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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느낀표 Jul 01. 2022

90만 원으로 떠났던 세계일주가 남긴 것

30대에 돌아본 20대의 여행과 그 의미

20대 초중반에 떠났던 1년간의 여행이 30대 직장인이 된 지금의 나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 생각해봤다. 왜 여행을 떠나게 되었는지, 그 여행에선 무슨 일이 있었는지, 그래서 그 여행이 나에게 끼친 영향은 무엇인지.


나의 첫 해외여행은 죽음의 문턱이었다.  

나의 첫 해외여행은 이집트였다. 만 15살에 이집트로 유학 아닌 유학을 하면서 12살 차이 나는 친형과 함께 1년을 살았는데, 그중 약 2개월가량 혼자 배낭여행을 했다. 혼자 여행을 하기엔 어린 나이였지만, 나도 형도 한국에 계셨던 부모님도 겁이 없었다.


약 15년 전 이집트는 아주 허술한 나라였다. 물건 배송이 늦어져 업체에 연락을 하면 '인샬라'를 외치는 곳이다. '인샬라'는 아랍어로 '신의 뜻대로'라는 뜻이다. 여행 중 방문한 장소들의 시설이나 기구 관리 역시 '인샬라' 정신으로 관리되고 있었다. 덕분에 여행 중에 두 번의 죽을 고비를 넘겼다.


그중 한 번은 흔히 얘기하는 '휴 죽을 뻔했네'가 아닌, 남이 구해주지 않았으면 정말 목숨을 잃었을 상황이었다. 홍해 바다에서였다. 배를 타고 2시간가량, 홍해 바다 한가운데 나와 일행이 떨궈졌다. 다른 일행들은 모두 바다 깊이 들어가는 스쿠버 다이빙을 했는데, 나 혼자만 나이가 어려 수면에서 스노클링을 했다.

수영을 못 했지만 딱히 구명조끼나 물에 뜨게 해주는 스윔수트는 없었다. 오로지 스노클링 마스크뿐. 그런데 스노클링 마스크에 문제가 있었다. 마스크에 물이 찼다. 배운 대로 물을 빼내려 숨을 후- 내뱄았지만 어설펐던 날숨에 물이 충분히 빠지지 않았다. 들숨에 짠 물이 들어왔고, 당황하기 시작했다. 허둥대기 시작했고, 몸은 가라앉고, 코로 입으로 물이 들어왔다. 주위에는 아무도 없었다.


주마등이 스쳤다. 정말 주마등이라는 것을 보았다. 고작 15살이었지만 이전의 삶이 후회되었다. 친구랑 같이 시작했던 기타를 포기한 것, 공부도 노는 것도 무엇하나 제대로 하지 않았던 것, 만사를 귀찮아하고 호기심을 가지지 않았던 것. 

이집트라는 곳에 와서 멋진 장소, 멋진 사람들을 보면서 세상을 더 알고 싶었는데 나는 물속으로 가라앉고 있었다.


정신을 잃고 얼마 뒤에 눈을 떴을 때 나는 배의 갑판 위였다. 한 이집트인이 저 멀리서 허우적대는 나를 보고

 구해줬다고 했다. 말 그대로 다시 한번 얻은 삶이었고, 물속에 가라앉으며 했던 후회를 다신 하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1년간의 이집트 생활이 끝나고 한국으로 돌아왔을 때, 가족을 비롯해 주변 사람들은 하나같이 내가 달라졌다고 했다. 특히 눈빛에 생기가 돈다고. 그 무렵부터 나에게는 특이한 강박이 자리 잡았다. 고생 끝에 성장이 온다는 믿음과 열심히 살아야 한다는 생각.


그 생각은 가슴 한편에 계속 남아 8년 뒤 나를 1년간의 세계일주로 떠밀었다. 사서 하는 고생으로.

2015년, 90만 원으로 세계일주를 떠났다.



허술하고도 맹목적인 여행이었다.

시작은 스페인 산티아고 순례길에 대한 로망이었다. 그런데 스페인에 갈 돈이 없었다. 호주에서 일을 하기로 했다. 찾아보니 워킹홀리데이로 4, 5개월 바짝 일하면 1천만 원 이상을 벌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 호주에서 여행을 시작하자. 바로 옆에 뉴질랜드가 있으니까 한 번 둘러보고, 그다음에 스페인으로 가자.


그런데 지구 반대편까지 비행기를 타고 가자니 아쉬웠다. 이왕 가는 거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타고 가보는 건 어떨까? 돈도 훨씬 싸고. (블라디보스톡에서 모스크바까지 20만 원 대였다.) 블라디보스톡으로 가서 시베리아 횡단 열차를 타고 모스크바로 가자.


이왕 모스크바까지 갔으니 동유럽부터 스페인까지 구경하면서 가는 건 어떨까? 돈이 부족하겠지만 히치하이킹을 하면 되겠지.


산티아고를 걷고 나서는? 스페인어도 공부할 건데 남미까지 한 번 갔다 와보자. 남미를 돌고 뉴욕으로 넘어가서 한국에 오면 되겠다.


이렇게 호주 - 뉴질랜드 - 러시아 - 헝가리 - 체코 - 오스트리아 - 독일 - 프랑스 - 스페인(산티아고 순례길) - 브라질 - 아르헨티나 - 칠레 - 페루 - 쿠바 - 미국(뉴욕)으로 이어지는 여행 계획을 세웠다.

계획이라곤 했지만, 거의 모든 행선지는 산티아고를 오가는 길에 들리는 것이었다. 그런데도 나는 이 설픈 계획에 집착했다. 참으로 허술하고도 맹목적인 여행 계획이었다.



내 여행의 테마는 관광도, 역사도, 음식도 아닌, '나'였다.

냉소적으로 말하면, 굳이 그 나라들이 아니었어도 됐다. 프랑스에서는 바게트로 대부분의 끼니를 때웠고, 페루에서는 마추픽추도 보지 않았다. 그래서 누군가는 말했다. 그게 무슨 여행이냐고, 고생이지.


아이러니하게도 여행(Travel)이라는 단어는 고생을 뜻하는 트러블(trouble)과 함께 라틴어 '트레팔리움(trepalium)'이라는 고문도구의 이름에서 유래했다. 그런 면에선 나름 여행다운 여행을 하고 온 것도 같다.


물론 못 본 것이 많아 아쉬운 마음이 있다. 분명, 관광을 하고 그 나라의 특색을 보고 느끼고 오는 여행을 하고 싶기도 했다. 하지만 후회되진 않는다. 당시 나에게 여행지의 속성은 '낯섦'이었고, 나는 그 '낯섦' 속에서 위기를 극복하는 데 사력을 다 했다.


낯섦을 극복하는 과정은 평소에 알지 못했던 나의 모습을 발견하는 과정이기도 했다. 결혼할 사람과 꼭 여행을 함께 가보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아마도 숨겨진 모습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나는 나에 대해 잘 알고 있을까?


나의 여행은 낯선 상황 속에서 숨겨진 모습을 발견하는 데 의미가 있었다. 극적인 순간들 속에서 나를 발견했고, 내가 어떻게 그 순간들을 받아들이는지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리고 그 극적인 순간들이 어떻게 지나가는지 볼 수 있었다. 그 점이 내가 여행을 하며 느꼈던 고생스런 여행의 장점이었다.





그래서, 세계일주가 남긴 것은.

가장 극적인 순간들을 꼽아보자면, 아르헨티나에서 칠레로 넘어가는 차 안에서 핸드폰을 도둑맞았을 때였다. 핸드폰을 도둑맞고 극심한 스트레스로 쌍코피가 났다. 칠레에 도착해 터미널에서 정신을 차려보려 애쓰던 때에 60L짜리 배낭을 도둑맞았다. 무아의 지경에 이르렀다.(유럽과 남미에서의 사진이 거의 날아갔다.)


그 외에도 대마초를 숨겨놨던 차에 히치하이킹을 했던 일(검문소를 겨우 통과했다.), 비자가 필요한지 몰라 비행기 값을 버린 일(히치하이킹을 하면서 아꼈던 돈이 다 날아갔다.), 팬티만 입은 카우치 서핑 호스트가 독한 술을 먹이려 하고 자신의 침대로 오라고 했던 일(호스트는 남자였다.) 등등 생각해보면 별 일이 다 있었다.


그런데 그런 극적인 순간들보다 힘들었던 건 그 허술하고 맹목적인 여행 계획에 집착하는 나의 모습이었다. 짜 놓은 여행 동선이 어긋나는 것을 두려워했고, 정해진 날짜에 다음 나라로 갈 수 없는 상황에 좌절했다. 더 많은 걸 경험하고 봐야 한다는 압박감 속에서 스트레스를 받았다. 


하지만 여러 난관에도 불구하고 결국은 다음 목적지에 도착했고, 여행은 이어졌다. 가끔은(사실은 꽤 자주) 하고 싶었던 것을 못하고 가려고 했던 곳을 못 가기도 했지만, 거기엔 새로운 즐길 거리가 있었다. 그런 경험 속에서 나는 나쁜 일이 있으면 좋은 일이 생긴다는 것을 체감했고, 또는 나쁜 일이 나중에 보면 나쁜 일이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좋고 나쁨은 생각하기 나름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어떻게든 되겠지 하는 마음을 가지게 되었다.




여행은 일상의 타임랩스다.

여행은 극적이다. 새로운 환경에서 너무나도 새로운 문제들과 대면한다. 모든 일들이 빠르게 일어나고, 문제가 생기면 어떻게든 빨리 그 문제를 해결해야만 한다. 문제가 생기고 그 순간을 넘어가는 과정이 한눈에 보인다.


그런 면에서 20대의 나의 여행은 삶의 미리보기이자 밀도 높은 삶의 축소판이었다. 극적인 순간들이 연이어져 나타나고 난관들을 넘겨가며 다음 목적지에 도착해서 결국은 끝에 달하는. 그 밀도 높은 시간 속에서 나는 의연함 혹은 여유로움을 얻었다. 조급해하지 않고 어떻게든 되겠지 하는 마음. 


여행을 마치고 일상으로 돌아온 뒤 몇 년이 지났다. 졸업을 했고, 취업을 했고, 두 번의 이직을 했고, 결혼도 했다. 직장상사 때문에 극심한 스트레스에 시달리기도 했고 이직을 할 때는 이게 맞는 결정인지 잠을 설쳐가며 고민했다. 직장에서의 실수 때문에 얼굴이 새파랗게 질릴 때도 있었다. 여자친구와 헤어져 한참을 폐인처럼 살기도 했다.


일상의 문제들은 천천히 일어난다. 때로는 바로 해결하지 않고 방치할 수도 있다. 그래서 나도 모르는 새에 조급함, 불안함, 초초함에 잠기게 된다. 하지만 여행이라는 타임랩스를 봤던 나는 예전보다 깊이 가라앉지 않았다. 그런 난관에도 불구하고 결국은 다음 순간으로 넘어갈 것임을 알 수 있었다. 나쁜 일이 있으면 좋은 일이 있을 것이고, 나쁜 일이 돌아보니 오히려 좋은 일일 수도 있다는 믿음이 있었다. 어떻게든 되겠지 하는 마음으로 넘겼고, 실제로 잘 넘어갔다. 헤어졌던 여자친구와도 다시 만나 결혼까지 했다.


30대가 시작되었고, 아직 겪어보지 않은 또 다른 '별 일'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 것 같은 예감이 든다. 높은 확률로 좌절스런 순간들, 넘지 못할 것 같은 난관들이 찾아올 것이다. 그때마다 의연함 혹은 여유로움을 되새길 수 있다면 분명 큰 힘이 될 것 같다. '어떻게든 되겠지' 하는 그런 마음.



산호와 물고기와 주마등을 봤던 홍해 바다
호주에서 설거지를 하며 돈을 벌었다.
어느 정도 돈이 모이고, 로드트립을 했다.
로드트립의 목적지는 울룰루였다.
뉴질랜드와 동유럽은 대부분 히치하이킹으로 이동했다.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타고 유럽으로 갔다.
유럽에선 주로 카우치 서핑을 이용했다. 낯선 사람에게 무료로 소파를 내어준다.
역시, 산티아고가 가장 좋았다.
아르헨티나의 한 동물원에서는 사자 우리 안에 들어갈 수 있었다.
여행의 끝자락이었던 남미에선 상당히 지쳐있었다.
여행 중에는 많은 사람과 만나고 헤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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