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로 힘든데 왜 웃음이 나는지
우리에게 새 가족이 생겼습니다. 이름은 바루. 스페인어로 하면 띨데가 있는 '루'자에 강세가 있어서 바루라는 불립니다. 파나마에서 가장 높은 화산 이름에서 따온 이름이죠. 곧 5개월 령에 들어가고, 몸무게는 약 3.5킬로 정도 될 겁니다. '빠나메냐(파나마 출신 여자)'이지만 스페인어나 한국어 중 어느 말도 못 알아듣는 것 같아요. 좌와 우, 그저 맘가는 대로 내 달립니다. 이제 바깥 나들이에 점점 흥미가 붙어서 '산책'이란 단어 정도는 알 것도 같네요. 여느 양육자처럼 우리 부부는 바루를 '순하다'고 평가를 하는데, 양육 난이도만 봐서는 만만치 않아요. 우리 부부의 새 가족 소개는 여기까지 하고 새 가족과의 여행을 이야기를 시작하겠습니다.
바루의 기본 예방접종이 끝날 무렵 파나마엔 건기가 시작되었다. 바다와 하늘이 새파랗게 빛난다. 바루가 온 덕에 세탁기 돌리는 횟수가 두 배로 늘었지만 걱정없었다. 언제든 오전에 빨래를 널면 오후엔 걷을 수 있는 '행복한 빨래의 날들'이 이어지고 있다. 파나마 사는 사람들이 가장 부지런해지는 시기가 이맘때일 것이다.
우린 오래전부터 벼르던 산으로 이른 아침 차를 몰았다. 파나마 여행의 특징은 정보가 없다는 것이다. 우리는 시티에서부터 한시간 반 거리에 있는 산으로 차를 몰았지만 막상 산뿌리에 도착해서부터는 어떻게 목적지로 이를지 알지 못했다. 그래서 바루와의 첫 산행은 '빡셈'으로 마무리됐다. '이 길이 아닌가 보오' 로 인한 회군을 두 번이나 겪고, 정상을 찾지 못했다. 하지만 걸을 만큼 걷고, 땀을 흘리고, 모기와 벌레에 물렸다.
불쌍한 바루. 돌아가는 길엔 제자리에 풀썩 주저 앉더라. 토끼처럼 뛰던 모습은 온데간데 없고, 움직일 의지가 없었다. 대부분 우리 팔에 안겨 다녔는데도 숲 속 더위와 습기를 견디기 힘들어졌다. 산에 털복숭이를 안고 다닌 우리 상태도 말이 아니었지만, 이제 투정부릴 수 없었다. 어린 바루 털에 끈끈이 씨앗을 떼어냈다.
도저히 파노라마가 펼쳐진 정상을 찾지 못하고 왔던 길을 도로 내려왔다. 우린 사람들이 나오고 있는 사잇길을 보고야 말았다. 두 시간 전에 지나온 길이었다. 철조망으로 연결된 나무 울타리는 역시 같은 철줄로 걸쇠가 엮어져 있었다. 사람들은 울타리문을 열고 닫을 때마다 걸쇠를 걸었다. 이런 자연 속 언덕조차 사유지로 구획이 되어 있었기 때문에 사람들이 이용하는 길조차 주인있는 길일 수도 있었다. 허탈했다, 날씨가 좋아서 더.
곧바로 다음을 계획했다. 우린 길을 알고 있다. 길을 안다는 것만으로도 자신이 있었다. 바루는 왠만한 평지가 아니면 안겨다녔다. 성장기에 너무 오래 걷는 것도 걱정이 됐다. 남편 두두는 기초체온이 사람보다 높은 털복실이를 안고 편도 2시간 언덕길을 오르내렸다. 건기에 땅에선 먼지가 풀풀 일고 자갈돌이 굴러서 다리에 힘이 들어갔다. 하지만 인간 아빠의 품은 시원했다. 아빠 버스엔 에어 컨디셔닝 시스템이 탑제되어 있었다. 집 냉동실에서 꺼내온 아이스팩이었다. 수건을 두른 아이스팩을 바루 옆구리에 대었다. 이전이라면 무슨 요란법썩이냐 말이 갔겠지만 아무도 이의를 달지 않았다.
우리가 조금 고생하면 될 일이었다. 산행은 더 덥고, 몸의 무게는 더 무거워졌다. 더 일찍 집을 나섰지만 걸음은 더 느렸고, 더 늦게 정상에 도착했다. 목적지에 도착해서도 아이를 돌보는 시선은 쉴 새가 없었다. 그래도 서로를 보는 표정엔 미소가 터졌다.
파나마에선 언덕이라고 부르는 지형은 고도가 높아질 수록 나무가 사라지고, 암반 지형을 감싸고 있는 자연 초지가 나온다. 숲을 빠져나오자 올록 볼록한 동산의 벌판이 나왔다. 바루는 땅딸막한 다리로 제 키만한 풀 숲을 헤짚고 다녔다. 푹 꺼진 땅을 밟고 내뒹굴었지만 용수철처럼 몸을 뒤집어 다시 달렸다. 세차게 부는 바람 틈에서 내 목소리가 헤쳐졌다. '안돼', '바루', '이리와!'
역시, 어느 단어도 알아 듣지 않는건지 못 하는건지. 그런데 기가 막히게 간식 봉지는 알아보고 돌아온다.
바루는 하산후 차로 돌아와서 짐 뭉치를 밟고 트렁크로 갔다. 그리고 풀썩 앉더니 똬리를 틀고 누웠다. 혼자만의 시간이 공간이 필요한 모양이었다. 그간 인간 어미의 무릎에서 긴장을 풀곤 했는데 마음에 들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니 맘은 잘 알았다.
다행히 전에 사둔 강아지용 차량 시트가 실려있었다. 우리 부부는 땀과 먼지, 해충 스페레이에 쩔고 볕에 익은 채로 다시 몸을 움직여 부랴 시트를 좌석에 설치했다. 바루는 잠의 세계로 녹아들었다.
가사는 모르지만 부를 수 있는 <라이언 킹>의 그 노래를 부르며
'나~주 평 야 발바리 치와와~'
차메 언덕으로 두 번째 산행 후 근육 뭉침에 채 빠지기도 전에 인간 어미는 아쉬움에 빠졌다. 에어컨 아래 시원하게 앉아서 보는 지난 주말의 사진 속 풍경이 황홀했다. 그 날 일사병이 와 그 이튿날까지 두통에 시달렸던 건 잊었다.
아, 드론을 한 번 날려야 했는데.
아쉬움이 남았던 건 남편도 같은 생각이었나보다. 그렇지 않으면 같은 장소로 연이어 산행을 갈 사람이 아니니까. (라고 나 혼자 생각하지만, 그는 아마 내가 강력하게 주장했다고 할테지.)
그렇게 세번째 산행이 시작되었다.
새벽 5시, 바루 밥을 간단히 먹이고, 우린 라면을 끓였다. 서둘러 짐을 이고 지고 차에 올랐다. 날씨가 전보다 낫길 바랐지만, 음. 해가 뜨니 구름 타래가 하늘을 가르고 있었다.
다른 산으로 갈까? 그런데 입장 시간을 좀 더 기다려야 해.
그냥 차메로 가자. 일찍 일어난 게 아깝다.
한 번만 더를 외친 건 나였기 때문에 남편의 눈치를 잘 살펴야 했다.
우린 작은 마을을 지나 또 엄청난 비포장 도로를 지났다. 이젠 어떤 길을 피하고, 어느 방향으로 가야 차 바닥이 땅에 닿지 않을지 파악하고 있었다. 등반 입구에 내린 바루도 다행히 컨디션이 좋아 보였다. 용감하게도 울타리 아래를 돌파해 농장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바루 안돼, 이리와!
오늘은 내가 바루의 운전 기사가 될 작정을 했다. 왜냐면 이번엔 우리 세 가족 산행에 아주 적합한 장비가 구비되어 있기 때문에! 남편에게 오늘은 첫 번째 산행보다도, 지난주 산행보다도 더 더 수월할 것이라며 큰 소리를 쳤다.
빠밤. 미국에서 막 도착한 강아지 포대기 개시요! 당연히 아이스팩 에어컨디셔닝 시스템도 가동중입니다요잉.
이 정도면 실려가는 바루도, 움직이는 사람도 훨씬 수월하겠지.
두 시간 후, 차메 언덕의 정상에 도착했다. 3.3킬로그램의 바루가 있어서 더 힘들었냐 하면 그렇지도 않다. 파나마에서의 산행은 그냥 힘들다. 좋아하는 것을 사랑하기가 너무도 힘든 파나마였다. 다행히 우리 개딸은 더위에 혓바닥 내놓을 일 없이 편히 산에 올랐다. 지나는 사람들은 어린 강아지더러 '모험가'라고 칭찬을 했다. 마냥 발랄한 바루 뒤로 우리는 땀에 절었고, 흐뭇했다.
응 맞아, 그런데 우리가 힘드네ㅎㅎ
품은 기대와 포부와는 다르게 언덕에서 내려 본 대지에는 습기층이 내리깔려 있었다. 아쉬움을 오래 곱씹을 여력이 없다. 흙먼지 날리는 자갈바닥에 짐을 내던지고 에너지바부터 꺼냈다. 나무 그늘 하나 없는 차메의 정상엔 자비가 없이 태양이 내리쬐었다. 하지만 인고의 가치가 있다. 뿌연 대기 속에서 자연의 곡선이 유려하게 흐르고 있다. 이같은 모양이라니!
빽빽한 자연림 사이를 휘감겨 내려가는 강 하구를 따라 시선을 옮기다 보면 어느 새 가늘고 기다란 차메의 끝이 보인다. 뿐따 데 차메 Punta de Chame라고 하는 지역은 이전엔 섬이었다고 한다. 지금은 도로로 연결이이어져 뾰족한 곳의 끄트머리엔 리조트가 들어서 있다. 먼 경치를 구경하다 내가 오른 언덕의 산세를 살펴본다. 여기선 monstruo (괴물같다든가 무시무시하다는 뜻)라는 단어로 표현하는, 역동적인 모양새에서 강하고 섬세한 리듬감을 느낀다. 올록볼록한 언덕면을 따라 내려가다 보면 다시 편평한 대지와 태평양의 수평선에 이른다.
자연에선 같은 모양이란 없다. 저마다의 개성을 찾을 수 있다. 파나마의 자연은 생긴 모습 그대로 수억년을 간직한 듯 해 바라 보면 묘한 감정을 든다. 글로는 표현할 재간이 없으니 동영상으로 담고 싶었다. 그것이 이 언덕을 계속해서 찾은 이유였다. 멋져.
한창 구경에 빠져 있을 때 한 가이드가 신랑에게 하는 얘기를 듣게 됐다.
이곳은 과거엔 카시께의 땅이었는데, 이젠 코요테의 땅이 됐어.
스페인 침략초기 이 지역을 거느리던 부족장(cacique, '카시께')의 이름은 차메였다고 한다. 비록 쇠총을 들고, 말을 탄 낯선 존재들이 처들어오자 그의 땅을 버리고 도망을 갔다지만 적어도 그는 이름을 남겼다. 도망간 자라는 오명은 이제와 중요하지 않다. 나는 스페인어 사전에서 찾을 수 없는 이 땅의 고유한 이름이 마음에 들었다.
두두는 드론을 띄울 준비를 마쳤다. 드론을 날리기에 좋은 환경은 아니었다. 그늘 없는 햇볕 아래, 센 바람, 뿌연 하늘. 지난 차메 등반 때 드론을 날리지 못했던 게 늘 아쉬웠기에 기어코 하늘 위로 올렸다. 드론이 바람 방향에 따라 날려가더니 곧 시야에서 사라졌다. 리모컨을 잡은 두히 양 손등이 금세 벌개졌다. 해를 피할 수 있을까 하고 챙겨 온 우산을 폈다. 별 도움은 안 됐다. 경량 우산은 속대를 드러내며 이리저리 뒤집어졌다.
드론의 착륙은 이륙보다 더 어려웠다. 바람에 기체가 기우뚱거려 자꾸 착륙지점을 벗어났다. 나는 양 팔을 들어올렸다. 드론축대를 잡아 내릴 생각이었다. 프로펠러에서 나오는 바람과 바람소리, 쉴 새 없이 쬐어대는 햇볕으로도 미간에 주름이 졌다. 그리고 우리의 바루는 이곳 저곳을 기웃거리며 깡총거렸다. 드론을 기다리며 '바루, 바루!' 소리를 쳤다. 정신이 없었다. 언제쯤이면 이 꼬마 아이가 의젓해질까. 드론을 완전히 땅에 내리자 마자 털복숭이를 잡아 캥거루처럼 포대기에 안았다. 이제서야 정신이 돌아오는 것 같다.
우리보다 늦게 언덕에 올라온 팀들도 다 사라지고, 우리 셋만 남았다. 정오의 시간. 내려가야 할 때인 걸 알면서도 아쉬웠다. 떠나지 못하고 카메라를 다시 들었다. 이런 마음을 상쇄시킬 만한 사진은 역시 나오지 않았다. 카메라 전원을 껐다.
눈으로 담자. 언제 또 오겠어. 이제 당분간은 오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을 것 같았다. 바루는 어떤 생각일까. 남편이, 바루 여기 등산로 입구 보면 이제 뒷걸음질 치는 거 아냐? 라며 웃었다. 허허, 인간 두 사람의 고생은 괜찮으니 너는 무탈하고 신났던 기억 얻고 가길 바랐다. 우린 우리 셋이 마주보는 걸로 그저 웃음이 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