에 들어가 실장님이 가장 먼저 열어볼
소지품 서랍에 편지를 넣어두었다.

그리고 고향으로 내려가는 첫차를 타기 위해
동서울터미널 근처 찜질방으로 향했다.

다음 날 아침,
버스 창밖으로 보이는 여유로운 사람들과
상쾌한 공기를 마시며
주방으로부터의 해방감을 만끽했다.

한편으론
무책임하고 즉흥적인 도주에 대한
두려움도 고개를 들었다.


'혹시 수소문해서 날 찾으러 오는 건 아닐까?'
'우연히 마주치기라도 하면 어쩌지?'
'내가 빠져서 주방이 진짜 안 돌아가면...'

'에~이, 몰라! 될 대로 되겠지...'


생각을 끊고
창문에 머리를 기댄 채 잠이 들었다.

눈을 떴을 땐
회색 빌딩 숲을 벗어나
끝없이 펼쳐지는 산과 숲의 물결이
차창 너머로 흐르고 있었다.

내 고향, 강원도.

어릴 적엔 당연했던 이 풍경이 이토록 아름다웠던가.

그 풍경은 아무 말 없이
조용히 내 마음을 품어주고 있었다.




P.S


2005년, 수원 영통 대형마트 냉면집에서

당시 나이 28세,
MC 스나이퍼 음악을 좋아하셨고
실장으로 근무하셨던
‘심○득’ 실장님.

그날 이후 몇 차례 연락처를 수소문했지만
끝내 찾지 못했습니다.

당시 제 무책임한 행동 진심으로 죄송합니다.

혹시 이 글을 읽고 계시다면 꼭 한 번 연락 주세요.
보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