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항 폐쇄, 해수욕장 이용 금지, 도시간 이동 금지, 일요일 완전 격리. 여행의 욕구를 품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지독했던 반 년이 지났다. 파나마의 봉쇄 조치들 하나 둘 풀려 마침내 일요일도 자유가 되어 돌아왔다! 이번 주말 도시를 탈출하는 고속도로가 엄청 막히리라. 완전한 자유와 일상의 회복을 축하하며 야외로 나갈 것이다. 나와 두두도 그 중 한 무리였다. 하지만 주말이건 축하건 코로나는 사라진 게 아니였다. 격리 이후 첫 동반 나들이 장소 선정에 주의를 기울여야 했다.
우린 일단 산으로 향하기로 했다. 유달리 해변에 이끌리는 유전자를 가진 듯한 중미인들의 집결을 피해볼 요량이었다. 파나마 운하를 건너지 않는 지역 범위에서 편하게 걸을 수 있는 자연공원은 손에 꼽힌다. 나와 두두는 그 중에서 가장 자연친화적이고 유지가 잘되어 있는 '이 공원'으로 생각이 통했다.
파나마 열대우림에 입장하셨습니다
레인포레스트 디스커버리 센터.
'센터'라고 이름을 붙인 이곳은 비영리 단체가 새와 자연을 보호하고 연구하기 위해 운영하는 사설 공원이다. 파나마 운하를 따라 쭉 달리다 보면 인공호수가 나오는데, 거기서 작은 다리 하나를 건너고 그 길 끝에 센터 입구가 나온다.
이곳은 새와 동물을 관찰하며 동시에 한적함을 즐길 수 있는 파나마시티 근교의 최적의 장소다. 거주자 12불, 외국인 30불의 적지 않은 입장료 탓에 팬데믹 이전에도 방문객이 적었다. 사람들과 마주치지 않고 조용히 숲을 즐길 수 있을 것이다. 코로나로 인한 피로감과 무의미한 일상의 상념도 잊고.
좋은 아침이야, 여기 한 번 온 적이 있니?
센터 입구 매표소의 직원이 물었다. 다정한 톤. 이곳의 직원들은 친절하고, 숲과 동물에 대해 박식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딱 1년 전 처음 왔을 때 받았던 환영의 인사에 괜히 뭉클했다. 안녕! 좋은 아침이야 라는 대답으로 '그간의 버거움을 지나보내고 이렇게 다시 만나서 반갑다'는 긴 인사말을 숨겼다. 우린 체온을 재고 출입객 장부에 이름을 올렸다. 공원 지도 뒷 장에는 이곳에 서식하는 새와 동물들에 대한 간단한 소개가 있었다. 오늘은 어떤 친구들을 만나게 될까.
카푸친 몽키 혹은 모노 까리 블랑코
열대우림을 걷는 방법
평평하게 잘 다져진 흙길에서 공원 산책로가 시작됐다. 땅은 비가 오지 않아도 습기을 머금어 축축했다. 길 위로 내려 앉은 낙엽들도 금방 흙으로 스며들 양이었다. 우리는 그 길을 걸었다. 하지만 우리가 이곳을 찾은 목적은 그 길이 아니라 이를 감싼 깊이 모를 숲에 있었다. 초록으로 위장한 숲을 바라봤다. 그 속에 무언가를 찾아 보려고 집중할 수록 보이지 않음을 깨달았다.
이제부터 두 귀를 열어야 해. 두두가 말했다. 두 귀에 집중하고 나니 무음인줄 알았던 공간은 미세하지만 분명하게 생동하는 숲이 되었다.
바스락.
숲 속에서 소리가 들렸다. 우리는 발걸음을 멈추고 숨 죽이고, 뒤덮힌 초록의 사이 사이를 분주하게 훑어봤다. 숲 속 미지의 존재는 자신이 주시받고 있단 걸 아는 듯 한 번의 실수 이후 침묵했다. 우리는 성과 없이 시선을 길로 돌렸다. 하지만 촘촘하게 우거진 밀림이 그들을 가려주는 만큼 길 위의 우리, 인간이 의존해야 할 우선의 감각은 청각이었다.
공간의 소리가 달라지는 순간이 있다. 숲에서 울려퍼지는 하나로 뭉쳐진 소리에 익숙해져 있다가 일순 새로운 소리가 끼어든 걸 느낀다. 잠시간 변화를 눈치 채지 못하고 있다가 퍼뜩 정신을 차리고 주위를 둘러봤다. 언제 날아 들었는지도 모르게 숲새가 나무 위에 앉아있었다. 그리고 내 의식을 깨웠던 그 사랑스러운 음색으로 다시 지저겼다. 온 신경을 집중시키고 이 세상의 모든 소리에 귀에 모아본다. 도시에서 생활할 때는 극구 거부하는 외부의 소리다.
밀림을 걷는 즐거움을 극대화하기 위해서는 상상력과 추론 능력도 필요하다. 한번은 바람 한 점 없다가 별안간 초록 이파리가 머리 위로 떨어졌다. 나는 고개를 들어 숲 천장을 올려다 봤다. 우린 원숭이들이 지나는 나뭇가지 횡단보도, 그 아래에 서 있었다. 건넛나무엔 무리의 원숭이들이 앉아 있었다. 원숭이가 나뭇가지를 건너는 장면을 목도했을 때 그 움직임이 너무나 조용하고 신중했기에 나는 그들의 노력을 위해 눈치껏 아무것도 보지 않은 척 해줘야 할 것 같았다. 그들의 얼굴을 읽을 수 없음에도 그들이 마치 들켰다는 표정을 지은 것 같았다.
언덕에 걸터앉는 방문객 센터에 벌새들이 모인다. 단물을 받아 놓은 모이통을 차지하려고 붕붕 위협적으로 날개소리를 내며 날아다닌다. 판데믹으로 인해 관람객도, 숲에 대해 설명해주던 직원도 없었다. 관찰 망원경과 새를 부르던 스피커도 없앴다. 하지만 사람들의 발길이 줄어든 탓에 센터의 오두막 기둥 아래 어둑한 공간에는 박쥐 무리가 새롭게 터를 잡았다.
나에게서 숲으로
숲에서 나에게로
숲을 느끼며 걷다 보니 내 의식에서 '나'의 농도가 옅어졌다. 홀홀해진 틈으로 모르포 나비, 고함원숭이, 가위개미 행렬들 그리고 새들이 흘러 들어왔다. 어딘가에 숨어 있을 이름 모를 새들의 둥우리도 상상했다. 걷는다는 단순반복적인 행위 덕에 생각은 거칠 것 없이 흘렀다. 가끔 침묵을 깨고 두두는 흥미로운 질문을 던졌는데, 그것이 또 다른 상상을 자극했다.
가위 개미들은 왜 가까이에 있는 나뭇잎은 안 자르고, 굳이 멀리 가지?
선호하는 잎사귀가 있나보지. 라고 무심히 대답을 했지만, 두두가 낳은 질문의 덫에 걸렸다. 이후 이 개미들에 대한 생각으로 푹 빠진 채 발걸음을 옮겼다.
나라는 내적 공간이 개미에게서 나비에게로, 원숭이로 그리고 이 숲 가장 비밀스런 나뭇가지 위로까지 마구마구 의식의 가지를 뻗었다. 숨어서 마음껏 울고 는 저 산새들이 있는 곳까지도. 이런 얼토당토 아니한 상상의 나래를 이번엔 비웃지 않기로 했다. 그간 나는 참 내 안의 이야기들에만 집중했다. 내 안에 고여버린 생각의 방에도 환기가 필요했다. 게다가 도시인으로서 외부로부터 오는 자극에 온 몸을 내맡길 수 있는 귀한 기회 아닌가.
물론 일상의 삶을 숲을 상상하듯 살아갈 수는 없다. 다만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활동인 걷기를 하면서 잠시간 정신이란 근육을 이완시켜 보는 것이다. 흙 위도 납작하게 기어보고, 나뭇가지 사이를 건너보고, 밀림의 품속을 날다가 다시 나에게로 돌아가면 된다. 한꺼풀 벗어놓은 나에게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