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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랑삼 Jun 29. 2021

엔젤은 날고
우리는 걸어서 랜딩

엔젤스 랜딩 트레일을 걷는 즐거움, 자이언 국립공원




트레일 입구로 가는 셔틀버스 안. 나같은 의욕적인 게으름뱅이가 가장 기운 넘치는 시간이다. 상쾌한 공기, 샘솟는 아드레날린, 부지런히 하루를 시작했다는 뿌듯함. 역시 걷기만한 운동이 없어!

등반로 초입부터 열정적인 사진 작가 정신을 펼쳤다가 뒷따르는 사람들에 등 떠밀리듯 다시 걸었다. 이른 아침 추위에 플리츠까지 입고 나섰건만 삼십분도 안돼 몸이 후끈 덮혀졌다. 남편 두두에게 불러 세우고, 겉외투를 벗어재꼈다. 멈춰 선 김에 목도 축인다. 완만한 구릉지를 통과하던 길은 점점 자이언 캐년의 암벽으로 향했다. 그리고 본격적인 오르막이 시작됐다.


오르막을 오르며 좀전의 의욕과 낙관은 김 빠지듯 사라져갔다. 그래, 등산은 귀찮은 활동이었지. 몸이 기억하는 게으름이다. 벌써 하산 생각이 스멀스멀 머릿속에 인다. 낙천과 기력이 넘치던 이십분 전의 나는 어디가고 고된 등산의 기억을 떠올리고 있다. 하산이... 하고 싶다는 볼멘소리는 절대 할 수 없다. 새벽 단잠에 든 두두를 신나게 깨워 출발을 서두른 사람이 이제와 툴툴댈 수는 없는 법이다.

꺽어지는 협곡따라 흐르는 버진 강이 보인다. 강, 계곡으로 말할 것 같으면.. 등산이 끝나고 먹는 파삭한 파전에 달달하고 시워언한 막걸리가 최곤데. 여긴 미국이었지.




엔젤스 랜딩 트레일의 첫번째 전망 포인트




멀리 절벽 틈에 지그재그 길을 오르는 사람들의 움직임이 개미만하게 보인다. 자이언 캐년의 상징, 화이트 클리프를 타고 오르는 길이었다. 절벽 암반에 얕은 굴을 파서 만든 등반로는 아스팔트로 잘 닦여 있고 경사도도 심하지 않다. 대신 절벽을 넘으려면 횟수를 세기도 어려운 커브길을 여러번 돌아야 했다. 등산이란 모름지기 '빡센' 구간이 있게 마련. 등산은 싫지만 '프롬 코리아'인 사람인지라 당연하게 받아들인다. 코너 모퉁이에서 숨을 고르는 옆으로 미합중국의 젊은 친구들이 지났다. 그녀들은 등산의 어려움을 출신 주에 따라 상대적으로 평가했다.

'나는 텍사스 출신이야' 

신나게 대화를 하던 무리 중 한 명의 말에 주변은 이해됐다는 듯 '오우~' 짧은 감탄사가 터졌다.







지그재그의 모퉁이를 열댓번 돌고 절벽 위에 숨겨진 작은 골짜기에 도착했다. 오래전엔 서로 붙어 있었을 두 벽의 갈라진 틈에는 작은 숲이 생겨났다. 숲의 공식 거주민도 있는 모양이다. 푯말엔 올빼미가 자고 있으니 모두 소리를 줄여달라는 문구가 적혀있다. 하지만 힘든 오르막을 끝내고 평지를 만난 사람들은 발걸음 만치나 목소리도 힘찼다.


화이트 클리프라고 불리는 자이언의 바위산은 이름과 달리 밝은 황토빛이 압도적이다. 밑둥의 어두운 붉은색은 고도가 높아질 수록 점점 밝은 주황색으로 옅어진다. 그리고 정상부에서는 새하얀 메사 지형이 드러난다. 우린 그 주황빛 절벽의 중턱을 오르고 있었다. 이 길을 걷다보면 자이언 캐년의 독특한 그라데이션을 직접 확인할 수 있을까.


산 속에 들어가는 재미는 멀리서 보던 자연의 품 속을 파고들어 딛는 발자국 그리고 뻗는 손길마다 자연과 연결을 이루는 것이다. 언택트 시대에 걸맞지 않지만 괜히 붉은 돌벽을 쓰다듬었다. 부드러운 표면을 훑은 손바닥에 모래가루가 남았다. 옛날 옛날 아주 옛날 이 지역은 이 모래가 끝도 없이 펼쳐진 사막이었다고 한다. 또 옛날 옛날 어느 옛날엔 바다이기도 했다. 무한한 우주의 시간을 되짚으면 명명하는 것, 정의하는 것이 무색해진다. 캐년이지만 바다였던 곳, 바다였지만 사막, 강이었던 곳. 지금 자이언 캐년이라 부르는 땅의 이름과 형상은 백만년 후엔 또 달라질 것이다.

손바닥을 비벼 모래를 털어냈다. 몇 알의 모래가 수백만년동안의 결속에서 벗어나 중력 속으로 자유롭게 흩어졌다.







길은 쇠사슬이 박힌 암반과 잡을 나뭇가지 하나 없는 허공 사이로 안내했다. 트레일의 악명높은 구간이 시작됐다. '2004년부터 13명이 추락사망 발생'. 엔젤스 랜딩 트레일 초입에 있던 안내판의 가장 윗 줄엔 이런 문구가 있었다. 장갑을 끼고 쇠밧줄은 잡아 쥐었다. 휘청거리지 않고 두 손에 단단히 붙들리는 감이 썩 안정적인 게 마음에 든다. 바위 위로 두 발 역시나 무난하게 안착해 걸을만 했다. 하지만 문득 머리속이 허공을 그릴 때마다 뒷목은 쩌릿하고, 몸에 힘이 꽉 들어갔다.


얼마 안가 산마루에 올랐다. 페스츄리 속살처럼 겹이 진 너른 바위 위에 사람들이 널려 앉아 볕을 쬐고 있었다. 옹기 종기 앉아 말하고, 먹고, 물론 어느 코너에선 핸드폰 앨범이 터져나가도록 셀카도 찍었다. 파란 하늘 아래에 서서 트인 풍경을 빙 둘러봤다. 건넛산의 하얀 암벽이 어느 때보다 가깝게 보였다. 화이트 클리프는 아침 해를 받아 새하얗게 빛났다. 바위, 암벽, 산이기 보다는 차라리 지구의 뼈 화석을 더 닮은 것 같다.


이제 마지막 구간이 남았다. 하지만 여기가 이 산행의 종점이 아님 어때. 해도 비추고, 하늘은 맑고, 발 아래를 빙 돌아보고, 고개 들어또 빙 돌아봐도 경치는 지루하지 않은데. 이 모든 걸 진정으로 즐긴다면 정상은 바로 여기.




*엔젤스 랜딩의 뷰 포인트
산행은 각자의 컨디션에 맞게 무리하지 않는 것이 바람직하다. 엔젤스 랜딩 트레일은 경사가 심한 절벽부를 오르는 구간이 있어서 추락 주의, 고소공포증 유발의 위험이 있다.
트레일의 대략 1/3 지점마다 협곡이 내려다 보이는 뷰 포인트가 있다. 두 번째 뷰포인트에서도 산능선에서 360도 파노라마를 충분히 즐길 수 있다.







발 아래로 자이언 캐년의 미로가 드러났다.




정상으로 향하는 능선에 모래밭이 펼쳐져있다. 사박사박. 두 사람이 지나기에도 좁은 산마루를 구름 위 걷듯 조심히 걸었다. 세상에 둘도 없는 보도의 풍경이었다. 양 옆으로 허공인 좁은 산마루에 주황빛 사암의 차곡차곡 포개져 있고, 그 바위의 좁은 틈을 뚫고 자란 관목과 소나무는 드문드문 그늘을 만들었다. 그 가운데로 모고운 모래밭이 폭신하게 깔려 있었다.

남편 두두는 등산객의 편의를 위해 모래를 깔았을 것이라는 놀라운(!) 추측을 남겼다. 이 600미터 위 절벽에? 미국같은 나라가? 피식. 영양가 없는 얘기들을 바람에 흘려보내며 치솟은 절벽 앞으로 걸어갔다. 암벽엔 두 팔로 바위를 짚고 한 발 한 발 조심스럽게 벽을 타는 사람들이 보였다. 절벽을 넘은 저 위가 '엔젤스 랜딩 트레일_최종_진짜 마지막_레알 진짜 마지막.hwp'인 것 같다.





안전팁 ※  
자이언의 사암은 건조하고 표면이 울퉁불퉁해 많이 미끄럽지 않았다. 쇠줄을 잡고 한 발 한 발 천천히 움직이면 안정적이고 안전하게 움직일 수 있다. 하지만 상행과 하행의 사람들이 좁은 길에서 정체되기 때문에 안전이 확보된 장소에서 서로 양보를 하며 천천히 움직이는 것이 좋겠다.

미끄럼 방지 기능이 있는 장갑 추천!    
통행이 겹치는 길에서 마주하는 사람들의 일부는 마스크를 끼지 않기도 한다. 갑갑하더라도 마스크를 꼭 착용해야 한다. 알콜이 들어있는 세정제나 티슈를 챙겨서 깨끗한 손으로 정상 위 간식시간을 즐기자!
   




두두 뒤로 보이는 Great White Throne




하산객에 길을 양보하고 또 오르길 반복하고 엔젤스 랜딩 정상에 섰다. 비스듬하게 기운 나바호 사암의 층이 한 방향으로 나열해 있는 모습이 꼭 지붕 위 기왓단 같다. 바위 틈으로 군데 군데 키 작은 소나무가 자라있다. 먼 곳에서 바라보며 상상하던 그 정상의 풍경 속이었다.


사진은 둘째치고 일단 전망이 좋은 자리를 찾아 앉았다. 가바에서 간식 주머니를 꺼냈다. 겁없는 청설모가 하나 둘 다가온다. 이렇게 다 꺼내 먹고 나면 내려가는 길은 더 가벼울테다. 자이언 캐년의 지붕 위에 앉아서 풍경을 가슴으로 담았다. 엔젤스 랜딩. 내가 그 엔젤이라면 이렇게 잠깐 앉았다가 다시 날개를 펴고 쭈욱 미끄러지듯이 활강했을 것이다. 막힘없이 일직선으로 쭉 뻗어있는 이 협곡만큼 훌륭한 활주로도 없을 것 같다. 그리고 더 높은 건넛산의 '템플로'도 지나고, 하늘 더 높이 올라가서 꽃잎처럼 포개진 자이언의 돌산 무리를 바라내려다봐야지.




엔젤의 활주로




보고 있어도 보고 싶어서 지루할 때까지 있어 보기로 했다. 야심차게 구도 속에 풍경을 넣어 보는데 매번 뭔가가 아쉽다. 뷰파인더로 노려보며 애써 파노라마를 담아도 내가 받는 울림, 느낌, 감성을 한번에 담을 순 없었다.  안타깝게도 우린 좋은 모델은 더더욱 아니었다. 경치에 인물이 들어가니 사진이 ... 여러 장 찍으면 한 장은 나오겠지라는 심산으로 연신 셔터를 눌렀다. 그러는 동안 협곡을 드리우던 긴 그림자가 짧뚱해졌다. 그리고 보니 어깨도 화끈거린다. 햇님이 중천에 떠오르셨다.



하산도 조심히 하십시다~ 내려가다가 사고나가 더 쉬워 알지?

나의 경고 알람이 재가동됐다. 이건 그한테 뿐만 아니라 나한테 하는 말이기도 했다. 물과 주전부리를 비운 가방은 한층 가벼워졌고, 기분이 날 듯 가벼웠다. 잰걸음으로 빠르게 하강을 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었다. 물론 급경사를 체인줄을 쥐고 내려가야 했으니 정신 바짝 차려야 했다.

하산길은 나름대로 소소한 재미가 있었다. 목표를 완수했으니 올라갈 때 보지 못한 디테일한 것들을 찾을 수 있었다. 아슬아슬하게 걸쳐진 바위, 절벽의 결무늬, 바위에 핀 이끼 같은 것들이었다. 엔젤처럼 활강을 하고 바람은 즐기지 못해도 이 정도면 훌륭한 하산길이다. 파전도 막걸리도 없는 버진강을 다시 스치면서 이번엔 서로의 손을 잡고 길을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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