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랑의 강박증과 신경증 그리고 투사..
그것은 내 외로웠던 어린 시절의 자기 연민이었다.
신랑의 감정이 열렸다. 미안하다고 사과한 그다음 날.. 분노를 삼키던 신랑의 모습은 이제 볼 수 없다. 집이 지저분하니 소리를 버럭 지르며 분노한다. 그런 신랑의 모습을 지켜만 봤다. 아직 살짝 두렵고 공포스럽다. 그러나 내가 옳다고 핏대 세우며 말하지 않기로 했다. 신랑의 감정 그대로를 인정해 주었다. 아이들에게 분노하고 뭐라 하든지 아무 말하지 않았다. 그런 신랑은 아이들에게도 조금씩 자신의 자리를 내어주는 듯하다. 꾹꾹 눌러 담아 건들기라도 한다면 깨져버릴 것만 같은 살얼음판의 냉랭했던 집안에 온기가 조금씩 돌기 시작한다.
한가로운 주말 느지막이 일어나 미뤄뒀던 설거지를 하고 있었다. 신랑은 씻고 나와 옷을 입고 난 후 아이들이 깼는지 확인을 하러 안방으로 들어간다. 둘째가 자는 중 소변 실수를 했다. 신랑은 신경질적으로 반응한다. 나는 얼른 들어가 소변을 닦아냈다. 자고 있는 둘째가 소변 실수를 한 줄도 모르고 잠에 취해있었다. 신랑이 다시 들어가더니 딸아이가 자는 곳을 확인한다. 아직 잠에 취해있는 아기라 대충 몸과 바닥을 닦아주고 일어나면 마무리 지으려 했으나 신랑은 굳이 자는 아이를 깨워 목욕을 시켜야 한단다. 잠에서 깬 아이는 늘어지면서 아빠가 자는데 깨웠다고 징징댄다. 조금 더 잘 수 있게 아이를 토닥거려 눕혔더니 잠시 후 몸에 쉬가 묻었다며 아이가 일어난다. 그런 아이를 데리고 욕실로 들어가 씻기는 신랑.
점심으로 라면을 끓여 먹고 아이들이 국물에 밥을 말아 먹을 수 있게 찬밥을 데웠다. 첫째 아이가 데운 밥을 숟가락으로 받치지 않고 그대로 국물에 풍덩해버린다. 그랬더니 국물이 사방으로 튀었고 옆에서 그걸 지켜보던 신랑이 버럭 화를 낸다. "야, 국물이 다 튀잖아!!! 어후~~" 신랑의 이런 반응에 내 눈에 힘이 들어간다. 한마디 쏘아붙이고 싶은 마음을 꾹꾹 눌렀다. 감정이 억압되는 것이 느껴져 속으로 살인의 칼자루를 꺼내 들었다. 그리고 아이가 흘린 국물을 닦으며 아이를 안심시켰다. "그럴 수 있어. 엄마도 아직 국물 흘리는데 뭐~엄마가 치울게~"자리에서 일어나 다른 방으로 가는 신랑을 보고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슬찬아.. 아빠는 어릴 때 국물 쏟으면 참 많이 혼났나 봐.."그랬더니 아들이 "할머니한테?" 한다. "그런가 봐, 할머니든 할아버지든 아빠가 상처 많이 받았나 봐.. 아빠도 슬찬이만한 어린아이가 마음에 있대~"했더니 아들이 "알아~"한다. 평소에 화가 많이 나면 늘 아이들에게 미안하다 말하며 "엄마 마음속에 어린아이가 화가 많이 났대~화내서 미안"이라는 말을 들어온 아이는 자기감정으로 끌고 가지 않는 듯하다.
그런 아빠가 신경이 쓰였나 보다. 주차장에서 두 시간 놀다 들어온 아이는 아빠를 계속 부르며 자기랑 같이 놀자고 하며 맥포머스로 이것저것 만들어달라 주문한다. "왜 이렇게 사람을 귀찮게 하는지 모르겠네"하며 아이 옆에서 아이의 요구를 들어주는 신랑. 오늘은 그런 신랑에게 연민의 감정이 피어올랐다. '얼마나 외로웠니.. 얼마나 힘들었을까.. 아무도 받아주지 않았구나...' 이 말은 지금의 나를 위로하고 있는지도...
둘째가 저녁을 먹자마자 인형을 들고 바지를 입혀달라고 하더니 5층에 간다고 했다. 5층 문을 열고 들어서니 불 꺼진 거실에 누워 텔레비전을 보고 계신 어머님이 둘째를 반갑게 맞이하신다. 어머님의 그 모습을 보고 나오는데 눈물이 쏟아진다. 쓸쓸하고 외로운 모습.. 나는 내 모습과 할머니의 모습을 투사하고 있었다.
외롭고 쓸쓸했던 어린 시절의 나. 자기 연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