핸드폰 메모장을 열었다. 스쳐지나간 생각의 조각들이 분리수거를 기다리고 있다. 그 중 지난 1월에 다녀온 파나마 보케테 여행 메모도 보인다. 보케떼 여행 중에 꼭 하고 싶은 일들이 쭈욱 적혀 있었다. 그래 그래 이런 생각을 했었지. 생각보다 요란스러운 바람은 없었던 게 다행이었다. 웬만한 건 다 이루고 돌아왔나보다, 한 가지를 빼고.
> 나베 부글레 민족 사람들과 대화하기, 사진 요청하기
보케떼에는 나베 그리고 부글레라는 이름의 토착 민족들이 거주한다. 이들은 파나마 중부 지역에서 코스타리카에 이르는 지역에 살며, 그들의 민족 정신을 이어가고 있다. 보케테를 다니면 마을 중심가에서 부터 밭과 커피농장이 펼쳐진 산 중턱까지 그들이 일상이 눈에 들어온다. 남자들은 익숙한 현대 서구식 티셔츠와 바지 차림인데, 나베의 여자들은 채도가 높은 단색의 전통복을 입고 있어서 시선을 사로잡는다.
그녀들은 나구아Nagua라는 발목까지 내려오는 긴 원피스를 입고, 패턴이 들어간 가방을 어깨나 이마에 차고 있었다. 나구아는 입은 사람끼리 색과 허리장식의 디자인이 겹치지 않을 정도로 다채롭다. 무채색의 상의와 청바지 차림에 길들여진 나에게 그녀들은 들판에 오롯이 핀 꽃송이 같다. 그녀들의 패션에 뾰롱 반해버렸다. 파나마의 토착 민족들의 패션이라니, 너무 매력적이잖아. 뇌신경에 찌릿찌릿 자극이 온다, 저 사람들에게 말 한 번 걸어보라고.
저기 사진 한 장만 찍어도 될까요?
나구아Nagua를 입은 나베 민족 모녀
너무 많은 고민은 실패로 갈 수 밖에
그래, 일상적인 인사 한 마디 건네며 말을 걸어보자. 이곳에서 가장 예쁘다고 생각하는 문화 중 하나가 인사 아닌가. 거리에서 마주치는 행인끼리도 좋은 아침! 하고 인사를 건니까 지연스럽게 운을 띄우기 적당하다. 나는 내 또래에 비해 넉살도, 사회성도 좋은 편이다. 마트에서 처음 보는 사람한테도 술술 말을 건다. 저기 혹시 좋은 오이는 어떻게 골라요? 세뇰, 무슨 아레빠이 제일 잘 나가요? 그러니 이번에도 인사를 하고 다음에 정중하게, 또박또박 내 의도를 말하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야 소심한 여행자. 넉살 사회성이랑 본투비 성격은 같은 선상에 있지 않더라. 내 안에 결재라인은 계속해서 까다로운 질문을 물어왔다. 속박당한 생각들은 계속해서 머리속에서 맴돌았다.
'나 여행한다고 여기 사람들 일상을 방해하는 거 아니가?'
'이게 저 사람한테는 자기를 구경한다고 생각하는 거 아닌가?'
혹여 관광객의 얄팍한 흥미에 소비된다고 생각하게 된다면 그건 최악이다. 여행온 나에게나 문화니 민족이니 전통 역사 따위가 온갖 특별한 의미로 다가오지, 그들은 그저 그네들의 하루를 살고 있을 뿐이다. 오늘 하루 할 일은 많은데, 일하러 가는 길에 관광객한테 길을 가로막힌다면 좋아할 사람이 누가 있을까. 게다가 요즘같은 때 찍힌 사진이 어디에서 어떻게 돌아 다닐지도 모른다. 인물 사진을 찍으려고 작정하고 보니 머리속은 생각 거리들로 비좁다.
남편 두두에게 이런 내 고민을 말했다면, 그는 당장 나베 민족 사람들 앞으로 가서 사진을 좀 찍어도 괜찮겠냐고 물었겠지. 뿌에도 또마르 라 포토? - 그의 스페인어는 완벽하지는 않더라도 요점을 명료하게 그리고 대화는 유쾌하게 이어가는 능력이 있다. - 그리고 나한테 그러겠지. 그래 고민해서 할 수 있는 건 한 개도 업따.
수제로 만들어서 세상에 둘도 없는 그녀들의 원피스
보케떼의 나베 부글레 민족
파나마 동전에는 인디헤나* 중 나베 민족의 조상이 유일하게 새겨져 있다. 파나마 토막이들에겐 그들 역사의 긍지를 지켜준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 파나마 1센테시모에는 16세기 초 스페인 정복자들에 대항해 인더헤나를 통합하고 전투를 이끈 카시케 우라까의 얼굴이 있다. - 나베와 부글레 민족은 파나마의 일곱 그룹의 인디헤나 중에서 가장 인구가 많으며, 현재 대부분은 그들의 자치권이 가진 '나베-부글레 코마르카Comarca(파나마의 행정 단위)'에 거주하고 있다.
*인디헤나, Indigena 아메리카의 선주민, 원주민을 칭하는 대명사
인디헤나의 코마르카는 그들의 법과 의회에 따라 운영되는 독립체이기 때문에 파나마 정부의 지원이 원활하게 미치는 못한다. 교육과 보건, 통신, 도로망 등이 기본적으로 국가가 제공하는 서비스와 인프라가 부족한 인디헤나들은 도시 사회와 연결과 교류가 적을 수 밖에 없다. 그러므로 코마르카에 사는 나베, 부글레 민족들의 삶은 보케테에 사는 구성원들과 또 다를 것이다.
반면 보케테에는 파나마 시티 못지 않게 다국적, 다인종의 구성원들이 모여산다. 오래 전부터 북미와 유럽에서 온 은퇴 이민자들이 모여 커뮤니티를 만들었다. 외부의 교류가 많아서 이 작은 산골의 마을은 생활에 필요한 서비스 산업이 높은 수준으로 정착했다. 하지만 나베 부글레 민족은 이 다양하고 활기 넘치는 사회의 반경에서 일부만 살짝 걸쳐있다. 그들은 파나마 농산업과 커피 산업에 상당한 기여를 하고 있지만, 그 외의 분야에 대한 참여는 저조하다. 이들 민족은 다소 폐쇄적인 성향이 있어서, 사회의 다른 집단들과 융화되기 보다는 그들 커뮤니티 내에서 주로 교류하며 생활하는 듯 보였다. 그들과의 사이에 보이지 않는 간격을 느꼈다면 그것은 아주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나는 결국 멀찌감치에서 그들의 뒷모습만 담았다. 멀어지는 뒷모습이 찍힌 사진을 보면서나마 그들과 조우했던 짧은 시간을 되돌려본다. 빛의 가루가 되어 공기 중에 반짝이던 아침 햇살 아래에서 계곡 위에 늘어놓은 엉성한 다리를 건너오던 한 가족들이었다. 막둥이의 앙증맞은 손을 꼭 쥐고 묵묵하거 걷던 아버지의 등짐이 가벼워 보였다. 커피 열매처럼 빨간 원피스를 입은 막둥이는 처음 본 외국인 아줌마의 인사가 영 불편한 표정이었다. 아이의 엄마의 채근에 마지못해 손 한 번 흔들어줬다. 손짓 한번에 하트가 뵹 가슴에 파고 들었다.
지난 1월 그날도 나는 외국인, 여행자, 관광객.
그 땅을 사는 사람들과 나누는 인사 한 마디에 청쾌한 햇살을, 살랑이는 바람을 가슴 깊이 품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