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175일
2026년 3월 13일 금주 182 빼기 1 일차
술을 마셨다.
단주를 결심한 지 175일 만에
결국 갈망을 이기지 못하고 술을 마셔버렸다.
금주를 시작한 이후
인간관계는 조용히, 그리고 서서히 멀어져 갔다.
사람들과 어울리던 시간들이 사라진 자리에는
어느새 고독이 앉아 있었다.
그 고독과 악수하며 지내던 어느 날,
공동 음악 작업을 하던 선배 형에게 전화가 왔다.
"○○야, 잘 지내지?
우리 같이 작업했던 곡이 팔렸어.
내일 가수 연습 스케줄 잡혀서 연락했어."
"정말요 형? 내일 시간 맞춰서 갈게요.
오랜만에 뵙겠네요."
"그러게. 근데 너 아직도 금주 중이야?"
"네… 다행히 아직까지는요."
"대단하다. 아무튼 내일 보자."
전화를 끊었지만
곡이 팔렸다는 기쁨보다
'아직도 금주 중이냐'는 질문이
계속 머릿속을 맴돌았다.
그 형과는 오랜 시간 함께 음악을 만들었다.
힘든 시절을 지나며 서로 의지하던 사이였다.
작업을 마무리할 때마다
우리는 늘 시원한 맥주를 기울이며
음악 이야기를 나누곤 했다.
문득 깨달았다.
금주를 시작한 뒤
그 형을 단 한 번도 만나지 않았다는 사실을.
몇 번 연락이 왔었지만
나는 그때마다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자리를 피했다.
그 시절의 기억들이
그날따라 유난히 선명하게 떠올랐다.
단주라는 이름으로 스스로 선택한 고립.
그 안에서 외로움은
그리움을 더 깊고 진하게 만들고 있었다.
머릿속에서 한 질문이 떠올랐다.
'이렇게까지 금주를 해야 하나?'
그 질문을 계속 되뇌다 잠이 들었다.
다음 날,
스튜디오로 향하는 차 안에서도
그 질문은 머릿속에서 메아리쳤다.
결국 스스로 답을 내렸다.
'오늘은... 형이랑 한 잔 하자.
대신 적당히.'
가수와 신곡 연습을 마치고
오랜만에 보는 형과 안부를 나눴다.
신곡 이야기도 한참 이어졌다.
그러다 형이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너 아직 금주하지?
형도 너한테 부담 주고 싶지 않으니까
맛있는 거 먹고 가."
나는 웃으며 말했다.
"아이~ 형, 오랜만에 만났는데
맥주 한잔 해야죠."
형은 다시 물었다.
"진짜 괜찮겠어? 억지로 안 마셔도 돼."
"억지로라뇨~제가 마시고 싶어서 마시는 거예요."
그날은 형이 이사한 집의 첫 방문이었고,
새로 만든 음악 작업실의 첫 손님이자
첫 가수 방문이 있는 날이었다.
여러 이유들을 끌어와 나는 스스로를 설득했다.
그렇게 시작된 6개월 만의 술자리.
내가 좋아하는 참치회와
곡이 팔린 기쁨, 그리고 시원한 맥주 한 잔.
맥주가 식도를 타고 내려가
세포 하나하나에 퍼지는 느낌을 따라가다 보니
어느새 정신은 몽롱해졌다.
오랜만에 느끼는 취기였다.
그 취기가 주는 차분한 몽롱함 속에서
우리는 오래된 추억들을 꺼내 이야기했다.
그리고 밤은 아쉽게 그리고 빠르게 흘러갔다.
다음 날 아침.
두통과 속 쓰림, 그리고 숙취.
오랜만에 느끼는 그 불쾌한 감각이
몸을 무겁게 짓눌렀다.
비염 증상은 더 심해져 코는 꽉 막혀 있었다.
문득 이런 생각이 스쳤다.
6개월이라는 시간이 한순간에 무너진 것만 같았다.
외롭게 버티며 참아온 날들이
모두 부정당한 것 같은 느낌.
한마디로
금주에 실패했다는 생각이었다.
그 순간
불안과 허탈함이 밀려왔다.
나는 눈을 감았다.
그리고 조용히 호흡했다.
밀려오는 감정을 억지로 밀어내지 않고
그저 지나가도록 가만히 바라보았다.
잠시 후
머릿속에 한 문장이 떠올랐다.
'실패가 아니라 실수다.'
실패라면 끝이지만
실수라면 다시 시작할 수 있다.
나는 오늘 실수했다.
하지만
나는 아직 포기하지 않았다.
그래서 다시 시작한다.
다시 하루를 버티고
다시 하루를 쌓아갈 것이다.
175일이 사라진 것이 아니다.
나는 이미 175일을 해낸 사람이다.
그리고 내일,
나는 다시 단주를 시작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