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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쟈스민 Dec 31. 2021

나도 도망치는 건 부끄럽지만 도움이 된다.

일드 ‘도망치는 건 부끄럽지만 도움이 된다.’

연말이면 나는 도망쳤던 나 자신이 떠올라 마음이 웅장해진다. 내가 교사를 하게 된 건 조금 특별한 여정을 거친 후였다. 지금 일하고 있는 학교는 남고인데 첫 해에 너무 고생했던 게 기억이 난다. 이제는 졸업한 귀여운 제자들이지만 그 당시엔 이십 대 초중반의 젊은 여선생님을 놀리는 게 한창 재밌을 아이들이었다. 그때 난 매일 눈물바람이었는데 어른이 되고 나서 왕따를 당하는 기분이었다. 한 명이 장난을 쳐도 그게 모이면 100명, 200명이 장난을 치는 정도가 되었기 때문이다. 지칠 대로 지쳐버린 1년이 끝나자 교사가 적성에 맞지 않는다며 같은 교육계열의 아이들을 가르칠 필요가 없는 대학교 교직원이 되었다.


새로운 직장은 서울에서 꽤 유명한 대학교라 일이 편하고 좋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내가 생각했던 것과 현실은 많이 달랐다. 이전의 평행적이었던 교사생활과는 달리 조직이 수직적이었던 것이다. 또 단순 업무인데도 내 욕심만큼 일을 잘하지 못하자 자존감이 바닥을 쳤다. 무엇보다 지방과 서울의 사회 분위기가 너무나 달라서 ‘내가 철저히 지방 사람이구나’하는 이질감마저 느꼈다. 그렇게 힘든 시기에 마음의 고통이 몸으로 나타났고 아무리 병원에 다녀도 편도염이 낫지 않아 큰 병원에 입원해야 한다는 말까지 들었다.


상경하고 매 순간 다시 고향으로 내려갈까 생각도 했지만  또 도망치는 게 싫어서 계속 버텼다. '자꾸 도망칠 순 없잖아..'라고 생각하며. 그래도 그곳에서 사귄 동료들이 날 지지해주고 격려해주었다. 그들과 함께하는 점심시간이 유일한 돌파구였는데 링거를 맞느라 점심밥을 못 먹을 땐 김밥을 사서 병원에 가져다준 동료도 있었다. 근로학생들도 부족하고 모자란 날 많이 도와주었다. 고작, 네다섯 살 더 많은 선생님이 맨날 힘들어하니 똑똑하고 야무진 학생들이 휴머니티를 발휘한 것이다. 그렇게 1년을 버티자 내 예상과 달리 적응은 되었고 누구보다 빨리 에스컬레이터를 뛰어올라가며 피폐한 삶을 누릴 수 있었다.


주위의 적극적인 도움으로 새 직장과 서울에 적응은 되었지만 영혼 없는 삶을 살고 있다는 지각이 들었다. 그건 새로운 고통이었다. 그동안 버티고 참은 것이 아까워 더 참으려다 나 자신이 사라질까 봐 두려워졌다. 또다시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어 질 때쯤 한 드라마 제목이 생각났다. ‘도망치는 건 부끄럽지만 도움이 된다.’ 드라마 제목 그대로 여기서 내가 고향으로 돌아간다면 도망치는 것이지만 내가 생존하는 데엔 도움이 되리라. 기차에서 이 드라마를 다시 보며 결국 고향으로 내려갔다. 그리고 일전에 몸담았던 학교로 돌아왔다.


지금 생각해보면 도망치길 참 잘한 것 같다. 어쨌든 나는 자아를 잃지 않고 살아남았다. 첫 교직생활 때완 달리 더 단단해져서 돌아왔고 무리 없이 교사 일을 해낼 수 있게 되었다. 내게 큰 도움이 된 이 드라마는 호시노 겐, 아라가키 유이 주연의 로맨스 드라마다.


드라마 내용은 사실 굉장히 비현실적이다. 20대 미쿠리는 석사를 하고도 계속해서 취업에 실패하고 아르바이트로 독신남 츠자키의 집에 가사도우미로 일한다. 그러다 고용주로서 츠자키가 완벽하다고 생각했고 츠자키도 미쿠리의 가사가 완벽하다고 인정하던 찰나 미쿠리의 부모님이 귀농을 하게 되면서 둘은 결혼을 하기로 한다. 사랑이 아닌 고용관계로! 미쿠리는 시골로 내려가기 싫고 취업하여 도시에 살고 싶었으며 츠자키는 가사를 해결해 줄 사람이 필요했기에 가능한 계약결혼이었다. 프로 독신남이라 자신하던 츠자키가 결혼으로써 자신을 고용하라는 미쿠리의 제안을 받아들인 것이다. 그러나 막상 결혼을 하고 보니 마음이 자꾸 흔들린다. 함께 살면서 서로 좋아하는 마음이 싹튼다. 둘은 우여곡절을 겪게 되고 아픔과 깨달음 후 진정한 부부가 된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이야기에 공감이 갔다. 스토리 자체는 비현실적이지만 현실적인 사회 모습과 캐릭터들의 상황이 내 맘에 와닿았다. 상처를 주고받기 싫어 극도로 방어적인 남주, 석사까지 하고도 취업에 성공하지 못하는 여주, 애도 있는데 남편이 바람나 이혼한 여주의 친구, 회사에선 인정받지만 결혼은 하지 않는 여주의 이모, 귀농의 로망을 가진 여주의 부모, 동성을 좋아하는 남주의 직장동료, 잘생긴 외모로 인기는 많지만 사랑은 잘 모르던 남주의 직장동료, 가족이 전부인 남주의 직장동료.. 모두가 현실에서 있을법한 캐릭터였다. 특히 취업에 거듭 실패하는 미쿠리의 모습에 큰 동질감을 느꼈다. 나도 일을 잡기 위해 여기저기 발품을 팔러 다녔었다. 한 백번 실패하면 한 번 성공했던 것 같은데 정규직이 되는 건 천운이 따라줘야 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또 일을 하면서도 불안했다. 힘들게 사회에 진입해도 돈을 번다는 건 육체와 정신의 희생을 의미했다. 이렇게 저마다의 상처와 깨달음을 가진 캐릭터들이 솔직 담백한 대사들로 자신의 마음을 들려주니 어쨌든 그게 내게 위로가 되고 살아갈 힘을 줬다.


연출도 꽤 재밌었는데, 중간중간 뉴스나 추억의 프로그램들을 패러디하였고 동물 사진도 활용한다. 그래서 보는 내내 질리지를 않는다.


드라마 속에서 각자의 모습으로 도망치던 캐릭터들을 보며 나도 도망칠 용기를 얻었다. 도망치는 것에도 용기가 필요하다. 자존심 때문에 매 순간 부딪히고 깨져 박살날 필요는 없다. 도망칠 수 없으면 도전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생존에 위협을 받는다면 도전하는 것이 어렵지 않을까. 살기 위해선 도망도 칠 줄 알아야 한다. 부끄러운 게 뭐 대수라고. 도망치는 것은 다시 도전할 수 있다는 걸 의미하며, 이곳의 끝이 저곳의 시작일  수 있다.


앞으로 또 얼마나 많이 도망칠지는 나도 모른다. 도망치는 것은 부끄럽지만 도망칠 용기가 있는 나 자신은 꽤 괜찮다.



2022년엔 모두 도망칠 용기를 얻으시도록 기원하겠습니다. 파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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