빅 데이터로 부족한 인사이트를 얻는 방법
한국에서 '빅 데이터(Big data)라는 단어가 본격적으로 회자되기 시작한 건 2016년 알파고와 이세돌 9단의 바둑대결 이후가 아닐까 싶어요.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결과에 인공지능에 대한 관심이 일반인에게 까지 퍼졌고, 더불어 빅 데이터 역시 '대 유행'이 되었죠.
거의 모든 것이 기록으로 남는 이 시대에, 우리는 수치와 통계를 통해 사람과 세상을 이해하려는 노력을 기울였어요. 실제로 빅 데이터는 이전까지 보지 못했던 상관관계를 파헤치고 새로운 답을 주었어요. 빅 데이터가 기업은 물론 개인에게도 새로운 시대를 연 것이죠.
하지만 모든 것에 답을 줄 것 같았던 빅 데이터는 점차 한계를 드러내기도 했어요. 우리가 보지 못했던 '사실'은 명확하게 보여주지만, 그 이면의 '이유'를 알려주지는 못하거든요.
이런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 바로 Thick data(씩 데이터)에요.
인류학자 트리시아 왕(Tricia Wang)이 클리퍼드 기어츠(Clifford James Geertz)의 'Thick Description'을 차용하여 만든 개념이에요.
두 명의 소년이 있고 그중 한 명이 한쪽 눈꺼풀을 깜빡인다고 해보죠. 이를 설명하는 방법에는 Thin Description과 Thick Description, 두 가지가 있어요.
Thin Description은 이를 '황급히 눈꺼풀을 수축하는 행위'라고만 설명하는 것이에요. 반면 Thick data는 그 행위가 경련인지 윙크인지 맥락에 따라 다른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죠.
그러니까 Thick Description은 행위 자체뿐 아니라 그 맥락까지 설명하는 것을 말해요.
빅 데이터와 비교를 해보면,
빅 데이터는 정량적이고 머신러닝에 의존한다면
Think data는 정성적이고 인간 학습에 의존해요.
빅 데이터는 패턴 식별을 위해 변수를 제거하여 해상도가 떨어지는 반면
Thick data는 복잡성을 수용하며 확장성이 떨어져요.
빅 데이터는 '무엇을 얼마나'에 관해서,
Thick data는 '왜, 어떠한 맥락에서'에 대해서 통찰할 수 있는 방법이에요.
이런 차이로 인해서 빅 데이터와 Thick data는 서로를 보완할 수 있는 관계에 있어요.
이처럼 빅 데이터는 강력한 도구이지만,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만능열쇠는 아니에요. Thick data가 합쳐져 이유와 맥락에 대한 통찰이 더해졌을 때 비로소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힘이 생기죠.
책 <THICK data>(백영재, 테라코타)는 Thick data를 수집하기 위한 5가지 방법을 제시하고 있어요.
Tolerance (관용): 문화 상대주의에 입각해 낯섦에 관대해지기
흔하고 친숙한 것일수록 잘 알고 있다고 착각하기 쉬운데요. 무언가에 대한 통찰을 얻기 위해서는 선입견을 버리고 새로운 시각으로 가정이나 예측 없이 관찰을 해야 해요.
이를 위해 활용할 수 있는 것이 개방형 질문이에요. 보기가 정해진 질문으로는 질문자의 선입견을 넘어서기 어렵기 때문이에요.
개방형 질문을 하다 보면 준비한 질문이 소용 없어지고 현장에서 새롭게 질문을 구성해야 할 때도 있는데, 이 과정에서 소비자의 진정한 생각을 읽을 수 있어요.
Hidden Desire (숨은 욕구): 관찰을 통해 소비자의 숨은 욕구를 찾기
2007년 미국미생물학회와 비누세제협회의 보고에 따르면, 미국의 성인 남녀에게 전화로 공중화장실 이용 후 손을 씻느냐고 물었을 때는 92%가 그렇다고 대답했지만, 실 제로 미국 네 개 도시에서 공중화장실을 이용하는 6,000명을 직 접 관찰한 결과 여성의 88%, 남성의 66%만 손을 씻었다는 결과를 얻었다고 해요.
즉 사람들은 솔직한 대답을 하지 않는다는 이야기인데요. 그것이 체면 때문이든, 인지하지 못하기 때문이든 물어보는 것만으로 진실을 얻기란 어렵습니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관찰인데요. 실제로 P&G에서 청소용품 신제품 개발을 위해 설문을 했을 때 소비자들은 불만이 없다고 답했지만, 고객의 삶 속에서 관찰을 한 결과 청소 자체보다 더러워진 물걸레 빨기를 어려워하는 모습을 발견했다고 해요. 이후 더러워진 걸레를 세탁하는 대신 새것으로 교환할 수 있는 스위퍼(Swiffer)라는 제품을 출시해 성공했다는 일화가 있어요.
관찰을 통해 소비자들이 스스로 인지하지 못하거나 표현하지 않는 내면의 욕구를 발견할 수 있어요. 이는 표면적인 요구를 넘어선 깊은 통찰을 제공할 수 있습니다.
Informants (정보 제공자): 극단적인 소비자 및 나만의 자문단을 적극 활용하기
글로벌 게임회사 블리자드는 다른 게임 회사들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커뮤니티팀이라는 부서를 운영하고 있어요. 이 부서에서는 블리자드의 코어 팬들에게 필요한 이벤트와 서비스를 제공하는데, 극단적인 사용자들이 브랜드 팬덤과 충성도를 높이는 중추적인 역할을 한다는 것을 잘 파악한 사례라고 할 수 있어요.
또 <THICK data>의 저자는 비흡연자임에도 한국필립모리스의 CEO를 역임하기도 했는데요. 이를 가능하게 했던 것은 해당 분야에 대한 깊은 지식과 경험을 가지고 있는 자문단을 통해 충분한 간접경험을 할 수 있었기 때문이라고 해요.
Context (맥락): 소비자의 말이 아닌, 총체적인 맥락에 집중하기
똑같은 무표정한 남자의 사진을 보여줘도, 장례식 사진 뒤에 보여주면 슬퍼하는 표정으로 인식되고 책이 빽빽한 서재 사진 뒤에 보여주면 따분한 표정으로 인식된다고 해요. 이처럼 맥락을 파악하는 것은 인간의 감정을 파악하는 데 중요한 단서가 됩니다.
<P&G의 이기는 마케팅 99>(찰스 L. 데커)에도 소비자의 말이 아닌 맥락을 이해하는 일의 중요성을 보여주는 사례가 나와있는데요. 각 가정을 방문해 액체 세제를 사용할 때의 모습을 관찰한 결과 세제 일부가 용기 밖으로 흘러나오는 문제를 발견했어요. 하지만 소비자들은 사전 인터뷰에서 해당 세제에 아무런 불만이 없었는데요. 세제가 흘러나오면 빨랫감으로 대충 닦아주면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에요.
P&G는 소비자의 말을 그대로 믿기보다 사용 환경의 맥락을 파악하고 이를 개선한 제품을 만들어 시장에서 성공하게 됩니다.
Kindred Spirit (공감): 참여를 통해 소비자에게 공감하기
인류학자 클리퍼드 기어츠 부부는 발리의 문화를 연구하기 위해 현지의 한 대가족 구역으로 이사를 했다고 해요. 하지만 처음에 발리 주민들은 기어츠 부부를 철저히 무시했다고 하는데요. 그러던 어느 날, 기어츠 부부가 주민들 사이에서 닭싸움을 구경하고 있는데 경찰이 들이닥쳤다고 해요.
이때 기어츠 부부는 신분증을 꺼내 특별 방문자의 특혜를 누릴 수 있었음에도 그러지 않고 주민들과 혼비백산해서 도망을 가죠. 이후로 부부는 마을의 구성원으로 받아들여져 수월하게 연구를 할 수 있었다고 해요.
이처럼 상대에 대한 이해와 그 문화에 대한 진정성 있는 참여 및 상호작용을 통해 더 깊이 있는 이해와 인사이트를 얻을 수 있어요.
임브레이스라는 회사는 저개발국 미숙아 사망의 가장 큰 원인이 저체온증이라는 사실에 착안해 저렴한 인큐베이터를 만들었습니다. 저개발국의 산모는 거리와 비용 문제로 병원을 거의 이용하지 않기 때문에 조작이 쉽고 휴대할 수 있는 가정용 인큐베이터를 개발해야 했어요.
인펀트 워머라는 제품을 개발하고 소비자들이 이 제품을 어떻게 쓰는지 알아보기 위해 인도를 방문했어요. 직원들은 연구소에서는 절대로 알아낼 수 없었던 사실을 알게 되었는데요. 인도의 엄마들이 온도계 눈금을 WHO가 권장하는 적정 온도인 37도가 아닌 30도로 낮춰 쓰고 있다는 것이었어요.
인도에는 서구 의약품은 효능이 너무 강력해서 오히려 몸에 해롭다는 인식이 있었기 때문이었는데요. 인도인들은 의사가 약을 한 숟가락 먹이라고 하면 반 숟가락만 먹어야 안전하다고 느꼈어요. 그러니 인펀트 워머도 적정 온도보다 낮은 온도로 사용한 것이었죠.
직원들은 이를 사용자의 실수로 치부하지 않고 자신들이 최종 사용자의 사회문화적 맥락을 고려하지 않은 탓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들은 고민 끝에 부모가 자의적으로 온도를 바꾸지 못하도록 온도 확인 기능을 뺐어요. 대신 적정 온도인 37도에 도달하면 오케이 표시가 뜨도록 디자인을 바꾸었죠. 이렇게 개선된 디자인은 각종 상을 휩쓸었으며 세계적인 성공을 거두었다고 해요.
빅 데이터를 넘어 저개발 국가의 이용자들에 대한 심도 있는 Thick data가 없었다면 아마 이런 대응은 나오지 못했을 거예요.
빅 데이터에 대한 중요성은 이제 누구나 알고 있는 시대가 되었어요. 하지만 동시에 데이터에 파묻혀 사실을 나열하는 데 바쁜 우리의 모습을 종종 발견하기도 해요. 객관적 사실을 넘어 그 현상의 원인에 대한 관점을 가지는 것이 점점 더 중요해지는 것 같아요.
<THICK data>는 단순히 데이터를 분석하는 기술을 넘어, 인간의 본질을 이해하는 것이 왜 중요한지 이야기하고 있어요. 이는 브랜드 컨설턴트로서 제가 일하는 방식에도 중요한 시사점을 남기는데요. 고객의 감정과 문화적 배경을 깊이 이해하지 않고는 진정으로 공감할 수 있는 브랜드를 구축할 없기 때문이에요.
비단 브랜드/마케팅 직군뿐만 아니라 소비자를 대하는 직업을 가진 분이라면 한 번쯤 읽어 보면 좋을 책이에요. 빅 데이터의 시대, Thick data와 함께 균형 잡힌 시각을 가지고자 하는 분들에게 추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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