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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랑삼 Sep 06. 2020

한국에서 핸드폰 번호가 없다는 것

본인 인증이 이렇게 힘듭니다





원하는 건 딱 하나, 니 전화번호




나는 핸드폰 번호가 뭐냐는 질문에 한숨부터 내쉰다. 누구 누구씨 폰 번호가 어떻게 되세요? 라고 묻는 사람 앞에 두고 한숨을 쉰다는 게 아니라, 주로 컴퓨터 앞, 핸드폰을 손에 들고서 답답한 마음이 드는 것이다. 스크린에는 휴대전화번호 빈칸과 인증번호 보내기 버튼이 보인다. 나는 외국생활을 시작하면서 한국의 연락처가 필요없다고 단정하고, 출국 전 통신사 서비스를 해지했다. 그렇게 핸드폰 번호가 사라지고 나니, 부재한 것의 존재감을 더 강력하게 느끼게 됐다. 한국 사회에서 핸드폰 번호는 내가 생각한 것처럼 연락처로만 기능하지 않았다. 핸드폰 번호는 본인 인증의 수단이었다. 핸드폰 번호가 없는 나는 내가 나임을 증명하는 데 애를 먹었다.



어떤 사이트에서 아이디나 비밀번호를 찾을 때, 새로 깐 어플리케이션을 실행시킬 때, 휴대전화 본인인증 단계를 거친다. 보안이 철저한 금융 앱에서는 아이디가 아니더라도 생체 인증이나 안면 인증 등 다양한 로그인 방법을 선택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런 혁신적인 장치들의 본바탕엔 핸드폰 번호가 키맨key man으로 자리잡고 있다. ActiveX로 악명 높은 공인인증서와 핸드폰 번호가 상호의존적으로 기능하며 다른 로그인 수단들을 이용할 수 있도록 지원한다.



그런데 왜 하필 핸드폰 번호야?

지금까지 거쳐간 단말기만큼이나 핸드폰 번호도 자주 바꼈다.

번호이동이 얼마나 쉽고 잦은데, 본인인증이라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게 아이러니.




7월 어느날의 노을, 파나마 시티










휴대전화번호가 없는

금융업무엔 이런 일이 생긴다.




파나마에서 지내는 동안의 내 금융업무 패턴은 이러했다. 금융앱에 지문인증으로 접속해 이체하고, 일상적 구매건는 네이버 페이를 이용한다. 어느 날, 잘 이용하지 않는 은행 계좌에서 송금할 일이 있었다. 오랜만에 그 은행의 어플을 실행했다. 앱이 열리기 전에 뜬 알림창에는 새로운 어플리케이션을 만들었으니 이용객은 새 버전을 다시 설치하라고 한다. 나는 이미지가 약간 달라진 새 버전의 어플을 깔고 열었다. 첫 화면으로 뜬 로그인 창에서 나는 그간 잊혀진 공인인증서와 조우한다. 



문제는 내가 지문인증과 네이버페이에 빠져있는 동안 공인인증서를 갱신할 시기를 지나버린 것이다. 골은 띵하고 속은 갑갑해졌다. 나는 공인인증서 갱신을 과감하게 시도했다. 어짜피 해야 할 일 지금 해치우자! 비장하다. 기억도 안나는 은행 아이디를 겨우 찾아 넣고, 주민등록번호를 기입하고 다음 단계 클릭. 그러면 다음에 만난 것은 - 공인인증서와 더불어 구태의 쌍두마차, 아니 따지고 보면 이것이 끝판왕 - 핸드폰 번호 본인 인증하기 단계이다. 



핸드폰 번호가 없인 아무것도 못하겠다 싶어 모바일 알뜰요금제에 가입하기로 했다. 언택트 시대에 감사하게도 셀프개통이란 편리한 시스템이 있었다. 매장 방문이나 상담사 도움 없이 본인이 필요한 서류와 정보를  제공하여 빠르게 개통할 수 있다. 오케이, 좋아 셀프개통 클릭. 필수 기입 항목인 이름, 주민등록번호를 기입하고, 주민등록증 이미지 파일 첨부하고, 신용카드 정보를 쓴다. 그리고 다음은... 신용카드에 등록된 핸드폰 번호를 쓰라고?!


 


핸드폰 번호가 없어서 핸드폰 개통을 못했다. 이 글을 쓰게 된 계기




그 번호로 내가 본인임을 인증해라고 한다. 이런. 폰 번호가 하도 많이 바꼈던지라 카드에 등록한 그 번호가 뭔지 기억도 안날 뿐더러 나는 핸드폰 번호가 없다고! 나는 넉다운, GG 굳게임, 졌잘싸('졌기만 잘싸웠다'의 줄임말), 새하얗게 질려 백기를 든다.

엉덩이만 아프네, 이만 일어나자.,,



§ 해외체류하는 경우 핸드폰 본인인증을 하지 않아도 된다. 글의 시점은 국내에 머물 때.

§ 상담사 연결 통해 알게된 사실!카드사에 따라서 본인명의가 아니더라도 다른사람의 번호를 추가로 등록할 수 있다고 한다.






핸드폰 번호와 이메일 주소




내가 나임이 확실한데 나를 증명하기 이렇게 쉽지 않다. 더 허탈한 건 본인임을 증명할 수 있는 궁극적인 수단으로 사회 시스템이 요구하는 것이 고작 핸드폰 번호라는 것이다. 너무나도 쉽게  바꿔왔고, 근래에는 아예 없이 살기로 선택한 그 한국의 핸드폰 번호. 나 개인적인 선택과 생활 환경이 특수해서 이런 일이 생겼다기엔 한국은 사회적으로도 통신사들의 고객 유치 경쟁이 치열해 번호 이동을 장려한다.



반면 온라인 결제가 이루어지는 해외의 사이트들에서는 전자메일을 바탕으로 회원가입이 진행된다. 구매단계가 아닌 이상, 이름 메일주소 비밀번호 이상의 개인정보를 요구하지 않는다. 핸드폰 번호는 선택 사항. 비밀번호를 잃어버렸을 경우에는 등록한 이메일에 인증 번호를 전송해 본인 확인을 한다. 메일 주소로 시작해 메일 주소로 순환하는 구조다.

핸드폰 번호와 이메일주소. 한국의 사이트들은 통신사에 가입되어 있지 않는 한 원활한 이용에 제약이 생기는 태생적 구조를 가지고 있다. 한국 사회 바깥으로 시선을 넓혀서 국내 거주 외국인들, 해외 구매자들에겐 어떻게 느껴질까. 각종 ActiveX와 공인인증서의 압박에 내성이 있는 나도 이렇게 힘든데, 한국식 본인인증 시스템을 이해 못하는 그들은 결코 '우리'처럼 접근할 수 없다. 아무리 그 사이트에서 제공하는 서비스가 훌륭하더라도. 내가 아마존과 알리익스프레스를 쓰는 것처럼 자유롭지 않을 것이다. 핸드폰 번호가 없다면 가입 자체가 어려울 것이다. 이런 방식의 플랫폼은 국내에서 머물 수 밖에 없다.




아마존 회원가입과 비밀번호 찾기 페이지, 핸드폰 번호는 선택사항







네이버와 다음 회원가입란의 인증번호 전송 버튼










적籍을 두다라는 말이 떠올랐다. 본적, 학적, 당적, 병적에서 쓰이며, 한 사람이 어느 장소나 무리에 소속되어 있는 상태를 말한다. 서류로써 적은 구성원을 수월하게 관리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구성원들은 적을 자기 자신을 소개하고, 증명하고, 다른 사람과 교류하기 위한 효율적인 수단으로 쓴다. 그러니까 어딘가에 소속되어 있음 밝힘으로서 스스로를 증명한다. 내 핸드폰 번호가 내 신용과 나 본인을 증명하는 듯 말이다.

휴대폰 본인인증에 대해 생각하며 찾아본 본적本籍데 대한 설명은 아래와 같다.

 


출처. 네이버, 두산백과



과거에 사람들이 적을 두던 본적은 원래는 물리적 장소였지만, 이제는 그 의미가 크게 쇠퇴했고 2008년부로 호적법은 페지됐다. 이제 본적은 누군가에게는 큰집이 남아있는 집안의 고향이고, 누군가에게는 서류상으로 남은 '추상적, 기술적 개념'일 뿐이다. 가끔 공적 서류에 본적을 기입해야 할 때, 부모님께 전화를 걸어 엄마, 내 본적이 뭐야?라고 물었던 것처럼. 본적이 유명무실해 진 연유를 '사람들이 태어난 고장을 자유로이 떠날 수 있게' 되면서 본적이 '현실생활하는 장소와 무관'해졌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 설명은 해외거주가 흔해진 현재의 상황과 묘하게 맞아 떨어진다. 우리는 한 국가에 구애되지 않고 자유롭게 삶의 영역을 선택할 수 있다. 반면 핸드폰 번호는 현지에 매어있다. 그러니 핸드폰 번호로 이 사회에 속해 있는, 혹은 속하길 바라는 모든 사람을 증명하고 포용할 수 없다.


동네 가가호호의 호주 이름과 집주소를 일일이 글로 써서 철을 해둘 때, 호적제가 사라질지 그 당시의 사람들은 알았을까. 시대에 따라 세상이 물어보는 적은 달라진다. 지금은 핸드폰 번호로 이용자 본인을 확인하려고 하지만, 십년 이십년, 오십년 후엔 또 무엇으로 본인 인증을 하게 될지 모른다. 핸드폰 인증의 문턱에서 매번 본인 증명이 좌절되는 요즘, 말하고 싶은 것. 핸드폰 번호가 없어도 나는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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