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일간의 신혼여행 - 28일 차에 느낀 나의 문제
아내는 준비가 철저한 편이다.
그 준비성은 산티아고 길을 걸으면서도 여실히 드러나는데, 그중 하나가 짐을 쌀 때이다. 산티아고 길을 걸으면 매일 새로운 숙소에 도착해 짐을 풀고, 다음날 아침이면 다시 짐을 싸 떠나야 하기 때문에 가방을 자주 싸고 풀어야 한다. 바로 이 지점에서 아내에게 자주 잔소리를 듣고 있다.
아내는 전 날 짐을 완벽하게 싸 놓고, 다음날 아침에 가방만 쏙 들고 가게 만들어 놓는다. 반면 나는 짐을 완벽하게 싸 놓지는 않는다. 물론 나름의 이유가 있다.
다음날 아침에 양치랑 세수도 해야 하고, 선크림도 발라야 하고, 충전기도 빼서 다시 가방에 넣어야 한다. 짐을 다 싸 놓는다면 아직 어두컴컴한 새벽에 일어나 다시 가방을 열고 이중으로 일을 해야 한다. 효율적이지 못하다.
더욱이 나는 짐들을 다 분류해서 정리해 놓았기 때문에, 내일 아침에는 딱딱 넣기만 하면 된다. 보기엔 널브러져 있지만 내 머릿속에 이미 다 정리가 되어 있는 것이다. 나는 아내가 저녁 시간에 부산스럽게 짐을 쌀 때마다 비효율적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산티아고 길을 걸은 지는 20일째, 우리는 예정된 시간보다 늦게 출발하는 경우가 잦았고, 대부분은 아침에 허둥대는 나 때문인 경우가 많았다. 분명 잘 분류되어 있는 짐들을 넣기만 하면 되는데 항상 뭔가 빠트리거나 심지어 물건을 놔두고 오는 일이 있었다.
오늘 저녁에도 짐을 싸고 있는 아내를 멀뚱멀뚱 지켜보던 나는 아내의 눈초리에 화들짝 놀라 일어섰다. 왜 갑자기 그런 바람이 들었는지는 모르겠으나, 20일이라는 시간 동안 나 때문에 늦어진 걸 몸소 느낀 나는 내 고집을 내려놓고 아내에게 한 수 배워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말 최소한의 물건만 빼놓고 다 넣어 놔야 해”
아내의 짐 싸기 강의가 이어졌다. 예를 들어, 나는 아침에 칫솔과 비누를 써야 하니 세면도구 가방을 다 꺼내 놓았다. 하지만 아내는 세면도구 함은 가방에 넣어 놓고, 칫솔만 빼서 침대 옆에 두고 잔다고 했다.
“이렇게 하면 아침에 양치질을 하고 칫솔만 넣으면 되기 때문에 물건을 잃어버릴 없고, 아침에 허둥댈 일도 없어”
“근데, 저녁에 가방을 다 싸 놨는데 아침에 생각해 보니 뭔가가 필요하면? 그럼 가방을 다시 다 헤집어야 하잖아”
내가 말했다.
“그래서 시뮬레이션이 중요해”
“저녁에 짐을 쌀 때 다음 날 아침에 뭐가 필요할지를 미리 생각해야 해. 이때 머릿속으로 아침에 일어날 일들을 시뮬레이션하면서 뭐가 필요할지 생각해야 해”
시뮬레이션. 아내가 잘하는 것 중 하나이다. 아내는 매사에 신중하고 걱정이 많은 타입이라 어떤 일이 일어날지 미리 예상하고 만반의 준비를 마쳐 놓는 성격이다. 반면에 나는 미래의 일을 예측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해 그때마다 상황에 맞춰 유연하게(때로는 즉흥적으로) 대응하는 편이다.
각각의 장단점이 있겠지만, 적어도 짐을 싸고 내일 아침 출발을 준비하는 데 있어서 즉흥성을 고집할 필요는 없다. 아내의 방식대로 시뮬레이션을 하며 내일 아침 필요할 물건을 생각하고 빼놓으면 되는 일이었다.
나는 아내의 말을 곱씹으며 눈을 감고 내일 아침에 일어날 일들을 시뮬레이션했다.
‘눈을 뜨고 침낭을 갠다. 양치와 세수, 면도를 하고 수건으로 닦는다. 잠잘 때 입었던 옷을 그대로 입고 나갈 것이고, 양말과 무릎 보호대를 착용해야 한다. 충전이 다 된 카메라와 핸드폰을 챙기고, 충전기를 넣는다. 슬리퍼는 가방에 매달고 등산화를 신는다. 모자와 스틱을 챙겨서 속소를 나간다.’
그리고 시뮬레이션대로 아침에 딱 필요한 세면도구와 충전기를 제외한 모든 짐을 완벽하게 싸 놓았다.
‘음, 이게 되는구나…’ 속으로 생각했다. 그동안은 이 저녁시간에 오래 생각하는 게 귀찮아서 준비를 안 했던 것임을 깨달았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 우리는 준비를 착착 마치고 빠르고 깔끔하게 숙소를 나올 수 있었다.
역시, 고집부리지 않길 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