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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획형 인간의 망한 여행

완벽한 여행을 꿈꿨다가는.

by 이랑삼





계획형 인간과

개방적 인간의 동행



최근에 MBTI 성격 유형 테스트가 한창 유행이었다. 친구들과의 채팅방에선 서로의 검사 결과를 캡처해 공유하면서 오랜만에 수다 꽃이 폈다. 유유상종인지 성격 결과도 비슷하게 나왔다. 신뢰도가 높은 검사는 아니지만 짧은 시간 안에 나를 분석하려는 시도 같은 게 오랜만에 유치한 즐거움을 줬다. 이 테스트는 4가지 지표를 기준으로 사람의 성격을 16가지로 분류한다. 테스트 페이지에는 특정 상황에서 본인이 어떤 선택을 할 건지 묻는 수십 개의 문항이 이어졌다. 그중에 '여행 계획하는 걸 즐기느냐?'는 질문이 반복해서 나왔다. 여행에 있어서 계획적으로 결정을 하는 걸 선호하는지 상황에 따라 융통성 있게 맞춰 가는지를 구별하려는 것이다. 난 생각할 필요 없이 '여행, 계획적'을 클릭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을 계획적 인간과 개방적 인간, 딱 두 무리로 나눈다면 나는 계획적 성격의 사람이어야만 한다. 이 단호한 판단의 근거는 나의 짝 두두다. 그와 여행을 다니면 '와우, 저렇게 아무렇게나 움직일 수 있구나' 단순함과 유연성에 놀라곤 한다. 하나의 요구를 위해 나머지는 고려사항의 목록에 넣지도 않는 사람이다. 여행에 있어서 그는 나와 확실히 다른 알고리즘으로 움직인다. 하지만 그도 일상은 판단에 따라 계획성 있게 보내는 사람이다.

하지만 여행같이 일상의 무게를 벗어던진 특수한 환경에서 이 사람의 내재된 성향이 더 잘 드러나는 건 아닐까? 삶의 풍파가 이 사람을 치밀하게 만들지 않았으면 반 히피로 살았을지도 모른다.








IMG_5102-1.jpg 여행 가면 일기장을 챙기지만 비행기에서 몰아 쓰는 사람





완벽한 여행을 꿈꾸면 생기는 일



반면 나는 여행을 계획하는 걸 아주 좋아한다. 여행지를 돌아다니는 시간만큼이나 컴퓨터 앞에 앉아서 여행을 준비하고 상상하길 즐긴다. 그래서 여행을 가기로 마음먹은 순간부터 내 여행은 시작된 셈이다. 먼저 어디를 갈지, 어느 시기에 갈지, 그곳에서 어떤 활동을 할 수 있는지 큰 틀에서 고민한다. 두두와 나, 두 사람의 욕구를 충족시키는 곳이어야 한다. 그리고 비행기 표를 끊으면 본격적으로 서치에 들어간다. 한국어, 영어, 스페인어 가능한 모든 언어를 이용해 여행지에 대해 정보를 수집하고 정리한다. 온라인 공간에서 수많은 정보와 경험을 읽고 보다 보면 비행기를 타기도 전에 이미 여행을 다 한 것 같다. 그제야 만족스럽게 끝없는 서치의 종결을 선언한다,

'이제 준비 다됐어! 여행 날짜만 기다리면 돼.'



하지만 돌아보면 아무리 치밀하게 준비한 여행도 크고 작은 실패를 겪었다. 이유는 다양하다. 어떤 물건을 안 챙겼다든가, 체력과 시간 소모를 고려하지 않았다든가, 동행과 불화가 생겼다든가, 사기꾼을 만난다든가, 분실을 한다든가, 다쳤다든가, 날씨 날씨 날씨! 이 중에 몇 가지는 사전 조사가 충분하지 못했던 이유도 있었다. 가령 ;

토레스 델 파이네 트래킹에 버너를 가지고 갔어야 했는데,

보카스 델 토로는 우기가 그 정돈 줄 알았으면 가지 않았을 텐데,

보고타의 살사 클래스 일정을 알았다면 살사 스텝 하나라도 배웠을 텐데,

등등. 수집할 수 있는 정도로 알려진 정보가 아닐 수도 있지만 여행 설계자의 무능으로 치부하고 앞으로 더 정진하는 계획자가 되겠다 다짐하며 극복할 수 있다.



하지만 예상치 못한 사건과 사고는 피할 수 없다. 여행 직전에 다리를 다치거나, 환전 사기를 당하거나, 핸드폰을 잃어버렸거나. 이 정도는 생각하기에 따라서 다른 어떤 경험으로 소화될 가능성이 있다. 물론 영 나쁜 기억으로 남을 수도 있겠지만 되도록 스스로를 긍정주의자 모드로 설정하는 편이 신상에 좋다.




P1110649-1.jpg 감히 토레스 델 파이네에서 카레를 해 먹으려고 했단 말이지





여행을 가장 쉽게, 가장 빨리 실패로 이끄는 것은 내 욕심과 집착, 사로잡힘이었다. 내 계획표는 이미 이행하기 힘든 일정들로 빽빽하게 채워져 있을지도 모른다. 결국 애써 짜 놓은 계획들은 실전에서 왕왕 무시되거나 참고용 정도로 가볍게 전환이 된다. 계획이 이행되지 않았다는 실망감과 함께 상상했던 이상과 기대에 못 미치는

여행지의 현실에 다시 낙담한다. 결국 기대는 욕심이 되고 집착이 되어 실망으로 끝나는 루트. 나는 어디에 사로잡혔나. 나는 한 여행에선 많은 미술관에 집착했고, 어떤 여행은 맛집과 예쁜 사진에 집착했다. 그리고 대부분의 경우 경비를 아껴 쓰느라 소비를 줄이는 데 집착했다. 지금, 현실 세계의 나로선 과거의 내가 어리석었다 판단하지만, 막상 우리가 어딘가 갈망하던 곳으로 떠났을 때 기대심을 충족시키기 위해 또다시 같은 생각의 패턴을 반복할지도 모른다.



한편 기대를 충실하게 이행한 여행은 진부하다. 남들이 추천하는 맛집에 가고, 포토 스폿에서 감성 사진을 성공적으로 남긴다. 저녁엔 야경이 멋진 장소로 급하게 이동해 야경 사진을 남기고 숙소로 돌아와서 그제야 맥주 한 잔에 하루의 회포를 푼다. 길지 않은 일정 동안 효율적으로 움직이며 성공률이 안정적인 보장된 여행이다. 그리고 아주 흔한 이야기가 되어버릴지도 모른다. 물론 만족스럽다. 하지만 여행자의 마음 한편에 이 치밀한 (척하는) 여행 방식이 여행이라는 행위의 가치에 과연 부합하는가에 대한 고민을 한다. '어떤 게 진짜 여행일까? 내가 여행에서 얻고 싶은 것은 뭘까?'





그야말로 앞이 깜깜했던 '죽은 자들의 날' 밤의 기억, 멕시코

내 여행 계획은 망했다.

늘 망할 것이고 망해야 한다.

다른 사건이 생기지 않더라도 최소 날씨가 궂은 바람에 망할 것이다. 여행의 기대를 꺾어야 한다고 말하고 싶지 않다. 여행의 이상적 이미지를 가슴에 그려 놓아야지. 여전히 여행 전 계획하고 기대하는 즐거움은 포기할 수 없다. 대신 여백을 남겨 놓으련다. 여행의 즐거움을 완벽에서 찾지 않으려 한다. 기대에 어긋나고 실망한 여행의 기억도 여행이 주는 얄궂은 즐거움인 걸로 이해해 보려고 한다. 그곳의 색다른 상징적 이미지를 발견하고 덧칠도 해보는 것이다.






그런 여행도 있었다. 드론과 카메라를 지고 기운 넘치게 산에 올랐다. 이른 아침의 맑았던 하늘은 금방 흐려져 멋진 경치는 구름과 안개에 죄다 가려져 형체를 가늠하기도 어려웠다. 얼마 안 가 비가 내릴 게 분명했다. 언덕은 금방 안개가 들어차 시야가 온통 뿌옇게 보였다. 이제 돌아가야지 발길을 돌리는 데 가까운 나무 위 뚜깐(왕부리새) 무리가 보였다. 재잘재잘 투닥투닥거리던 뚜깐들은 하얀 안개를 뚫고 멀리 날아갔다. 흰 안개 배경에 동동 떠가는 노란 부리의 대비. 1분도 안돼서 사라진 눈 앞의 산수화.

뚜깐을 보고서 곧 비가 쏟아졌다. 등산화는 빗물과 진흙에 젖어 양말까지 질퍽거렸다. 세탁할 생각을 하면 여간 신경 쓰이는 게 아니었지만, 그 순간은 그냥 빗물에 온 몸을 적히기로 했다. 깜짝 선물처럼 마주한 뚜깐 생각에 비에 젖으며 돌아가는 길은 아이처럼 즐겁기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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