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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삼 Jun 22. 2020

덜 늦은 남미 여행기

스페인 여행 처럼은 되지 말자

게으름과 기록. 이 두 단어는 반의어 임에 틀림없다. 게으른 사람은 기록을 하지 않는다. 기록을 하는 사람은 게으르지 않다. 명제와 역치가 모두 일치한다. 게으름과 기록은 양립할 수 없는, 반의 관계이다. 그런데 게으를지언정 기록하려 하는 생각은 지독하다. 이를 테면 관성 같은 거다. 기록해야겠다는 생각을 품지만, 다시 게으름으로 돌아가려는 관성. 또는 귀찮아하지만 기록해야 한다는 생각을 품는 관성. 그런 것.


그러나 괘씸한 것은, 그 관성을 아무렇지 않아 할 땐 언제고 후회라는 마음을 품는다는 점이다. 게으름과 기록이 반의어라는 것을 알면서도, 아무렇지 않아 했으면서도, '왜 그때 안 적었지' 하는 후회를 갖는 것이 뻔뻔하다. 한 번은 실수겠거니 생각하겠지만, 두 번은 현실이자 실수라는 꼬리표가 붙지 않는 나 자신이다. 


무슨 소리냐고? 이번 여행은 이전의 스페인 여행처럼 되면 안 되겠다는 말이다.






스페인, 어땠는데?


연도까지 가물거리는 2016년, 스페인 사람조차 더워 북부로 피한다는 그 8월의 한여름. 나는 스페인 남부로 한 달 간의 여행을 떠났다. 이전부터 지녔던 홀로 여행의 로망을 실현시키겠단 포부보단, 지금이 아니면 혼자서 언제 부딪혀보겠냐는 불안, 아쉬움으로부터 시작되었다. 그러고 보면 난 늘 미래에 대한 낙관 그리고 불안과 함께 살아왔다. 긍정은 없었다. 낙관과 긍정은 비슷해 보일지라도 분명 다르니깐 한 달간의 학군단 여름 훈련이 끝나고, 딱 그라나다까지만 정한 여행이 시작되었다. 혼자였기에 외로웠고, 외로웠기에 함께 했다. 그 사이엔 다양한 이야기가 섞여 있었다. 그러나 이야기를 들어 보면 '단편의 썰' 뿐이다. 혼자 또 함께 가졌던 생각들과 오갔던 대화는 기록의 부재로 인해 무의식 어딘가에 표류하고 있다. 이제 여행을 추억할 수 있는 것은 서랍 속 빛바랜 인화 사진과 클라우드 안에서 환하게 웃는 과삼이(과거의 이삼) 뿐이다.


늘 그렇듯 여행은 끝났고, 나는 그때를 땔감 삼아 살아간다. 즐거웠던 단편들을 태우며 오늘의 고됨을 잊기도 하고, 새로운 사람들과의 대화 주제로 사용하기도 한다. 모두가 비범하다. 나의 여행기 역시 평범과 비범을 오고 갔고, 남들이 놀랄 만한 즐거운 이야기부터 지극히 평범한 이야기가 공존한다. 턱을 괴고 궁금해하는 상대에게 이야기를 한바탕 쏟아낸다. ‘대박이네!’ 관객의 짧은 감상평이 끝나고, 스포트라이트가 다른 사람을 비추는 순간이 오면 나는 잠시 공허해진다. 내가 뱉어댄 지난 여행에서 나는 무엇을 느꼈는가. 자극적이고 비범한 단편의 썰이 아닌, 내가 진정으로 두근거리고 심오해지는 나만의 순간이 있었나. 나는 스페인에서 어떤 여행을 하였는가. 이것에 대해 생각을 시작하면 나는 약간 우울해진다.


기록의 부재, 기억의 유실은 이런 거다. 사진을 찍었지만, 기록이 없기에 어딘지 모르는 것. 그저 웃는 과삼이만 남았다.



그래서 지금은?


그때도 그랬지만, 지금 역시 여행을 기록하고 싶어 한다. 왜 그때 하지 못했을까 하는 후회는 이미 만성이니까, 이제라도 기록하려 글을 적는다. 알다시피 한번 시작하면 제대로 시작하여야 적성이 풀리는 성격 탓에 꽤나 공을 들이겠지만, 어쩌겠는가. 그저 이 글을 읽는 누군가가 내 늦은 여행기에 관심을 가지고 다음 글을 궁금해하면 좋을 것 같다. 지금부터라도 남미 여행을 갈 때의 이야기를 적겠다. 대신 비범함보단 평범함을, 구체적이고 정확함보단 엉성하지만 친근한 이야기로 풀어갈 수 있었으면 좋겠다. 부디 내 기억력이, 19년 11월의 나로 돌아가게 만들어 주길 바라며.


생각나는 대로 최대한 적겠다. 여행에서 찍은 작은 사진들을 오려 붙여가며, 내가 어디서 출발하였는지 어떤 일이 나를 즐겁고 슬프게 하였는지 기억해내겠다. 고되더라도 값진 결과가 만들어지길 바란다. 하지만 역시 지금의 기억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기억은 미화되어 추억이 될 테니, 객관적인 것은 무엇도 없다. 내가 이용했던 버스의 요금조차도 틀렸을 테니 내 여행기에서 객관을 기대하면 안 된다. 남미 여행에 대한 정보보다, 우연히 만난 친구가 푸는 여행기 정도로 보아주었으면 한다. 중간중간 비어있는 기억의 공간엔 부끄럽지만 엑박(‘엑스박스’, 링크된 이미지의 유실로 발생한 이미지 에러 화면, MS사의 Xbox는 아니다)으로 표시하겠다. 유실된 기억에 멈춰 있으면, 아무 기록도 할 수 없다. 에러를 띄우더라도 이 여행기를 꼭 완성하고 싶다.




더 늦기 전에, 덜 늦었을 때에 쓰는 ‘덜 늦은 남미 여행기 시작해본다. 





미리 보는 스포일러

다음 글은, 왜 나는 많은 여행지 중에 남미를 선택하였는지 적어보려 한다. 어느 것 하나 쉽게 정하지 못하고 많은 고민으로 시간을 태웠으니까, 그때의 시간과 고민했던 내가 아까워서라도 적어야겠다. 이 여행기를 재밌게 보는 방법은, '과연 미리 보는 스포일러대로 글이 흘러갈까?' 여기에 집중하면 조금 더 글을 풍부하고 즐겁게 읽을 수 있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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