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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랑삼 Jan 15. 2021

올라의 정상에 오른 산의 민족

이것은 산인가 언덕인가, 피카초 데 올라




밤이여 떠나가라 시골 동네의 수탉들이 울어 재꼈다. 새벽 다섯 시, 닭 울음을 의식 너머의 BGM 삼아 반은 깬 상태로 누워있던 나는 핸드폰 알람에 남은 잠 기운을 털고 일어났다. 곧 캠핑장 여기저기에서 알람 소리와 함께 사람들의 기척이 들려왔다. 아랑곳 않고 파워 숙면을 취하던 두두를 깨워놓고, 옆에서 등산할 복장으로 갈아입었다. 오늘은 피카초 데 올라Picacho de Olá에서 아침해를 맞이할 예정이다.



텐트 밖은 여전히 어둠이었다. 랜턴을 들고 화장실을 다녀오면서 카를로스와 밀라그로스와 아침 인사를 나눴다. 좋은 아침, 잘 잤어?

약속된 시간 다섯 시 반에 주차장에 모였지만, 출발이 늦어졌다. 투어 프로그램에 신청한 어떤 이가 늦는 모양이었다. 이럴 때마다 '라티노 타임'이라며 관용의 법칙을 적용하면 조급한 마음이 한결 낫다. 하지만 이 사람들, 설상가상이다. 차키가 방전이 돼 문을 열지 못하고 있다. 부지런히 일어났건만 이렇게 소중한 새벽시간을 소진해야 되나 싶지만, 깊이 따지고 들지 않는 게 심신 안정이 좋다.









copyright. Carlos Peregrina



세 대의 자동차가 깜깜한 시골 밤을 헤치며 줄지어 달렸다. 가이드 없이 피카초 데 올라에서 아침해를 보려고 계획 짜던 건 정말 무리였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이동길이었다. 뒷좌석에서 앉아 있던 나는 몰려오는 졸음에 기꺼이 굴복하기로 했다. 삼사십 분이나 지나서 차가 속도를 늦췄다. 시골 마을의 외곽의 농장이 길가에 보였다. 그러다가 다시 차를 움직여 한 로컬의 집 마당에 주차를 했다. 마당이라고 하기엔 꾸밈의 노력이 하나도 들어가 있지 않은 그냥 집의 입구와 건물 사이의 잡초와 자갈이 널브러져 있는 공터였다.



캠핑장 가이드, 헤로니모가 길 건너에 있던 농장의 철조망으로 엮어진 울타리 문을 멋대로 열고 사람들을 들였다. 열댓 명의 사람들이 랜턴으로 흙길을 비추며 들어섰다. 공기엔 이미 파란 기운이 돌았지만 여전히 주변을 구별할 수 없었다. 돌과 바위가 나뒹구는 오솔길을 섰다 멈추며 걸었다. 이번엔 울타리 '문'이 아닌 철조망 사이를 벌려 엉거주춤하게 통과했다. 사유지가 끝나는 지점이었던 것 같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가파른 산길을 오르기 시작했다.




Copyright. Carlos Peregrina

나와 두두는 긴 줄의 끄트머리에 있었다. 이따금 사람들의 이동이 멈췄다. 몇몇 앞선 사람들이 길에 멈춰 서서 우리에게 먼저 올라가라고 신호를 했다. 제 속도를 찾은 발걸음도 가벼워라! 신나게 위로 위로 올라갔다. 뒤를 돌아보니 한참 뒤처져진 밀라그로스와 카를로스, 그리고 그들을 한 걸음 위에서 지켜보는 가이드가 전부였다. 그렇다, 새벽 동행을 함께 하기로 한 사람들은 중도 포기했던 것이다. 산을 타는 게 버거운 건 밀라그로스도 마찬가지였다. 그녀의 앞에서 남자 친구인 카를로스가 발 디딜 위치를 조용히 알려주고 있었고, 그 뒤에선 가이드가 조용히 지켜보다 가끔 넌 할 수 있다는 단순한 주문을 넣고 있었다.











친구들을 기다리는 동안 벌써 멀어진 발아래의 땅을 바라봤다. 대지 위에서 어둠과 밝음의 교체식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너르게 펼쳐진 구릉지 위로 빛이 부드럽게 내려앉고 있었다. 무심중 내 시각에 오백 년 전 '스페인 정복자'의 시선이 침입해 들었다. 초록으로 뒤덮은 너른 대지는 이 땅의 숨은 에너지와 풍족함을, 그리고 황금빛 빛살은 그들에게 내리는 축복과 희망이라고 제멋대로인 상상하지 않았을까.  - 그리고 이 가상의 스페인인의 상상은 황금으로 끝을 맺었을 것이다.-  혼자 언덕에 서서 이런 스토리를 꾸미게 된 이유는 그곳에는 내 상상을 방해하는 인조물, 높은 건물 따위가 없이 자연이 생긴 모습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뒤처져 있던 세 명이 우리 가까이로 이르렀다. 카를로스가 산을 잘 탄다고 말을 건넸다. 나는 고군분투 중인 밀라그로스가 안타까워 괜히 농으로 답했다.

'나, 군대 갔다 왔잖아, 산 잘 타.'

그랬더니 너도 군인이었냐고 놀라는 카를로스다. 너무 한국식 농담이었나. 그 반응에 도리어 놀래서 설명을 덧붙였다. '아냐, 농담이야. 우리나라 국토 70%가 산이거든, 우린 산 타는 거 익숙해.'



피카초데올라의 외형은 이색적인 뭔가가 있었다. 솟은 산 능선과 푹 꺼진 계곡의 경계가 명확하다. 솟아오른 지 얼마 안 된 것 같아 보이기까지 했다. 게다가 나무가 없고 키 작은 갈대와 잡풀로 덮여 있어 산의 형체가 가려지지 않으니 그 골격이 더욱 생생하다. 사람으로 치면 고등학교 1학년 정도의 나이? 스스로의 기개와 독특함을 드러내 보이며, 다가오는 외부의 것들에게 거침없이 시범을 보이려는 것이다. 한국의 산이 사람을 품는다면 이 산은 사람을 언제든 밀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산등줄기를 따라 흙과 자갈로 이루어진 산길이 쭉 이어졌다. 폭이 좁은 길 양 옆은 가파른 절벽이었다. 경사가 심해 서서 걷는다기 보다는 양 손을 짚고 땅 위에 찰싹 붙어있는 모양이 됐다. 문득 지나온 아래 길을 돌아보니 어지럼증이 몰려왔다. 양옆과 앞뒤의 떨어질 것 같은 경사가 아찔했다.





Capyright. Carlos Peregrina



피카초데올라 Picacho de Olá, Capyright. Carlos Peregrina





정상에 올랐다. 자동차 한 대 정도 주차할 만한 면적의 평평한 공간에 다섯 명이 섰다. 해는 구름 뒤에 숨어서 빛을 골고루 보내고 있었다. 빛을 받은 땅과 마을이 정답게 보였다. 그림자가 길게 드리워진 산의 서쪽 동네도 얼마 안 가 뜨거운 햇살을 나눠 받을 테다. 무심하게 맞이한 어떤 날들도 사실 이렇게 부드럽고 아름다운 새벽빛으로 시작했을 것이다.



우리는 서둘러 장비를 펼쳤다. 카를로스와 밀라그로스는 렌즈 교환식 디지털 카메라에서 여러 종류의 클래식 카메라까지 가지고 있었다. 우리도 사진 몇 장을 찍고 바쁘게 드론을 띄웠다. 헤로니모는 객들의 반응이 익숙한 지 어정 버정 지켜보고 있다가 우리에게 다가왔다. 해가 완전히 뜨기 전에 내려가야 돼.

아니, 이게 무슨 말인가 싶었다. 산 정상에 올라왔으면 풍경 구경하다 사진 찍는 건 물론이고, 야호도 해줘야 하고, 퍼질러 앉아 오이도 먹고 도시락도 까먹어야지. 게다가 정상을 지나 이어진 능선길도 조금 더 걸어가 보고 싶잖아. 이건 질척한 미련이 아니라 한국인의 의식에 내재된 산타기 철학이었다.



잠시 후, 헤로니모는 카를로스와 밀라그로스를 데리고 언덕을 내려갔다. 따라 내려가던 우리는 쑥덕쑥덕 얘기를 나눴다. 먼저 내려가라고 따라가겠다고 할까?, 오케이 그러자. 그리고 일행의 등 뒤로 먼저 가, 우린 조금 더 드론 날리고 따라갈게! 소리쳤다. 그리고 다시 정상으로 돌아가 급한 마음으로 여흥을 마무리 지었다. 드론 배터리 한 팩을 마저 날리고 우린 서둘러 가방을 정리해 산을 내려갔다. 조금 여유를 부려도 됐겠다 싶었다. 멀리 가지 않아 밀라그로스와 그녀를 서포트하는 두 사람의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남자 둘은 짓궂게 좀처럼 몸이 따라주지 않는 밀라그로스를 놀리고 있었다. 니가 해냈어, 정상에 올랐잖아.










캠핑장으로 돌아가는 길. 헤로니모는 내게 한 가지 미스터리를 남겼다. 내가 피카초데올라를 '저 산'이라고 가리켜 말했을 때, 헤로니모는 '아, 저 언덕'이라고 고쳐 불렀던 것이다. 언어의 규율에 엄격하지 않은 라티노가 남의 말을 정정하다니. 내가 산으로 분명하게 바라보던 대상이 그에겐 언덕이었다. 산은 뭐고, 언덕은 뭘까. 헤로니모는 어째서 언덕이란 표현을 선택했을까.



산지가 평야에 대비되는 개념이라면 엄밀한 뜻의 산은 산지 지형 중에서 구릉이나 재[嶺, 峙]를 제외한 정상부가 있는 돌출 지형을 지칭한다. 브리태니카백과사전(Encyclopedia Britannica)에서는 언덕(hill)보다 높은 고도의 것을 산이라 하였다. 과거에는 언덕과 산을 같은 개념으로 취급하기도 하였으나, 오늘날은 고도의 한계를 분명히 밝히고 있는 경향이다. 예를 들면, 영국의 경우는 높이 약 700m 이상의 상대적 기복(相對的起伏)을 가진 지형을 산으로 하고, 그 이하의 낮은 돌출부를 구릉이라 한다. 그러나 나라에 따라서는 그 구분이 애매하여 산의 침식 정도나 지형적 특성 등에 따라 높이와는 관계없이 ‘산’으로 칭하기도 한다.
[네이버 지식백과] 산 [mountain, 山]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피카초데올라는 분명한 '정상부가 있는 돌출 지형'으로 충분한 고도를 가지고 있으므로 산의 요건에 충족한다. 하지만 지식백과에서 말하듯 나라에 따라서 높이나 지형적 특성에 따라 달리 부를 수도 있다. 파나마 사람에게 피카초데올라는 산이라 부르기엔 부족함이 있다고 느꼈을 수도 있다. 그 이유가 높이가 됐든, 산지로 분류할 정도로 지형이 복합적이지 않았든 말이다.



그러고 보니 이곳에선 해변으로 가자는 외침이 그들의 심장을 뛰게 하는 흔한 구호인 반면에 산, '몬타냐montaña'라는 단어는 일상 언어에서 쓰임이 잘 없다. 파나마에 산이 없는가 하면 그렇지 않다. 코스타리카와의 국경에서 동쪽으로 중앙 산맥이 형성돼있으며, 더 이동해 피카초데올라가 있는 지방까지 산악 지형이 이어진다. 수도 근교 도시 중 유명한 바예데안톤이 화산의 분화구에 만들어진 것을 감안하면 이곳도 '산중' 마을임이 확실하다. 그런데도 이렇게 수많은 높은 고도의 정상부가 있는 돌출 지형 중에 어느 곳도 지명에 '몬타냐'라는 용어를 주지 않았다. 대신 산의 몇몇 정상부에 cerro(언덕), picacho(산꼭대기), altos(높은) 등의 단어로 이름 붙인 게 전부다.



반면 내가 자라온 나라에선 산이 얼마나 흔한지. 이때까지 살아온 집들은 죄다 뒷산을 끼고 있었고, 새벽엔 강제로 기상해 물통을 지고 산에 들어가 생수를 다. 사월초파일 새벽엔 산 중턱에 걸쳐 있던 절을 굳이 올라갔다. 학교 교내 행사마다 부르는 교가에선 우리가 정기를 받고 자라고 있다는 산 이름 하나쯤은 꼭 나온다. 봄가을엔 산에서 소풍, 사생대회, 등산대회까지 개최된다. 국내 등산용품 브랜드도 다양하다. 집 장롱 서랍을 열면 부모님 것이라도 등산복 상의 하나쯤은 나올 것이다. 기능 좋고 편한 등산복을 일상 외출복으로 입기도 하니 말이다.

한국인의 생활은 산에 많이 닮아있다. 우리는 산의 정기를 받아 살아온 산의 민족이다.

 


내가 피카초데올라를 보며 산이라 부른 이유도 우리에겐 산이라는 단어가 익숙하고 자연스럽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전문적이고 형식적인 분류나 백과사전의 정의는 모르지만 세 살배기 아이 닮은 것을 보고 그렇다고 표현하는 것이다.



캠핑장에서 피카초데올라 등반을 중도 포기했던 일행들을 마주쳤다. 그가 내게 말했다.

'너희 위에서 드론 날렸지? 우린 마을에서 날렸어,

생각해보니 산 정상에서 띄우나 마을에서 띄우나 다를 게 없더라고, 그렇지?'

나도 역시 웃으며 그렇지 라고 대꾸했지만, 드론은 담지 못할 그 산의 촉감, 돌멩이의 크기, 언덕의 기울기, 친구들과 함께 이뤄낸 성취감, 미소, 웃음 , 아침햇살의 온도, 가슴으로 파고든 대지의 너비감, 그 웅장함이 가슴에 남아있었다.






※ 오늘의 브런치엔 까를로스의 멋진 사진과 함께 했어요. 카를로스 고마웡!

Muchas gracias por compartir esas hermosas fotos, Carlos.






과 사진 그리고 동영상!

https://youtu.be/oTjYpUk-jp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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