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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웉 Sep 17. 2024

밤산책

9월 16일의 기록

 생활관의 동기 하나가 19시 쯤에 같이 뛸 생각 없느냐고 물었다. 썩 마음에 드는 동기는 아니었다. 아무리 군대 내에서는 나이 관계없이 생활한다지만 6살 많은 형한테 말을 툭툭 던지고 맨날 내 아몬드초콜릿을 달라고 해서 지금까지 얻어먹은게 한 봉지는 될거다. 자기 음식은 잘 나눠주지 않고 청소도 잘 참여하지 않는 그런 녀석이다. 3명 이상이 모여야만 나갈 수 있기 때문에 나에게 부탁을 한 것이다. 나는 어제 저녁에 뛰어서 다리가 아직 무거웠고, 특히 녀석과는 같이 뛰고 싶지 않았지만 아몬드초콜릿을 손바닥에 내려놓을 때처럼 거절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냥 나가서 걷기로 했다. '내 건강을 위해서 하는거야.'라는 정신승리를 하면서.

 아스팔트의 열기가 가시지 않은데다가 저 멀리서 바다와 몸을 비비다 날아온 공기 때문에 숨을 쉬는데 평소보다 1.5배 정도 노력해야 했다. 여름의 끝을 고하는 높은 구름들이 탁 트인 시야를 가득 메웠고, 벽지가 뜯어진 것처럼 보이는 하늘로 햇빛의 잔상이 새어나왔다. 구름들은 거무죽죽했지만 이따금씩 지평선 아래에서 비추는 햇빛을 반사해서 붉은 부분이 보였다. 숯 대신 구름에 불을 붙이면 그런 느낌일 것이다. 나무들은 거뭇거뭇 솟아있었다. 그 속을 걸으며 내가 알던 세계와는 다른 곳을 걷는 느낌을 받았다. 아직은 식지 않은 저녁바람을 온몸으로 맞으며 여기가 어디든지 내가 살아있구나 생각했다. 한 바퀴를 채 걷기 전에 뛰는 사람들에게 추월당해서 내가 느리게 걷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두 바퀴째에는 고라니를 만났다. 한 번도 들어본적 없는 울음소리에 고개를 돌려보니 고속도로쪽 수풀에서 고라니 한 마리가 이 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녀석은 겁 없게도 30초 동안이나 눈을 마주치더니 이내 홱 돌아서 철책 구멍 너머로 사라졌다. 뚝섬에서 넓은 철조망 안에서 키우는 꽃사슴을 본 적이 있다. 이제는 고라니가 인간이 되고 내가 꽃사슴으로 변신한 것은 아닐까. 네 바퀴를 걷고 돌아오니 이미 하늘은 완전히 어두워져 붉은 계열 빛은 이미 세력싸움에서 밀린 이후였다. 그냥 걸었을 뿐인데도 땀이 막 나려던 참이었기에 얼른 생활관으로 복귀해 에어컨을 쐬었다. 내가 알던 지구를 살짝 들추어 그 아래에 있던 지구 버젼 2를 걷다가 온 느낌이었다. 그런 여름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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